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수 세기 동안 다듬어 온 교리(명제)는, 내부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신앙을 확인하고 교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부 사회를 향해 “우리 믿음은 이러이러한 점에서 합리적이고 진리로서 의미가 있다”라고 말하는 변증학(Apologetics) 영역에서도 큰 역할을 합니다. 한마디로, 변증학은 “왜 기독교 믿음이 타당한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교회의 교리적 명제를 설명하고 옹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요.
(1) 고전 변증: 자연신학, 이성적 증명, 스콜라 전통
교회가 세상 밖으로 “우리 믿음이 왜 타당한가”를 설득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통이 바로 고전 변증학입니다. 이 영역은 중세 스콜라 신학과 깊이 맞닿아 있으며, 자연신학(natural theology)과 이성적 증명을 활용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같은 명제를 논리적으로 펼쳐 보이려 했던 전통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표적 스콜라 신학자는, 『신학대전』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명제를 여러 방식(‘오르는 다섯 길’)으로 논증하려 애썼습니다. 세상에서 관찰되는 ‘움직임에는 첫 번째 원인이 있어야 한다’거나,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식의 이성적 근거들을 모아, 하나님이 ‘최초의 원인’이자 ‘궁극적 존재’임을 끌어내려고 한 것이지요. 이런 논증들은 교회 내부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가르침과 달리, 교회 밖의 비신자나 철학적 회의주의자에게도 호소할 수 있는 합리적 도구였습니다.
다시 말해, “보편적 이성”이나 “자연 현상”을 기반으로 “신존재”를 증명하려 하다 보니,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성경이 그러니 믿으라” 식 논리가 아니라, 누구든 관찰 가능한 우주와 현실에서 출발하는 공통 언어를 쓴다는 점이 강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보긴 어렵지 않은가?” “어딘가 궁극의 원인(창조주)이 필요하지 않은가?” 같은 질문들은, 종교적 배경이 없는 이들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자연신학의 전통은, 중세 스콜라 신학에서 견고한 뼈대를 마련해 이후에도 계속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성적 증명을 펼치는 고전 변증학자들은, “이 명제(‘하나님은 존재하신다’)가 그냥 믿음의 선언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도 그럴듯하다”는 점을 강조해 왔지요. 실제로, 성경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상대에게 “성경에 적혀 있으니 믿으세요”라고 말하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반면, “우리가 관찰하는 물리법칙과 우주의 질서를 볼 때, 지적 설계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접근하는 건, 대화의 장을 열기에 훨씬 수월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무조건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는 조심스러워졌고, 자연신학에 대한 반론도 다각도로 제기됩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신학적 의의는 분명합니다. 교회가 외부 세계와 논리적으로 대화하려고 애썼다는 점, 그리고 교리(명제) 하나가 교회 내부 ‘비밀 언어’가 아니라 보편 이성의 언어로도 어느 정도 대화될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했다는 점이지요.
고전 변증학은 “교리 명제를 어떻게 이성적·철학적 방식으로 뒷받침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련된 논리 구조가 이후 현대 변증에도 이어져, 창조-진화 논쟁이든, 신존재 논증이든, 과학이든, 어디서든 교회가 “이건 단지 우리의 독단이 아니라, 누구나 생각해 볼 만한 합리성이 있다”라고 어필하는 틀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2) 현대 변증: 누적적 사례 논증, 선취적 변증, 문화적 변증
시대가 바뀌면서, 창조-진화 논쟁이나 역사적 예수 연구 같은 주제가 부상했고, 고전적인 자연신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 변증학에서는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지는데, 대표적으로 누적적 사례 논증, 선취적 변증, 그리고 문화적 변증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우선, 누적적 사례 논증은 기독교 신앙을 지지하는 역사, 고고학, 철학, 체험, 윤리 등의 여러 증거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전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합니다. 단 하나의 논거가 확실히 승부를 결정짓진 못하지만, 복합적 데이터를 통해 기독교 신앙 명제를 뒷받침하자는 방향이지요. 예컨대 예수의 부활을 완벽히 “증명”하기는 어렵더라도, 제자들의 태도 변화나 공관복음의 전승 등을 다각적으로 살펴보면, “부활이 실제였다고 봐야 여러 현상을 설명하기 쉽다”는 식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반면, 선취적 변증(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은 사람마다 이미 갖고 있는 전제(presupposition)를 건드려, “네가 갖고 있는 세계관 안에서도 사실 기독교적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이 어렵다”라고 말하는 접근을 택합니다. 이를테면 상대가 “도덕”이나 “논리”의 절대성을 믿는다면, 그 토대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는 거죠. “신이라는 궁극적 근거가 없으면, 절대적 도덕이나 논리가 가능하겠는가?”라고 되묻는 식으로, 애초에 기독교적 전제를 수용해야만 모든 현상이 설명된다는 논리를 펼칩니다.
