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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권: 시간과 창조의 신비 (시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 창세기의 해석)

by modeoflife 2025. 4. 6.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11권은 그의 서술이 개인적 삶의 고백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시간의 심오한 신비로 확장되는 중대한 전환점을 이룹니다. 제1권부터 제9권까지는 유년기의 방황, 청년기의 갈등, 회심, 세례, 그리고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에 이르는 생애를 다루었고, 제10권에서는 현재의 내면을 성찰했다면, 제11권부터는 신앙의 시각으로 우주적 질서와 하나님의 본질을 깊이 탐구합니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하던 시점—서기 397년경, 약 43세—에 북아프리카 히포 레기우스(Hippo Regius)에서 사제로 봉사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이 권에서 그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고,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상징적·신학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위대함과 인간의 한계를 묵상합니다. 이 장은 그의 신학적 사유가 개인적 경험을 넘어 창조론과 시간론으로深化되며,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경이와 겸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권은 그의 오랜 친구 네브리디우스(Nebridius)의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네브리디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진리를 탐구하며 마니교를 떠난 동료로, 예리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quid faciebat Deus antequam mundum crearet?)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은 표면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시간과 창조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여정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시간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tempus quid est?)고 선언하며, 시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합니다. 그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시간—과거, 현재, 미래—을 분석합니다. 그는 “과거는 이미 지나가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실체가 없으며, 현재는 순간적으로 과거로 변한다”(praeteritum non est, futurum nondum est, praesens fit praeteritum)고 고백합니다. 그는 시간의 실체가 물질처럼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는 “시간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느끼는 것이다”(tempus in animo meo sentio)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는 이 신비로운 시간의 흐름에 감탄하며, “시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질서다”(tempus tuum donum est)라고 찬양합니다.

 


그는 시간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심화하며, 인간의 시간 경험을 구체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는 “과거는 기억 속에, 미래는 기대 속에, 현재는 인식 속에 존재한다”(praeteritum in memoria, futurum in expectatione, praesens in contemplatione)고 설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예를 듭니다. 그는 유년기 배 도둑질 사건(제2권)을 기억하고, 앞으로 하나님을 더 충실히 섬기고자 하는 기대를 품으며, 현재 펜을 들고 글을 쓰는 순간을 느낍니다. 그는 “시간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경험이다”(tempus mens mea metitur)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찬송가의 비유를 통해 이를 더욱 명확히 합니다. 그는 찬송가를 부를 때 이미 부른 구절을 기억하고, 아직 부르지 않은 구절을 기대하며, 현재 부르는 음을 인식한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시간은 마음의 활동을 통해 측정된다”(mens mea tempus metitur)고 강조합니다. 그는 한 시간의 길이를 시계로 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경험으로 정의합니다. 그는 “내가 시간을 측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물리적 길이가 아니라 마음의 인식이다”(non spatium corporale, sed animi mensura)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의 기원을 인간의 마음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다”(tu es creator temporis)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임을 신학적으로 확증합니다. 그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를 인용하며, 시간의 상대성이 하나님의 영원성 속에서만 이해된다고 봅니다.

그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묵상하며 시간과 창조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를 출발점으로 삼아, 네브리디우스의 질문에 답합니다. 그는 “창조 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없었다”(nihil erat)고 단언합니다. 그는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없이 오직 하나님만 계셨다”(neque tempus, neque locus, neque materia, solus Deus erat)고 설명합니다. 그는 “세상이 생기기 전에는 ‘전’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ante mundum nulla ante erat)고 주장하며, 시간 자체가 창조된 질서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창세기 1장 3절—“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를 깊이 성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창조의 능력이다”(verbum tuum non sonus, sed virtus est)라고 해석합니다. 그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의지와 힘으로서, 빛의 창조와 함께 시간과 세상의 시작을 알렸다고 봅니다. 그는 “빛이 생긴 순간, 창조의 질서와 시간이 시작되었다”(lux facta est et tempus incepit)고 고백하며, 창조의 신비에 감탄합니다.

