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

교의학(dogmatics)의 명제적 기초

by modeoflife 2025. 4. 3.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다” 등 교리 문장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배경에는, 사실 교회가 수 세기 동안 쌓아 온 “교의학(dogmatics)”이라는 체계적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교의학은 말 그대로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교리)을 논리적·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전체 신앙 체계를 보여 주는 학문인데, 교회가 선언한 명제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그 명제가 어떻게 성경과 전통, 철학적 논거 등에 의해 뒷받침되는지 꼼꼼히 살피는 과정을 포함하지요.

 

가령, 우리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고 말할 때, 이는 그저 초대 교회 공의회나 누군가의 한 마디 의견이 아니라, 성경 해석과 사도적 전승, 교부들의 신학적 논증,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체계화를 거쳐 나온 결과입니다. 교의학자들은 이 짧은 문장(명제) 하나를 놓고도, “어떤 성경 본문이 이를 뒷받침하나?”, “그 본문과 구원론(어떻게 예수님이 구원하시는가)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연결이 있는가?”, “이 명제가 삼위일체론과 충돌하거나 어색하지는 않은가?” 같은 질문을 면밀히 검토해 왔던 것이지요.

 

(1) 교의학 형성 과정에서 신앙고백적 명제의 통일·체계화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대 교회가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핵심 교리”를 확립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교회 전체 신앙 체계가 완성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성령님의 신적 위격, 교회론, 종말론 같은 각각의 주제들이 제각각 다뤄지면서, 한편으론 공의회나 교부들이 무수한 논쟁을 거쳐 결론을 내고, 또 다른 한편으론 이 결론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맞물리는지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했지요.

 

 

교의학(dogmatics)은 이처럼 다양하게 확립된 교리들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그 하나님이 창조와 구원과 교회를 세우심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 서로 연결 지어야 합니다. 구원론을 말할 때도 “예수님이 참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기에 구원에 충분한 능력을 지니신다”라는 식으로, 성육신 교리가 구원론과 자연스럽게 연관됨을 확인해야 하죠. 만약 교회가 “구원은 전적으로 성자 예수님의 공로”라고 하면서도, 삼위일체론에서 성령님의 역할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어딘가 어색하겠지요.

 

교의학을 하려는 신학자들은, 초대 교회가 정립한 신앙고백(사도신경, 니케아신경 등)에 담긴 명제들을 밑바탕으로 삼아, 성경 해석과 교회 전통, 철학적 사유를 총동원해 체계를 잡아 갑니다. 마치 건물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연결해 나가듯, 삼위일체—구원론—교회론—성령론—종말론 등 각 교리가 서로 정합성(coherence)을 가지고 배치되도록 조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삼위일체” 명제가 구원론과 완벽히 맞아떨어지고, 종말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충돌 없이 펼쳐지는 구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매우 간결하게 고백하면서도, 그 간결한 고백 뒤에 어마어마한 신학적 해설을 덧붙여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참 인간”이라는 한 문장이 그 자체로 간단해 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복음서, 서신서), 교부들의 논쟁(칼케돈 공의회 등), 중세 스콜라 신학(토마스 아퀴나스), 종교개혁자들의 해설(루터, 칼뱅) 등 수많은 역사적·철학적 요소가 정리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교의학은 바로 그동안 쌓인 자원을 한데 모아 “이 명제는 이렇게 정당하며, 이런 식으로 다른 교리와도 맞물린다”고 체계적으로 보여 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교의학에 따르면 교리 명제는 그저 ‘암기용 공식’이 아니라 복합적인 전통의 결정체이고, “이 명제를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어떤 다른 명제를 수용해야 하고, 또 어떤 부분은 배제될 수밖에 없는가?”를 논리적으로 풀어 내는 안내서가 됩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신앙의 통일성을 지키고, 혼란을 줄이며, 더 나아가 외부 비판이나 이단 공격에도 일관된 논리를 펼칠 수 있는 토대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2) '정합성(coherence)'과 '상관관계(correlation)' 모델로 본 교의학 구조

 

현대 신학자들은 교의학을 구성할 때, 더는 교회 안에서만 통용될 논리를 만드는 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교리(명제)가 서로 논리적으로 일관되도록 구성하는 것은 물론, 시대적·문화적 맥락과도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고 보지요. 그래서 등장한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이 바로 ‘정합성(coherence)’과 ‘상관관계(correlation)’입니다.