이와 달리, 문화적 변증은 C.S. 루이스나 티모시 켈러처럼 이야기나 문학, 예술, 문화를 통해 기독교 명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삼위일체”나 “구속” 같은 교리를 딱딱한 논리로 증명하기보다는, 문학적 상상력이나 현실 고민 속에서 기독교가 지닌 설득력을 살펴보게 하는 것이지요.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슬란을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로 연결 짓는 루이스의 작업이나, 현대 도시인들의 내면적 갈증을 《탕부 하나님》 같은 책에서 풀어내는 켈러의 시도가 그 예입니다.
이렇듯 현대 변증학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교리 명제를 변호”하기보다, 듣는 이의 배경과 관심,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접근을 구사합니다. 공통점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교리를 “합리적으로, 체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번역해 내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 명제가 왜 의미 있고 진리로서 유효한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대화하고 복음을 증언하려 할 때, 이러한 현대 변증의 시도들은 교리(명제) 하나를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석·전달할지에 대해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는 셈입니다.
(3) 실제 목회 현장에서 변증 명제 활용법 (예: 기독교 세계관 교육)
우리 교회 안팎에서 흔히 듣는 말 중 하나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곧,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구체적 관점들이 기독교 교리(명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가리키지요. 예컨대,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같은 간결한 선언들이 바로 그 세계관의 핵심 문장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 내부만을 고려한다면, 당연하게 들리는 이 명제들이, 막상 사회·문화 속에서 흔들리는 청년들에게도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청년부나 교회학교에서 흔히 벌어지는 교육 시나리오를 떠올려 봅시다. 교역자나 교사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되었다”라는 문장을 소개하면, 아이들은 “그게 무슨 뜻이죠?”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우리가 전능하거나 완벽하다는 말인가요?”라든지, “그렇다면 장애인이나 노약자처럼 취약한 신체를 가진 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죠?”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때 교사는 이 명제를 토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인간에게 주어진 존엄성과 관계성을 가리키며, 모든 인간이 성별·인종·건강 상태와 무관하게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걸 강조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런 인식이 윤리·인권 문제와 직결되면서, 실제 사회생활에서 “왜 약자나 소수자를 배려해야 하는가?” “직장이나 학교에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왜 안 되는가?” 하는 구체적 윤리 실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라는 문장은 왜 의미가 있을까요? 굳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흔들리는 청년들에게도 “우리가 우연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줄 수 있고,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의식, 혹은 “창조가 선하니, 과학과 예술도 긍정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는 식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즉, 단순히 “신앙 고백 한 줄”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니, 내가 맡은 일과 학업을 어떻게 의미 있게 해석할까?”로 고민을 확장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변증학에서 마련한 명제적 근거—이를테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그분은 창조주요, 인간을 존중하신다” 같은 공식—가 목회 현장에서 실제적 힘을 발휘합니다. 청년들이 세상 속에서, “내 존재가 왜 이렇게 허무하지?” 하고 자문할 때, 교회는 “하나님이 너를 목적과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명제를 선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제가 “왜 합리적인지” “어떤 과학적·철학적 도전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이전에 변증학이 논의해 둔 자료들을 적절히 활용하면, 단순한 감성 호소가 아니라 이성적·학문적 뒷받침이 있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명제를 교육 현장에 투입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건 “명제의 주입”이 곧 “신앙의 성숙”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말해 주는 것만으론, 고통스러운 일을 겪는 청년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명제가 실제 삶의 문제(질병, 재난, 불의 등)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함께 토론하고, 구체적 사례를 나누며,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고백이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원천임을 체감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명제가 단순 지식이 아닌 삶의 힘으로 자리 잡게 되겠지요.
교회학교나 청년부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칠 때, 변증학이 제시한 명제들이 교육적 뼈대로서 유용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뼈대에 현실적·경험적 살을 붙이고, 대화와 체험을 통해 진정성 있는 공감을 이끌어 내야만, 그 명제가 진정한 신앙 고백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회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자연신학적인 이성 증명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회의주의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요?
- 누적적 사례 논증이나 선취적 변증 같은 현대 방식은 “명제로 결론 내리기” 외에 어떤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를 알릴 수 있을까요?
- 문화적 변증이 단순 논리 논증보다 호소력이 강하다는 말도 있는데,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요?
- 목회 현장에서 교리 명제를 변증학적으로 활용할 때, 지식 교육을 넘어 신앙 체험과 실제 생활로 연결해 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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