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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신학의 의의와 명제 중심 신학의 보완

by modeoflife 2025. 4. 3.

 

교회가 신앙을 정리해 온 여러 교리(명제)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 가능한 한 정교하게 구축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가 신앙의 모든 측면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을까요? 오늘날에는 내러티브 신학과 같은 흐름을 통해, 교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특히 이야기와 체험의 영역—을 더욱 중요하게 부각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두 줄의 교리 문장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살아 있는 이야기(서사)와 체험(신비)가, 명제 중심 신학을 어떻게 풍부하게 보완하는지 살펴보려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1) 비유와 이야기의 신학적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가 복음서를 펼쳐 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 보면, 이분이 직접 교리나 논리적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신 적은 별로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오히려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처럼, 짧지만 인상적인 서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라고 보여 주셨지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상황과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며 “아, 이게 진짜 하나님의 마음이구나!”라고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설명하려는 내러티브 신학 측면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논리적 문장(명제)과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고 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면, 머리로는 수긍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크고 따뜻한지는 실감하기 어렵지요. 그러나 탕자의 비유를 떠올려 보면, 아버지가 허무맹랑하게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달려 나가 끌어안는 장면이 선명히 그려집니다. 그 순간 우리는 “아, 하나님의 사랑이 저런 모습이구나. 내가 만일 죄짓고 돌아와도 하나님은 뛰쳐나오시겠구나”라는 감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미 추상적 문장을 초월한 세계가 열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러티브 신학자들은 “이야기(서사)가 신학적으로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논리적·추상적 문장(명제)은 핵심을 간결하게 요약해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인간의 실제 삶과 감정, 맥락과 갈등을 풍부하게 담아 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지요. 때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며 스무 줄의 설명을 덧붙이는 것보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하나가 “낯선 이에게 손 내미는 게 진짜 하나님 나라다”라는 메시지를 훨씬 더 생생히 전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교회 역사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부들이 삼위일체나 성육신 교리를 정리해 놓았어도, 정작 신앙인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 건 어쩌면 한 편의 순교자 이야기나,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같은 ‘삶의 이야기’였을 수도 있지요. 어거스틴이 지식적으로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라고 깨달았을 때와, 그의 실제 방황과 회심 과정을 서사로 고백했을 때가 주는 감동은 차원이 달랐을 것입니다.

 

물론 “이야기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느냐?”라며 교리를 경시할 수도 없겠습니다. 논리적 명제가 제공하는 분명한 방향성과 핵심 요약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신앙 고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야기와 교리(명제)는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돕는 관계라고 보는 편이 낫습니다. 이야기는 교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체험과 감정의 수준에서 살찌우고, 교리는 이야기가 지나친 해석 자유를 펼치다가 본질을 벗어나지 않도록 안전 울타리가 되어 주지요.

 

예수님이 비유와 이야기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신앙이 단지 지적 동의나 정보 전달을 넘어서는 사건임을 시사합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청중들은 간단한 교리적 명제를 넘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과 결단을 경험했을 테니까요. 이를 생각해 보면, 오늘날 교회가 명제를 잘 정리해 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서사)를 통해 그 명제가 얼마나 “살아 움직이는 진리”인지를 함께 보여 줘야 함을 내러티브 신학은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2) "서사적 진리" vs. "논리적 진리"의 충돌과 상호 보완

 

우리가 신앙의 핵심을 설명할 때, 이야기(서사)를 쓰는 방식과 교리(논리적 진리)를 제시하는 방식이 서로 충돌할까요, 아니면 보완적일까요? 한편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다층적인 해석을 허용하고, 상황과 인물에 감정 이입을 하게 만들며, 단 하나의 정답을 고집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탕자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를 두고도, 어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강조”하고, 또 다른 이는 “회개 없는 용서를 경계해야 한다”는 식으로 여러 가지 의견을 낼 수 있지요. 반면, 교리적 명제는 “이게 핵심 진리”라며 간결하고 단정한 형태를 취합니다. 그 때문에, 다채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서사의 풍부함이 “하나의 교리적 결론”으로 깎여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 둘이 서로 적대적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상호 보완의 측면이 더 크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한두 줄 교리는, 신앙 공동체에 일관된 고백과 방향을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그 교리가 왜 중요한지, 그 말이 어떤 울림과 감동을 주는지 알려면, 복음서 속 이야기가 필요하지요.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예수님,” “병든 이들을 고치고 우셨던 예수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 같은 서사를 접할 때, 우리는 그 교리에 담긴 신앙의 심층을 체감하게 됩니다. 이때 “이야기”는 논리적 진리를 감동과 체험의 차원에서 더욱 풍성히 해석해 주는 셈이 됩니다.