그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배운 상징적·영적 해석을 적용합니다. 그는 “창세기의 ‘하루, 이틀’은 인간의 24시간을 뜻하지 않는다”(dies unus non est viginti quattuor horae)고 주장합니다. 그는 “첫째 날에 빛이 있었다”는 구절(창세기 1:3)을 물리적 태양의 창조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빛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시작됨을 상징한다”(lux initium ordinis divini significat)고 해석하며, 빛과 어둠의 분리를 영적 의미로 확장합니다. 그는 “빛은 하나님의 나라와 진리를, 어둠은 혼란과 죄를 상징할 수 있다”(lux regnum Dei, tenebrae chaos et peccatum)고 설명합니다. 그는 창세기 1장 6-8절—“하늘이 만들어졌다”—를 단순히 물리적 하늘이 아니라 영적 세계의 형성으로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하루는 인간의 시간과 다른 차원이다”(dies Dei non est dies noster)고 고백하며, 창조의 여섯 날을 하나님의 질서가 단계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하늘과 땅, 바다와 생물이 순차적으로 창조된 것을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묵상합니다. 그는 “하늘의 별, 땅의 나무, 바다의 물고기까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 안에 있다”(omnia in sapientia tua facta sunt)라며 감격합니다.

그는 시간과 창조를 묵상하며 인간의 한계를 깊이 성찰합니다. 그는 “나는 시간 속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신다”(ego in tempore sum, tu extra tempus es)고 고백하며,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의 신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는 “내가 시간의 시작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처음과 끝을 다 알 수 없다”(quantumcumque cogito, initium et finem non comprehendo)고 기록합니다. 그는 “과거는 기억 속에, 미래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데, 내가 왜 시간을 느낄까?”(praeteritum in memoria, futurum in imaginatione, cur sentio tempus?)라며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탐구합니다. 그는 “시간을 측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마음이 느낀 경험일 뿐이다”(tempus metior, sed mens mea metitur)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는 이 한계에서 좌절하지 않고, “주님, 당신을 다 알 수 없어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알기 위해 묵상합니다”(non te plene intellego, sed amo te et quaero te)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이 겸손한 자세가 신앙의 토대라고 믿으며,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나를 인도하신다”(tu omnia scis et me ducis)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제11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과 창조의 신비를 철학적·신학적으로 탐구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시간의 본질을 인간 마음의 경험으로 분석하고, 창세기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초월성과 창조의 위대함을 찬양합니다. 그는 “내가 시간 속에서 헤매도 주님은 나를 붙잡고 계세요”(in tempore erro, sed tu me tenes)라고 고백하며, 신앙이 개인적 경험을 넘어 우주적 질서로 확장됨을 드러냅니다. 이 권은 그의 신학에서 시간론과 창조론의 기초를 형성하며,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경이와 인간의 겸손을 조화롭게 담아냅니다.

이 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사유와 신앙적 경외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그는 시간의 신비를 풀려다 한계를 느끼지만, 그 한계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더 깊이 찬양합니다. 그는 “주님의 창조를 묵상하며 제가 얼마나 작은지 깨닫습니다”(in creatura tua me parvum video)라고 고백하며, 신앙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제11권은 그의 신앙이 창조 질서로 열리는 시기로, 철학적 탐구와 신학적 묵상이 얽혀 하나님의 신비를 조명합니다.

제11권은 그의 신앙 여정에서 개인적 고백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와 시간의 본질로 초점을 옮기며, 신앙이 우주적 차원에서 깊어짐을 제시합니다. 그는 히포에서의 묵상을 통해 “주님, 당신이 만드신 시간과 세상 속에 제가 있습니다”(in tempore tuo et mundo tuo ego sum)라고 기도하며, 창조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과 평화를 전합니다.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고백록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