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10월,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한 사무실에서 앨런 튜링(Alan Turing)은 펜을 들고 질문을 적었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철학자들의 오랜 논쟁을 컴퓨터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온 도발이었다. 그해 발간된 학술지 Mind에 실린 논문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튜링은 "생각"의 정의를 둘러싼 추상적 논쟁을 피해,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바로 "튜링 테스트"다. 그는 기계가 인간처럼 대화할 수 있다면, 그 기계가 지능을 가졌다고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며 컴퓨터 과학의 기틀을 닦은 튜링은, 전쟁이 끝난 후 기계의 잠재력을 인간 지능의 경계까지 밀어붙이고자 했다. 튜링 테스트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AI 혁명의 사고를 뒤흔든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1950년대의 컴퓨터 환경은 척박했다. 튜링이 근무하던 맨체스터 마크 I은 세계 최초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 중 하나였지만, 진공관과 천공 테이프로 작동하며 초당 수천 번의 연산이 한계였다. 기계가 언어를 이해하거나 대화한다는 발상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튜링은 하드웨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는 논문에서 "기계가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기계가 인간을 속일 수 있느냐"로 바꿨다. 튜링 테스트의 설계는 간단했다. 한 명의 심사자가 기계와 인간과 각각 텍스트로 대화하고,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기계는 "지능적"으로 간주된다. 그는 이 테스트를 "모방 게임(Imitation Game)"이라 불렀고, 철학적 정의 대신 실증적 기준을 세웠다.
튜링의 도발은 단순한 테스트 이상이었다. 그는 논문에서 구체적인 가능성을 탐구했다. 예를 들어, 그는 기계가 체스와 같은 전략 게임에서 인간을 이길 수 있다고 예측했고, 이는 1997년 딥블루의 승리로 실현되었다. 또한 "기계가 학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어린아이처럼 경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는 "아동 기계(child machine)" 개념을 제안했다. 이는 현대 기계 학습의 선구적 아이디어였다. 튜링은 기술적 세부사항도 다뤘다. 그는 기계가 언어를 처리하려면 방대한 디지털 저장소와 명령 체계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당시로서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유니버설 컴퓨팅 머신"의 연장선에서 이를 구상했다. 그의 비전은 1950년대의 기술로는 실현 불가능했지만,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었다.
튜링의 개인적 맥락도 그의 도발에 깊이를 더했다. 전쟁 중 암호 해독가로서 그는 기계와 인간 지능의 경계를 경험했다. 에니그마 해독을 위한 봄베(Bombe) 기계를 설계하며, 그는 계산의 기계화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전후 영국 사회에서 튜링은 동성애자로서 법적 박해를 받았고, 이는 그의 작업에 시간적 제약을 강요했다. 1952년 체포와 1954년 비극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튜링 테스트는 그의 마지막 지적 유산으로 남았다. 그는 논문에서 "서기 2000년쯤이면 기계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할 것"이라 낙관했지만, 그 예측은 현실과 엇갈렸다.
튜링 테스트의 성과는 즉각적이지는 않았다. 1950년대에는 이를 구현할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반응도 회의적이었다. 철학자들은 "기계가 대화한다고 해서 정말 생각하는가?"라며 반박했고, 기술자들은 연산 능력 부족을 지적했다. 튜링 스스로도 테스트를 실제로 실행하지 못했고, 그의 아이디어는 이론에 머물렀다. 첫 번째 실질적 시도는 1966년 조셉 와이젠바움의 ELIZA 프로그램이었지만, 이는 단순한 패턴 매칭에 불과해 튜링의 비전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의 예측이 2000년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한계로 남았다. 그러나 튜링 테스트는 실패로 끝난 실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AI 연구의 방향을 바꾼 사고의 전환이었다.
튜링의 도발은 파급력이 거대했다. 그의 테스트는 "지능"의 정의를 실용적으로 재구성하며, 이후 AI 개발자들에게 목표를 제시했다. 1956년 다트머스 회의에서 존 매카시와 마빈 민스키가 AI라는 학문을 정립할 때, 튜링의 논문은 그들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튜링이 제안한 학습 개념은 1980년대 신경망의 부활과 2010년대 딥러닝의 성공으로 꽃피웠다. 오늘날 ChatGPT 같은 모델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할 가능성을 보여주며, 그의 예언이 현실에 가까워졌음을 입증한다. 철학적으로도 튜링 테스트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존 설(John Searle)의 "중국어 방" 반론 같은 논쟁을 촉발하며, 지능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졌다.
튜링의 도발은 AI 혁명의 기폭제였다. 그는 기계가 단순한 계산 도구를 넘어 사고를 혁신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었고, 그 믿음은 컴퓨터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어섰다. 튜링 테스트는 완벽한 답을 주지 않았지만,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세상에 던졌고, 그 질문은 현대 AI의 모든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1950년의 그 논문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세상을 바꾼 혁명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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