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 교리(명제)로 정리된 신앙을 어떻게 유지·전달할 것인가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대 과학, 탈근대 철학, 문화,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라는 다양한 영역이 교회와 접촉하며,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지요. 이 장에서는 교회가 어떠한 명제(“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예수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등)를 세상에 선포할 때, 과연 세상은 어떻게 반응하고, 교회는 그에 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살펴봅니다.
(1) 자연 과학과 신학 명제 간의 충돌·조화 가능성 (창조-진화 논쟁 등)
교회가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다”라는 교리 명제를 지켜 온 역사는, 근현대 과학의 폭발적 발전과 더불어 끊임없이 도전에 직면해 왔습니다. 창조-진화 논쟁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한편에서는 우주와 생명체의 기원과 발달 과정을 설명하는 진화론과 빅뱅 이론 등이 성경의 창조 기사와 충돌한다고 보며, 창조론을 절대화하는 전통주의 교단이 존재합니다. 반면, 과학의 발견을 수용하면서도, 그 과정을 “하나님이 설계하신 메커니즘”으로 해석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교리 명제와 과학은 화해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부각되지요.
교회가 만나는 자연 과학과 신학 명제 간의 충돌·조화 가능성은 대략 다음과 같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먼저, 한쪽에서는 “충돌 논리”를 펼칩니다. 교리 명제와 과학이 서로 양보 없이 “내가 옳다”며 맞설 경우, 교회는 과학을 배척하고, 과학자는 신앙을 미신으로 여기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일부 전통주의 교회가 “성경은 지구 연대가 짧다고 말한다”고 주장하면, 지질학과 생물학이 보여 주는 수십억 년의 역사는 교회와 정면충돌하게 됩니다. 이럴 때, 교회는 과학을 불신하고 과학계는 신앙을 불합리적이라고 공격하여 갈등이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조화 논리”를 옹호하는 쪽은, “과학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 신학은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묻는 영역”이라 하여 상호보완을 시도하거나, 진화 과정을 “신적 창조의 도구”로 해석해 “유신론적 진화(Theistic Evolution)”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즉, 과학적 진화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자연 법칙과 메커니즘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해석으로 “진화적 창조(Evolutionary Creation)”가 있는데, 이는 유신론적 진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창조 자체가 본질적으로 점진적·진화적 과정을 수반한다”는 점을 더욱 강하게 부각하는 시각입니다. 말하자면, 자연 법칙 뒤에서 하나님이 섬세하게 창조 활동을 지속하신다는 통합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라는 교리 명제가 “진화론이나 천문학적 우주론과 완전히 배치되는가, 아니면 넓은 틀에서 공존 가능할까?” 하는 문제는 교회 안팎에서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일부는 “진화는 성경을 부정한다”고 보고, 또 다른 일부는 “과학은 물리·생물학적 과정, 신앙은 궁극적 근원과 목적에 대한 진술이므로 서로 영역이 다르다”고 주장하며 양립을 모색합니다. 그러면서도 진화론이 전적으로 우연만을 강조하지 않는 방식—즉,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자연 법칙을 운용하신다는 해석—을 내세워 교리 명제와 과학을 화해시키려는 이들도 있지요.
이 논쟁은 신앙과 과학 양쪽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창조 교리를 얼마나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기고, 과학계에서도 “종교가 과학을 배척하거나 왜곡하지 않는가?” “어떤 지점에서 교리의 언어가 학문 세계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교리 명제가 현대 과학과 만났을 때 어떻게 설명되고 수용되는가?”라는 과제는 오늘날에도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선포할 때, 그것이 물리·생물학적 이론과 얼마만큼 대화 가능할지를 탐색하는 일은, 현대 신앙공동체가 세상과 소통하는 결정적 시험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탈근대 철학과 '보편적 진리 주장'으로서 명제 신학의 위치
오늘날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적 언어는, 한편에서 탈근대(Postmodern) 철학에 의해 강력한 도전을 받습니다. 이 철학 흐름은 “진리는 상대적이고, 각 문화·시대·집단마다 유효한 ‘이야기’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받아들여야 할 보편적 진리는 없다”고 말하곤 하지요. 그러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다”라고 선포하는 명제를, 어떤 이는 그냥 “그들의 관점일 뿐”이라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탈근대 사조를 무조건 배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탈근대 철학이 가져다 준 “타자 존중”, “문화적 다양성”, “절대 권력의 해체” 같은 가치들은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전통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주민·소수자·다른 종교인 등을, 탈근대의 관점은 좀 더 깊이 이해하고 포용하라고 촉구해 줄 수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교리 명제가 과연 “단순히 상대적 진술”로 그쳐도 괜찮은가, 아니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보편 진리”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교회는 역사적으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로 고백해 왔습니다. 그런데 탈근대는 “그건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나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지, 보편성을 갖는다고 보긴 어렵다”고 답할 가능성이 크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가 정통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면, “복음의 절대성을 희석시키면 안 된다”며 강하게 맞설 겁니다. “탈근대 철학이 모든 것을 상대화함으로써, 교회의 복음 고백을 무력화한다”는 비판을 펼칠 테니까요. 반면, 또 다른 시도들은 “탈근대가 말하는 상대주의, 다원적 시각이 전부 잘못된 건 아니다. 