 

서사적 진리는 논리적 진리가 놓치기 쉬운 구체적인 맥락과 감동을 공급하고, 논리적 진리는 서사적 진리를 간결한 핵심으로 요약해 주어, 교회 공동체가 공통된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줍니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신앙이 지나치게 감성에 치우치거나, 혹은 메마른 지식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지요. 양쪽이 서로를 보완할 때, 신앙의 다양하고 깊은 차원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곧 내러티브 신학이 명제 중심 신학에 던지는 중요한 통찰이 아닐까 합니다.

 

(3) 사례 연구: 예수의 비유, 교회사 속 이야기 신학(어거스틴 '고백록' 등)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서의 비유들은 내러티브 신학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대표적으로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어 보지요.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명제로 간단히 말할 수도 있지만, 이 비유 속에서 아버지가 방탕한 아들을 다시 품에 안는 장면을 상상하면, 훨씬 더 풍부한 감정과 상황이 함께 떠오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달려나와 목을 끌어안는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한두 줄 문장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깊이와 따스함을 선명히 보여 주지요. 이처럼 짧지만 구체적인 이야기가, 추상적 교리를 넘어서는 강렬한 이미지와 체험을 선사합니다.

 

내러티브 신학자들이 이런 비유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인간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맥락과 감정, 갈등을 지닌 덕분입니다. 명제 중심 신학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신다”라는 진리를 강조할 수 있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스스로 죄책감을 심각하게 느껴 본 적이 없다면, 머리로만 수긍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반면 “탕자의 비유”는 독자가 “아, 나도 혹시 저 아들처럼 철없고 이기적이었는데, 돌아가기만 하면 저렇게 받아 주시는 걸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도록 유도합니다. 그 순간, 교리적 진술이 이야기의 형태로 체험적 울림을 얻는 것이지요.

 

이런 원리를 교회사 속에서 찾으려면,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좋은 예입니다. 전통 교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로 죄인을 구원하신다”라는 문장 하나로도 표현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기 청년 시절의 방황, 철학적 탐색, 그리고 회심 과정을 서사로 풀어 냅니다. 그의 삶에 숨어 있던 욕망과 좌절, 낙담과 결단,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게 된 순간이 진솔하게 묘사되죠. 이를 읽는 후대 신앙인들은, 단순히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는 명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한 인간의 구체적 갈등과 하나님의 섭리를 훨씬 생생히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듯 내러티브(서사)는 명제가 감당하지 못하는 스토리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라고 하면 쉽게 동의하더라도, 왜 그분을 사랑하고 의지하게 되는지까지는 다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록』에서 드러나는 어거스틴의 눈물과 탄식,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향해 열리는 문장은, 독자 스스로도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걸까?”라는 물음을 갖게 만들고, 그 물음이 다시 교리 명제로 다듬어져 마음속에 자리 잡게 하기도 하지요.

 

예수님의 비유나 어거스틴의 고백적 서사는 모두 “교리 문장으로 요약해 낼 수 있는 진리를 더 깊이, 더 넓게 전해 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 사례는 내러티브 신학이 왜 명제 중심 신학을 “아직 다하지 않은 과제”라고 부르는지 잘 보여 줍니다. 간결한 교리 문장도 유용하지만, 스토리가 인간의 마음에 건네는 충격과 감동을 완전히 대체하긴 어렵다는 것이지요. 서사는 명제의 내용을 ‘삶 속으로’ 가져오고, 독자가 직접 그 이야기에 몸담을 수 있게 만듭니다. 그렇게 “내 이야기”가 신앙 고백으로 이어질 때, 교리 명제가 단순 지식이 아닌 체험적 확신으로 바뀌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문장과 “탕자의 비유”가 각각 전달하는 장단점은 무엇일까요?

- 명제와 서사는 둘 중 하나가 더 우월한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할까요?

- 교회 현장에서 교리 교육을 할 때, 이야기나 간증을 함께 활용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 교리 자체가 이야기 형식을 통해 구성된다면, 현대 신앙인에게 어떤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을까요?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명제, 신학 그리고 신앙'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