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장들에서 살펴본 대로, 교회가 붙들어 온 교리(명제)는 교회사와 신학의 역사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지녀 왔습니다. 단 한두 줄로 요약된 교리가, 때론 공의회를 흔들고, 때론 공동체에 깊은 위로와 통찰을 주며,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주춧돌처럼 작동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던지는 질문들은 이제 이 명제를 훨씬 더 다층적인 시각으로 재검토하라고 요구합니다. 어떤 이들은 “명제가 정말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빈틈없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고 묻고, 또 다른 이들은 “이게 실제 삶과 어떻게 맞닿느냐?”고 질문합니다.
명제는 철학적·교회사적 배경과 현대 신앙 현장에서의 실천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각기 다른 빛을 발하며, 그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복합적 지위를 지닙니다. 이번 장에서는 그 통합적 시각을 정리하고, 신학 연구자·목회자·평신도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볼 제언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1) 명제 개념의 다층적 의미: 철학, 교회사, 신학 실천의 교차 지점
먼저, 철학의 관점에서 명제(proposition)는 “참·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문장”이라는 간단한 정의가 있지만, 종교 영역에선 바로 그 “참·거짓”을 과학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문장은 논리학적으론 참·거짓 명제를 구성하지만, 종교적·신앙적 맥락에서는 과학 실험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개인의 영적 체험과 공동체 신앙고백이 깊이 얽혀 있지요.
그래서 분석철학적 전통에서는 주로 “이 명제가 어떤 의미와 지시 대상(denotation)을 갖는가?” “언어가 어떻게 세계 또는 초월적 실재를 가리키는가?”를 문제 삼았고, 신학에서는 “계시와 신앙고백”이 어떻게 명제로 표현되는지를 논의해 왔습니다. 이처럼 명제 하나를 두고도 철학과 신학은 각기 다른 언어 게임을 펼치고, 교회가 그 다툼을 조정하거나 재해석하면서 신앙 전통을 지켜 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교회사를 살펴 보면, 명제는 단순한 논리 문장 이상의 역사적 무게를 드러냅니다.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핵심 교리는 공의회와 수많은 교부들의 논쟁을 거쳐, 교회 전체가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라고 합의한 결과물이니까요.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수백 년간의 갈등과 합의, 정치적·문화적 맥락이 얽혀 있습니다. 즉, 교회사적 전승 안에서 명제는 “치열하게 다듬어진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신학 실천 차원에서 명제가 설교나 교육, 변증학, 공동체 형성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지를 살펴보면, 한 문장으로 요약된 교리가 얼마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을 암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신앙의 기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반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야기(서사)나 신비 체험, 공동체적 실천이 없으면 공허해지기 쉽다는 문제의식도 있습니다. 그래서 명제는, 교회가 믿는 바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다른 요소와 상호 작용해야 하는 복합적 지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제라는 것이 철학(논리·언어), 교회사(역사·전승), 그리고 현대 신학 실천(설교·교육·공동체)의 교차점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해석되는지를 고찰해야, 그 “다층적 의미”를 온전히 포착할 수 있습니다.
(2) 교회사적 전승과 현대 신앙 현장 간 긴장과 조율
교회가 오랫동안 지켜 온 교리(명제)를 그대로 전달하는 일은, 한편으로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귀한 작업입니다. 공의회를 통해 정립된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교리는 단순히 옛날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이 아니고, 수많은 신학적 논쟁과 영적 체험의 결정체이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이 명제를 현대 성도들에게 고스란히 내놓았을 때, “그게 지금의 과학·문화·다원주의적 현실과 어떤 관련이 있지?”라며 낯설게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전통 교리를 “현대화”한다며 지나치게 바꾸거나 해체하는 접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교회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역사적 지혜와, 복음 신앙이 전해 온 본질적 메시지를 훼손할 위험이 커지지요.
