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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문화적/보편적 타당성과 맥락화의 균형

by modeoflife 2025. 4. 3.

 

신앙고백과 교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대체로 “이 진리는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 유효하다”는 보편성(universality)을 전제해 왔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구주”라는 고백은, 단지 특정 민족이나 특정 언어권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라 여겨지지요. 그러나 선교 현장이나 포스트콜로니얼 신학 등의 영역을 살펴보면, “보편성 주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목소리도 적잖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교리 명제를 그대로 적용하거나 선포했을 때, 예상치 못한 갈등이나 오해가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1) 명제의 '보편성' 주장을 둘러싼 선교학적 논쟁

 

한편에서는 “복음과 교리는 본질적으로 초문화적이므로, 지구 어디서든 똑같이 가르치면 된다”는 보편성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핵심 문장을 어느 선교지에서나 동일한 언어로 직수출하듯 전해도 상관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야만 전 인류가 “같은 구원 진리를 공유”한다는 게 이들의 논리입니다. 중세와 근대의 서구 선교운동이, 비서구 지역에서도 똑같은 형식의 전도와 교회 제도를 이식하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아무리 보편 진리라고 주장해도, 그 ‘보편’이 실제로는 특정 문화나 역사에 뿌리를 둔 해석일 수 있다”고 지적하며, 맥락화(Contextualization)를 강조합니다. 한 문화 안에서 ‘구원’을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는지, 그들이 겪는 슬픔·희망·전통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고, 무작정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외치면, 오히려 낯설고 강압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구원”이라는 말 자체도 서구 기독교에서는 죄사함과 영생을 떠올리지만, 어떤 토착 문화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거든요. 이런 맥락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선교하려는 교리가 강제나 문화적 충돌로 비칠 위험이 커집니다.

 

선교학에서 이 두 입장이 맞부딪히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한쪽은 “복음은 어디서나 동일”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복음도 문화를 통과하면서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라고 보는 것이지요. 다만, 이 둘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기보다는, “어떻게 ‘보편성’을 유지하되, 각 문화의 독특한 언어와 세계관 속에 복음을 이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함께 자리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부족 문화에서는 ‘왕(King)’ 개념이 아예 없을 수 있는데, 우리가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교리 명제를 문자 그대로 가르친다면, 현지인들에게 매우 낯선 소리일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예수의 통치”라는 신앙 고백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이때는 그 문화 안에서 “왕”에 해당하는 개념(부족 장로, 또는 ‘공동체를 보호하는 어른’ 같은)으로 풀어내거나, 그들의 전통 속 스토리와 연결 지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다스리시는가”를 새로이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는 곧 맥락화의 전형적 예시입니다.

 

이런 논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선교사가 어느 마을에 가서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를 처음으로 외칠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신(神)이나 전통 의례, 가족 유대와 같은 토착 요소가 무시되지 않도록 얼마나 세심하게 접근해야 할까요? “보편적 복음”과 “특정 문화 속에서 재해석된 복음” 사이의 간극을 줄여 나가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계속 씨름해야 할 과제입니다.

 

결론적으로, 교리(명제)의 보편성을 “절대적 진리”라고 강조하면서도, 각 문화와 역사에 대한 맥락화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교회가 맥락화를 외면한다면, 복음은 현지 문화에서 소외될 위험이 있고, 반대로 맥락화를 지나치게 밀어붙이면 복음의 핵심(예: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희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이 선교학적 논쟁의 핵심이라는 점이, 오늘날 모든 선교와 목회 현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2) 포스트콜로니얼 신학에서의 명제 해체와 재해석

 