 

정합성이란, 교리 문장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하나의 유기적 체계 안에서 탄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인간이자 하나님”이라는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면, 교회 신학은 한순간에 붕괴할 위험이 있겠지요. 교회가 수백 년 동안 삼위일체·성육신·구원론 등을 함께 고백해 온 것은, 이 교리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는 판단에 근거합니다. 마치 커다란 퍼즐을 맞추듯, 구원론이 삼위일체론과 맞닿고, 그 삼위일체론은 성령론이나 교회론과도 빈틈없이 이어져야, 교회 신앙이 ‘전체로서’ 일관되고 아름답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내부적으로 아무리 치밀하게 논리를 짜 놓아도, 교회가 시대와 단절되어 버리면, 현대인들에게 교리 명제가 생소하고 무의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상관관계(correlation)’라는 모델이 중요해집니다. 상관관계 접근법을 대표적으로 제안한 인물이 폴 틸리히(Paul Tillich)인데, 그는 “인간이 시대마다 느끼는 질문과 문제의식”에 교회가 교리로 답변하려면, 그 교리가 현실적·실존적 질문과 교차해 들어가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컨대, 현대 과학시대에 “삼위일체”는 도대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줄까? 탈근대 사회 속에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해석 가능할까? 이런 물음을 상관관계 방식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교의학은 ‘정합성’이라는 내부적 논리 체계만 갖추고도 끝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철학·과학·문화가 무엇을 묻고 있고, 개인들이 어떤 실존적 고민을 품고 있는지 헤아려, 교리 명제를 현대인의 언어로 풀어서 연결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놓치면 교회 내부에서 그럴싸해 보이는 교리라도, 외부 세계에는 아무 소리도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쉽게 말해, 교회가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 고백이 “하나님이 관계성의 하나님이며, 인간 커뮤니티와 깊은 연결을 갖는다”라는 삶의 언어로도 풀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합성이 내부적 논리를 유지해 주는 뼈대라면, 상관관계는 그 뼈대가 시대·문화를 향해 소통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는 창구입니다.

 

이 두 모델을 함께 잡으면, 교의학이 단순히 교회 안 ‘자족적’인 문법이 아니라, 현실 세계와 소통하고 호흡하는 “살아 있는 신학”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그렇게 교리(명제)들은 한편으론 내부의 논리를 공고히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시대의 질문과 고민에 응답하는 길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

 

(3) 목회적·교육적 차원에서 교의학 명제의 의의

 

교의학(dogmatics)을 공부하다 보면, 단순히 추상적이고 교리책에나 쓰일 법한 이야기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의학은 교회 현장에서 매우 긴요하게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주일 설교나 교회학교, 청년부 모임 등에서, 교회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를 간결하고 일관성 있게 가르치려면, 그 믿음이 이미 정리된 명제 형태로 확립되어 있어야 효과적이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목회자가 설교 중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십니다”라는 한 문장을 제시한다고 합시다. 이 짧은 명제 하나가 몇 초 만에 언급되는 순간에도, 사실 그 뒤에는 교의학이 수 세기 동안 정리해 온 방대한 신학적 해설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셔야 했는지, 그럴 때 구원론과 삼위일체론, 교회론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생기는지 등 말이지요. 교의학은 이런 질문에 이미 풍부한 답변을 쌓아 두었으므로, 목회자는 이 명제를 해설할 때 단순히 “우리가 이렇게 믿는다”는 말 이상을 제시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그렇구나, 예수님의 성육신이 왜 중요한지 알겠네”라는 깨달음에 이르기 쉬워지지요.

 

특히 교회학교나 청년부처럼 신앙을 전수해야 하는 교육의 장에서, 명제화된 교리는 더더욱 유용합니다. 어린이·청년들에게 엄청난 양의 성경 본문과 복잡한 역사·철학을 한꺼번에 가르치긴 어렵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같은 간결한 문장은 빠르게 이해하고 기억하기에 제격이지요. 물론, 그 뒤에는 성경 본문 공부나 역사·논리의 보강이 따라와야 하겠지만, 일단 이 한두 줄의 명제가 출발점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문장만으로도, 인간 존엄성과 윤리, 구원론 등 수많은 주제를 이어 갈 수 있게 되니까요.

 

목회와 신앙교육 차원에서 교의학적 명제가 지닌 의의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공동체적 일치와 의사소통: “우리는 이런 믿음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교인들이 혼란 없이 신앙을 습득하고 동일한 고백으로 연대감을 느낍니다.

- 교육적 효율성: 너무 복잡하고 방대한 신학 내용을 일단 간단한 문장으로 요약함으로써, 어린이나 청년 등에게 신앙의 ‘핵심 코드’를 빠르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후 성경 공부와 심화 과정을 통해 그 문장의 깊이를 확장하면 되지요.

 

물론, 명제화에만 의존하면 신앙이 ‘지식화’되는 위험이 있다는 점도 교의학이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라고 잘 외운다고 해도, 그 말이 실제 예배와 삶에 연결되지 않으면 공허해지기 쉬우니까요. 그래서 교의학은 “교리 문장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과 동시에, “그 문장이 성도들의 내면과 일상 속에 어떻게 살아 숨 쉬는가”를 묻는 작업을 함께 이어 가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교의학 명제가 실제적인 목회적·교육적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교의학이 교리 문장을 체계화하는 과정은, 신앙생활에 어떤 구체적 이점을 줄까요?

- ‘정합성’과 ‘상관관계’라는 틀이 교의학에 활용될 때, 교회가 얻는 유익과 동시에 고민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 교리 명제가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실제 교인들의 삶과 동떨어진 언어로 남지는 않을까요?

- 목회 현장과 신앙 교육에서, 교의학적으로 정리된 명제를 사용할 때, 어떤 방식으로 본문과 연계하거나 공동체의 체험과 결합할 수 있을까요?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명제, 신학 그리고 신앙'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