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에 기초한 교리(명제)를 오랫동안 다듬어 왔다고 해서, 그게 신앙의 전부일까? 역사를 살피다 보면, 이 문제에 가장 근본적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 바로 신비주의(mysticism) 전통이었습니다. 이들은 논리적·추상적 설명도 중요하지만, 때론 초이성적(超理性的) 체험을 통해서만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차원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세 신비주의자나 초기 교부들의 글을 살펴보면, 교리적 정리에 만족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다”는 강렬한 표현이 흔히 등장하지요.
(1) 초기 교부의 신비적 사상, 중세 신비주의 (디오니시우스, 에커트, 테레사 등)
초대 교부들 중에서도, 예컨대 디오니시우스(위(僞) 디오니시우스, Ps.-Dionysius) 같은 신비주의 사상가는, 하나님이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존재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분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말할 때, 디오니시우스 입장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선’이라는 개념조차도 하나님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긍정적 진술(“하나님은 선하시다”)보다, “그분은 우리가 아는 선함보다 훨씬 더 크시다”라는 부정적 진술(apophatic approach)로 하나님께 다가가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언어가 하나님을 규정해 버리는 순간, 그 무한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오히려 제한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죠.
이후 중세에 들어서면, 마이스터 에커트(Meister Eckhart)나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Ávila), 요한 세례자(St. John of the Cross) 같은 인물들이 등장해, 한층 더 직접적인 영적 체험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합일 혹은 관상(觀想) 기도 중에, 논리나 언어적 설명을 훨씬 뛰어넘는 “신적 침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교회 전통의 교리들을 완전히 부정한 건 아닙니다. 다만, “교리(명제)가 제공하는 지식과, 실제 기도를 통해 마주하는 하나님은 차원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한껏 부각했지요. 교회가 너무 교리에만 매달려 있으면, 하나님과의 ‘직접적 만남’이 간과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 셈입니다.
신비주의 전통이 주는 통찰은, 하나님이 “언어적·논리적 정리”로만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분이라는 인식입니다. 교리 명제가 성경과 교회 역사를 토대로 정당하게 세워졌다고 해도, “정말 하나님이 그런 분이셔”라는 확신은, 때론 ‘무언가 말로 못 할 체험’으로 찾아올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아빌라의 테레사가 기도 중에 느꼈다고 말하는 환희나, 에커트가 말하는 “영혼의 소멸과 합일” 같은 것은, 수많은 문장을 동원해도 정확히 다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교리가 모범답안처럼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시다”고 선언해 주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신비주의자들은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 선언보다 훨씬 큰 분”이라는 사실을 거듭 일깨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정교한 교리 체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때론 예배나 영적 체험을 통해 느끼는 설명 불가능한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교리를 뛰어넘는 영역일 수도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태도—바로 이것이 신비주의가 강조한 핵심 가치라 하겠습니다.
(2)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경험을 명제로 정립할 수 있는가?
신비주의 전통이 특히 촉구하는 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때때로 우리의 말이나 논리를 아득히 넘어선다는 자각입니다. 이를테면 아빌라의 테레사 같은 인물은, 기도 중에 본 환상이나 영적 황홀경을 어떻게든 글로 남기려 했지만, 매번 “그래도 이건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라는 단서를 덧붙였습니다. 한마디로, “이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은 내 말과 개념을 훌쩍 넘어서는 무언가”라고 고백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삼위일체는 이런 구조다”와 같은 교리 문장을 지닌다 해도, 정작 그 분과의 깊은 영적 만남은 이성적·추상적 언어 안에 완전히 포획될 수 없다는 게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삼위일체”나 “성육신”을 몇 줄로 정리해 놓았다 해도, 직접 마주하는 하나님은 훨씬 더 드넓은 신비 속에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이지요. 교리는 어느 정도 가이드를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 체험의 폭과 깊이는 여전히 말로는 다 펼쳐낼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 점에서, 교회는 “명제를 꼼꼼히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의 본질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자만하기 쉬운 위험에서 견제를 받습니다. 신비주의가 말하듯, 하나님은 언제나 ‘언어의 한계 너머’에 계시며, 우리가 말로 아는 것을 넘어서는 만남을 허락하신다는 인식이 없으면, 신앙이 논리적 지식 수준에 머무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지요. 그래서 중세 신비가들은 종종 “하나님을 말하는 순간, 벌써 하나님이 아닐 수 있다”라는 급진적 언급까지 했습니다. 교회가 이를 무턱대고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언어화가 곧 신비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가르침으로는 충분히 새겨들을 부분이 있는 셈입니다.