교회도 자기가 놓인 시대와 문화적 콘텍스트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며, 교리 명제의 보편성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 애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특정 문화·역사를 뛰어넘는 호소력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교회가 시대정신과 철학 사조의 질문에 대답하려면, 그 질문을 외면하거나 일방적으로 거부해서는 곤란합니다. 탈근대 철학이 “절대적 진리”를 의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꼼꼼히 살피고, “교리 명제의 보편성”이 과연 어떻게 확보되고 증명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미 교리 명제가 고정된 ‘최종판’이라 여겼던 태도도, 이런 대화 과정을 통해 다소 유연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라는 고백을 절대 양보하지 않더라도, 그 ‘유일성’이 어떤 식으로 다른 문화권과 대화를 열고, 그들의 종교적 경험과 만날 수 있는지 함께 탐색할 길이 열릴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 탈근대 철학과 교회 명제 신학의 만남은 교회로 하여금 “우리가 보편 진리를 말한다고 할 때, 그 보편성이 어디서 어떻게 확보되는지” 자문하게 만듭니다. 무조건 상대주의를 “악”이라고 몰아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리 명제가 ‘그저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고 해 버리면 기독교 고백을 지키기 어려운 딜레마 속에서, 교회는 계속 씨름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바로 그 씨름 과정이, 오늘날 교회가 자기 신앙 고백을 시대와 나누는 데 있어 꼭 필요한 대화이기도 합니다.
(3)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변증: 진리독점 명제와 관용 사이의 균형
현대 사회는 다양한 종교·문화가 공존하는 종교다원주의적 분위기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교회가 붙들어 온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은 없다”는 명제는 때론 너무 배타적이고, 다른 종교 신자들을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로 비치기 쉽습니다. 불교나 이슬람, 힌두교 등 여러 종교가 서로 인정과 관용을 권장하는 시대정신 안에서, 교회가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이다”라는 한 줄 명제를 고집한다면, 외부에서는 “저들은 독선적이거나 편협하다”고 비판할 위험도 커지지요.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교회 내부의 반응은 크게 나뉩니다.
- 진리독점 입장: “예수 외 구원은 없다”는 전통적 선언을 훼손하면 복음 자체가 무너진다고 보고, 이 명제를 어떤 식으로도 완화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포기하는 건 교회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 포괄주의·다원주의 입장: 다른 종교 안에도 일정 부분 “구원의 씨앗(seminal Logos)”이 있다고 인정하고, 기독교의 그 명제가 어떤 식으로 다른 종교들을 포함하거나, 최소한 무시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는지 고민합니다. 일각에서는 “예수님은 구원의 근원적인 길이지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은혜에 참여하고 있을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종교다원주의적 환경에서 “진리독점 명제”와 “관용·평화 공존” 사이를 어떻게 균형 있게 해낼 수 있을까요? 배타성을 너무 강조하면 현대인들에게 고립될 수 있고, 반대로 교리 명제를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면 기독교의 독특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이자 진리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데, 이걸 무턱대고 완화했다간 복음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 때문이지요.
한 가지 접근은, 관용과 공존을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독단적 배타주의’로서가 아니라, ‘자발적 초대이자 사랑의 기초’로 해설하는 방식일 겁니다.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서, 기독교는 자신들의 구원론이 “이 땅의 고통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결정적 길”이라고 고백하되, 동시에 그것이 다른 종교인들을 무조건 무시한다거나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의도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것이지요. 또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잘못된 배타성—예컨대 식민지 시대에 권력과 결합해 다른 종교를 탄압한 사례—을 성찰하면서,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적 맥락 안에서 “진리독점 명제”가 어떻게 성육신적 섬김과 사랑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실천도 필요하겠습니다.
교리 명제를 흐릿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타 종교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은 쉽지 않으나, 교회가 복음의 핵심인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고, 다른 종교 전통이 가진 가치도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 대화할 때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진리와 관용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신학적·목회적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창조론 vs. 진화론 대립 구도에서, 교회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라는 명제를 절대 불변 진실로 지키는 것과, 과학적 사실을 수용하는 것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요?
- 탈근대 철학은 절대 진리를 의심하는데, 교회는 “보편적 진리”를 선언하는 명제 중심 신앙을 어떻게 정당화하거나 재해석할 수 있을까요?
- 종교다원주의 맥락에서, “예수 외에 구원은 없다”는 명제가 다른 종교 신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전달되어야 할까요? 교회는 배타주의를 넘어 어떻게 대화와 공존을 추구할까요?
- 과학, 철학, 문화, 종교다원주의와의 대화 속에서 교리 명제가 지나치게 상대화되거나, 반대로 배타적 독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어떤 신학적·목회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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