역사를 조금만 돌이켜 보면, 서구가 전 세계를 식민 지배하던 시기에, 교회가 내세운 “보편적 진리”라는 교리가 때로 현지 문화를 무시하고 권력에 동원된 사례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시다”라는 명제는 본래 복음의 핵심으로서 선포된 것이지만, 식민 지배자들이 이를 정당화 논리로 사용하여 “서구 기독교 문명이 우수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는 거지요. 현실적으로, 전도를 빙자한 동화 정책이나 문화 억압 정책이 병행되면서, “보편 진리”가 오히려 폭력적 수단으로 변질된 역사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포스트콜로니얼 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럼 우리가 붙드는 교리 명제가 정말 초문화적·절대적 ‘진리’였나, 아니면 서구가 가진 문화·권력을 반영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였나?” 하고 물어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예수는 유일한 구원자” 같은 교리를 통째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명제들이 특정 역사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어떤 식으로 현지 문화를 억누르거나 동화시키는 도구가 되었는지, 비판적 성찰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이 흐름에서, 교리 명제를 무작정 해체(dismantle)하거나, 재해석(re-interpret)하려는 시도도 생깁니다. 교리가 “서구적 사고방식”에 치우쳐 정의된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와 문명 속에서 해방과 연대, 사랑이라는 복음의 본래 의미를 보다 충실히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 가자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예수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명제를 다른 문화의 구원 개념과 대화시켜, “유일성”이 배타적 제국주의가 아니라 “보편적 환대”의 형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식입니다.

 

포스트콜로니얼 신학자들은 교회가 늘 주장해 온 “보편성”이 과연 누구의 시선에서 나온 것인지 묻고, 그 보편성 주장이 권력과 어울려 어떤 역기능을 일으켰는지 살펴보자고 제안합니다. 이런 과정은 교리 명제를 마구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명제가 담고 있는 복음의 해방성과 사랑을 재발견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서구 중심의 언어와 방식”으로만 제시되던 교리가, 현지인의 삶과 문화가 지닌 의미를 억압하지 않는 방향으로 맥락화될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이런 포스트콜로니얼 접근은 오늘날 선교와 신학 토론에서 중요한 과제를 던집니다. 교회가 “예수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명제를 절대 양보 없이 내세우되, 과거처럼 타문화를 무시하거나 폭력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함께 대화하고 협력하는 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 교회가 식민주의 잔재를 반성하고, 그 명제가 각 지역과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과 소망에 어떻게 해방적 의미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면, 교리가 지닌 본래 복음적 정수가 더 충실히 발휘될 여지가 생길 테니까요.

 

(3) 맥락적·문화적 해석과 교리 보편성의 조화 방안

 

그렇다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전통적 교리(명제)를 지키면서, 동시에 각 지역 문화와 역사적 배경을 존중하는 맥락화(contextualization)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유용한 개념이 바로 ‘창조적 긴장’입니다. 즉, 교회가 “보편적 진리”라는 외침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도, 현지의 언어나 문화, 필요, 상처를 고려해 그 메시지를 다채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거지요. 예컨대, 어떤 부족 문화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이란, 너희가 그토록 바라는 평화와 연대의 완성”으로 설명해 줄 수 있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특히 부각시켜서 복음이 해당 지역의 필요를 진정으로 어루만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식입니다. 말하자면, 동일한 교리 명제가 맥락마다 ‘각인(刻印)’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거지요.

 

문제는, 그렇게 맥락화를 실천하면서도 “예수님은 우주적 구원자”라는 핵심이 흐릿해질 우려를 어떻게 막을 것이냐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화적 해석을 지나치게 밀고 나가다 보면, 예수님이 보편적·초월적 존재라기보다는 어느 특정 민족이나 문화만의 특수한 영웅으로 축소될 위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교회가 전통적 고백(사도신경, 니케아신경 등)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본질’을 어디까지 유지하고, 어떤 부분을 ‘문화적 표현’으로 열어둘 것인지 신중히 분별하자는 의견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문화적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시도가 필요하되, 그 과정에서 교리(명제)가 담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훼손하지 않기’라는 원칙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보편적 진리를 단순히 이식하는 것을 넘어서, 각 문화의 ‘맥락’ 속에서 복음을 재해석하고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현대 교회의 도전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갈등과 오해가 생길지라도, 교회가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향해 복음의 문을 여신다”는 원대한 고백을 유지한다면, 그 보편성과 맥락화 사이의 창조적 긴장은 교회를 더 유연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줄 가능성이 큽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예수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명제가, 전혀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왜 배타적으로 들릴 수 있을까요?

- 보편적 진리와 맥락화의 긴장 속에서, 교회가 ‘명제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형식’을 유연하게 바꾸는 사례가 있을까요?

- 포스트콜로니얼 신학의 제안—교리 명제가 사실상 서구권의 권력과 결탁했던 요소를 반성하고, 재해석하자는 주장—을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상황을 존중하면서도, 교회가 전통 고백(니케아신경, 사도신경 등)을 지키려면 어떤 신학적·목회적 지혜가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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