이런 긴장은 사실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늘 존재해 왔습니다. 중세 신학자나 종교개혁자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 시대에도 “교회 전통과 당대 현실 사이의 갭”으로 인해 크고 작은 갈등이 되풀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21세기 학문 발전과 다원주의 속에서 교리가 어디까지 유효한가?”를 묻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벌어진 반복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사적 전승을 무조건 “낡고 쓸모없는 과거”로 치부하기보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명제를 형성하고 논쟁을 해결해 왔는가?”를 꼼꼼히 살피는 게 중요합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교부와 신학자, 공의회가 이뤄 낸 합의와 혁신의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 시절에도 “교리가 과연 성경 본문과 직결되는가?”를 두고 치열한 논의가 있었고, 근대 초기엔 과학의 부상으로 “창조 교리”가 재검토되었지요. 이처럼 교회사적 전승과 현대 문화·학문 사이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재해석과 조율을 해 온 역사를 돌아보면, 오늘날에도 똑같은 원리로 명제를 재검토하고 적용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역사가 우리에게 전달해 준 교리”를 하찮게 버리거나, “현대인의 질문”을 묵살하는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전통을 경청하면서도, 동시대의 맥락에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모색하는 조율 과정을 성실히 진행한다면, 옛 교리라도 얼마든지 현대인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교리 vs. 현실”이라는 대립 구도를 넘어, 교회사적 전승이 준 지혜를 근거 삼아 현대적 해석을 시도하는 교회의 모습이, 곧 건강한 신앙 공동체의 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학문적 엄밀성과 실제 사역(목회, 교육) 간의 상호 보완
명제(교리)가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할 ‘정보’나 ‘데이터’가 아니라, 논리·역사·신앙 체험을 아우르는 복합적 과정에서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연스럽게 학문적 신학 연구와 실제 목회·교육 현장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컨대, 한 신학자가 삼위일체론에 대해 철학적·교회사적 논리를 심층적으로 탐구했다 해도, 그 결과물이 교회로 살아 들어가려면, 설교나 교육 같은 목회적 ‘번역’ 과정이 필수적이겠지요. 거꾸로, 교회 현장에서 설교를 탁월하게 전한다 해도, 교리 명제 자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토대가 없다면, 역사적 왜곡이나 독단적 해석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이렇듯 교리 명제와 관련해 학문적 엄밀성과 실제 사역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 신학 연구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연구가 공동체의 실제 삶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지금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가 제기되고 어떤 질문이 가장 급한가?”를 파악하며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나 교회 현장의 이야기를 경청해, 연구 목표와 방법론을 조정할 수도 있지요.
- 목회자나 교사 입장에서는, 학문적 연구 결과를 가볍게 무시하지 말고, “이 교리(명제)가 지닌 역사·논리·신학적 깊이”를 이해함으로써, 성도들에게 단순 지식 이상의 풍부한 신앙적 통찰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한 줄 요약에만 의존하면, 교리가 ‘왜’ 중요한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놓치기 쉽거든요.
이런 협력은 교회 공동체가 “교리 명제의 역사·논리적 뿌리를 존중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응답하는 힘”을 얻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목회자가 고민하는 “교인들의 실존적 질문”과, 학문적 신학자가 다루는 “교리의 체계와 역사”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살아 있는 신앙이 형성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학문이 뿌리가 되고, 목회와 교육이 가지와 열매를 맺으면, 교리 명제는 단지 외워야 할 문장이 아니라, 교인들이 삶으로 체득하는 복음의 핵심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교회사적 전승에서 만들어진 교리(명제)를, 현대 사회의 질문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을 21세기 성도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면 어떤 조정과 해석이 필요할까요?
- 학문적 신학 연구에서 도출한 어려운 개념들을, 목회나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쉽게 풀어 낼 수 있을까요? 그 균형점을 찾는 좋은 사례는 무엇일까요?
- 교리(명제)를 그냥 “배워 두면 좋다” 수준이 아니라, 성도들이 실제 삶 속에서 체득하도록 돕기 위해, 소그룹 토의나 디지털 사역에서 시도해 볼 만한 방식은 무엇이 있을까요?
- 현장 목회자가 학문적 통찰을 무시하거나, 반대로 학자가 교회 현장의 필요를 외면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부작용이 생길 수 있을까요?
- 교리가 지닌 역사적·논리적 깊이와, 체험적·영적 울림이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조율하려면, 교회와 신학계가 어떤 구조와 문화를 발전시켜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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