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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 운동과 명제적 합의

by modeoflife 2025. 4. 5.

 

 교회가 내놓은 교리(명제)들을 살펴보면, 삼위일체나 성육신처럼 보편적으로 합의된 핵심이 있는가 하면, 세례나 성찬, 직분 이해, 구원론의 특정 논점 등에서는 교단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갖곤 합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본격화된 에큐메니컬(교회 일치) 운동은, 이처럼 다양한 교단들이 “공통으로 인정할 만한 명제”를 찾아 보편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 주었습니다.

 

(1) 에큐메니컬 신학 대화에서 나타나는 공통 명제 설정의 의미

 

일치 운동의 목표 중 하나는, “우리가 공유하는 핵심 신앙 명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함께 답하고, “서로 다르지만 용인 가능한 해석 차이는 어디까지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이 1999년에 “칭의(Justification)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했을 때, 양측이 “칭의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라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공통 명제를 확인한 것이 대표적 사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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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두 교파는 칭의 교리를 두고 적대하거나, 전혀 다르다고 여겨 온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화해 보니 “근본 뿌리나 의도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공식 선언을 통해 이를 명제 형태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의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은혜와 인간 협력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라는 쟁점을 꼼꼼히 논의했을 때, 단순한 편견이나 오해가 대부분 불필요한 갈등을 키워 왔다는 점도 드러났습니다. 결과적으로, 명제를 중심으로 대화하면서 합의된 공통점을 밝혀 낸 것은 교단 간 갈등을 해소하고 협력의 문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이 정도까지는 같고, 저 정도는 다르지만 용인 가능하다”는 선을 긋는 작업이 언제나 매끄러운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공동 명제”를 확인해 가는 과정이, 교단 간의 막연한 편견이나 역사적 상처를 완화하고 신앙의 본질적 일치를 확인하게 한다는 점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명제 중심 대화는 결코 완벽한 해법은 아니어도, 교회 일치에 중요한 동력이 되는 길을 열어 주는 셈이지요.

 

(2) 교단 간 핵심 교리 합의와 신학적 다양성 유지의 과제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교회 일치의 또 다른 과제는 “각 교단이 가진 전통의 개성은 어떻게 보존하면서, 동시에 공통 교리에 합의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일 것입니다. 어떤 교단은 성찬을 “기념”으로 이해하고, 또 다른 교단은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강조한다면, 쉽게 한쪽이 “우리는 달리 해석하니, 일치를 거부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교회 일치의 현실적 고민입니다.

 

물론 일치 운동의 이상적 접근은 “핵심 명제에 일치하되, 부차적 해석에서는 다양성을 인정하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같은 전통 고백에는 함께 동의할 수 있지만, 예배 형식이나 성례전 이해 같은 부분에서는 다소 자유를 두자는 것이지요. 예컨대 “성찬이 기념이냐 실제적 임재냐”는 중요한 차이지만, 그렇다고 구원의 핵심이나 예수님의 정체성 같은 주된 교리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일치 운동의 차원에서는 ‘서로 허용할 수 있는 범위’로 인정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문제는, 일치 대화 현장에서 “어디부터가 핵심이고 어디부터가 부차적 해석이냐”를 합의하는 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찬 이해”가 신앙 전반에 걸친 엄청난 의미를 지닌 핵심 교리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다른 해석이 있어도 괜찮은 부분”으로 느껴질 수 있거든요. 이런 경계선을 그을 때마다, 교회 역사의 상처나 신학적 자부심이 걸려 있어 협상이 길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 명제를 함께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본질적 믿음을 공유하는 형제·자매 공동체”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는 점에서 서로 손을 잡고, “다만, 성례전 이해는 조금 다르다”라고 인정해 주는 식이죠. 이렇게 하면, 교회 일치의 장점—서로 적대하거나 배타적으로 지내지 않고, 함께 복음 전파와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교단 간 핵심 교리 합의는 일종의 “공통분모”를 확인하는 작업이고, 신학적 다양성 유지는 각 교단이 오랜 전통 속에서 지켜 온 해석을 ‘허용 범위 안’에서 존중해 주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모두 같은 교리를 가져야 해!”라며 지나친 획일화로 흐르거나, 반대로 “다 달라, 일치는 불가능해!”라며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겠지요. 일치 운동은 그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고, 명제(교리) 차원의 대화가 그 작업을 이끌어 가는 핵심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3) 일치 운동의 최신 동향과 명제 중심 대화의 장·단점

 

오늘날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비롯해 다양한 에큐메니컬 조직들이 교회 일치를 위한 문서를 잇달아 내놓고, 때로는 “공동 선언” 형태로 교단 간 협의를 선언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루터교와 개신교, 가톨릭과 정교회 등, 이전에는 거리를 두었던 교단들이 이제는 테이블에 앉아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명제는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하게 된 거지요.

 

그런데도 명제 중심의 대화가 항상 순조롭게만 진행되는 건 아닙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문서에 사인했다” 수준에서 그치고, 정작 교류나 협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합의 문서는 썼지만, 구체적으로 예배를 함께 드리고 사역을 함께하는 일은 별로 없다”는 식이지요. 명제 중심 대화가 “너무 문서 합의에만 매달려, 실제 신앙생활 차원에서 이견을 좁히거나 교류가 활발해지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불거지는 배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명제) 중심 대화가 일치 운동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완전히 평가절하하기는 어렵습니다. 교단 간 사소한 논쟁이나 적대감이 오래도록 쌓일 경우,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질 법도 한데, 막상 서로의 신학 용어를 교차 검토하고, “같은 얘기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점검해 보면 의외로 큰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사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진영 vs. 저 진영”으로만 대립하던 교회들이, 공통 명제를 확인해 가며 서로의 근본적 복음 신앙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기도 하지요.

 

명제 중심 대화의 장점은 이렇게 “우리가 공유하는 큰 그림(복음)”을 재발견하게 하고, 교단 간 불필요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 작업이 “문서 합의”에 치중하다 보면, “일치”가 구체적인 영적 교류, 공동 기도, 사역 협력 같은 실제 신앙생활 차원에서 진척을 보이는 속도는 더딜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요. 교단 간 협력은 합의 문서를 넘어, 공동체적인 체험과 친교, 신앙 실천으로 구체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명제 합의가 없다면 교단 간 대화가 막연히 “우린 그냥 다 다르니까”로 흐를 가능성이 큽니다. 공통 교리를 최소한도로나마 확인해 두는 게,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고 “형제·자매된 공동체”로 인식하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대화에서의 명제 중심 접근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교회가 서로 다른 교단과 대화할 때, 어떤 교리(명제)가 “핵심”이고, 어떤 교리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기준이 모호하지 않을까요?

- 명제 중심의 대화로 이룬 교리 합의가, 실제 신앙인들의 삶과 예배에서도 체감 가능한 변화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 교회 일치 운동에서 “공동 명제 합의”만 강조하다 보면, 각 교단이 지닌 독특한 해석이나 전통이 사라질 위험은 없을까요?

- 혹시 명제 차원이 아니라, 공동 봉사나 선교, 영적 교제 같은 실천을 통해 더 빠른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명제적 합의와 실천적 일치 사이의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명제, 신학 그리고 신앙'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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