명제가 우리가 일상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 정리한다는 의의는 무시 못 하지만, 하나님과의 실제 합일이나 영적 심연은 그 한계를 훌쩍 초월한다는 사실이 바로 신비주의가 지켜 온 메시지입니다. 교리에 자신만만한 교회일수록, 이러한 신비주의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때,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규정짓지 않도록” 겸손해질 수 있을 겁니다.
(3) '부정 신학'(apophatic theology)과 신비주의의 함의
신비주의 전통이 지니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때로 “부정 신학(apophatic theology)”으로 불리는 흐름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긍정 신학(cataphatic theology)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전능하시다, 선하시다” 같은 명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아는 ‘긍정적 진술’을 나열한다면, 부정 신학은 그마저도 “하나님을 정확히 말하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판단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나 “선함”이라는 단어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인간적·세속적 개념이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부합하지 못한다는 인식이지요. 디오니시우스같은 신비가는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크시다”라는 부정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하는 대신,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는 선함의 범주에 갇히지 않으신다”라고 말하는 식이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아는 관념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포장해 버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긍정적 진술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런 부정 신학(apophatic theology)이 교회에 주는 메시지는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삼위일체, 성육신, 구원론 같은 교리를 잘 다듬었어도, 그것이 곧 하나님 자체를 정확히 ‘정의’하는 건 아니라는 자각 말이지요. 물론 교리가 진리를 요약해 주고, 공동체가 공유할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안내를 받아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데에는, 논리와 언어를 넘어서는 깊은 영역이 있다고 부정 신학은 말합니다.
그 덕분에, 교회는 “우리 말(명제)이 하나님을 전부 드러낸다”는 자만에서 벗어나도록 견제받습니다. 교리가 완벽하니 더 이상 성령의 인도나 영적 침묵 같은 체험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자칫 신앙이 이론적 지식에 갇히는 교조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부정 신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크다”고 지적하면서, 영적 체험과 인격적 만남을 열어 둡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사랑, 전능, 선함보다 더 깊고 넓으신 분”이라는 진실을 유지하려는 것이 바로 신비주의가 교회에 던지는 소중한 상기(想起)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제는 우리에게 기본적인 경계와 방향을 설정해 주지만, 신앙은 그 경계를 가볍게 넘어서는 신비 속에서 흔들리고 부딪혀 볼 때, 오히려 더 풍성해진다는 것이 부정 신학(apophatic theology)의 통찰입니다. 교회가 기도와 예배 중에, “하나님을 다 말할 수 없다”는 경외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교리가 결코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아님을 계속 깨닫게 되겠지요.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초월적 신비 체험을 굳이 언어화하고 교리화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혹은 꼭 명제를 통하지 않고도, 교회 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어떤 방식이 있을까요?
-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다”고만 말하면, 자칫 무조건적 침묵이나 주관적 경험에 빠지지는 않을까요? 교회는 이를 어떻게 균형 잡을 수 있을까요?
- 부정 신학이 강조하는 “부정적 진술”은, 삼위일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같은 전통 교리를 어떻게 다시 조명하게 만들까요?
- 교회 현장에서 신앙인들이 개인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이단이나 극단적 광신으로 흐를 위험도 없을까요? 신비주의와 교리적 균형을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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