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교회가 지닌 교리(명제)는 일상의 신앙생활은 물론이고, 신학의 역사와 변증, 그리고 다양한 해석학적·문화적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맞닥뜨리는 포스트모던 환경과 디지털 기술 혁신 속에서, 이 명제들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발전·재해석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번 장에서는 바로 그 “명제와 신학의 미래”를 포스트모던 담론 분석, 디지털 시대 교육, 그리고 교회 일치 운동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려고 합니다.
(1)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 담론 이론이 던지는 질문
우리가 흔히 언어를 “의미를 전달하는 중립적 도구”라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사상을 이끌어 온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같은 철학자들은, “언어가 결코 그렇게 간단하거나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언어가 얽혀 있는 담론(discourse)이라는 체계는, 그 사회와 해석자의 시선, 심지어 권력 구조와 역사를 반영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는 텍스트를 읽을 때, 표면적으로 보이는 의미 뒤에 숨어 있는 모순이나, 당연시된 권력 관계를 끄집어내려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나 신학 문헌을 읽을 때조차 “이미 우리 안에 놓인 전제와 해석자적 권력”이 텍스트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지요. 푸코는 한술 더 떠서, 지식과 권력이 서로 맞물려 “이게 진리다!”라고 주도권을 쥐는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가 절대적 진리로 선포하는 명제—“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같은—역시 결코 무균실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권력적 맥락 속에서 형성·전달된 건 아닌지 묻게 되지요.
어떤 이는 “아니다, 교리가야말로 성경적이고 신적 권위에서 직접 나온 거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서구 기독교가 식민 통치나 종교 논쟁에서 명제를 ‘진리’라고 내세우며, 특정 문화나 생각을 억압한 사례를 떠올려 보면, 포스트모던적 담론 분석이 던지는 질문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맥락이나 권력적 상징이 이 명제 안에 스며 있는 건 아닐까?”라고 고민하게 만드니까요.
데리다·푸코의 담론 이론은 교회에 대해 “당신들이 말하는 진리는 정말 보편 불변인가, 아니면 해석자의 역사·권력 관계가 투영된 하나의 담론인가?”라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가 이에 대응하려면, 교리(명제)가 어떻게 형성·적용되어 왔는지, 그 안에 권력이나 시대정신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이는 교리의 가치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당연시해 왔던 ‘진리 언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중요한 통찰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2) 텍스트 해체와 신학 명제의 정당성/한계
데리다(Derrida)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 관점에서, 성경이든 신학 문헌이든 애초에 “고정된 절대성”을 갖는 텍스트는 없다고 봅니다. 모든 텍스트는 해석자의 역사·문화·권력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맥락으로 “재해석”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교회가 소중히 지켜 온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교리(명제)도, 완결된 시스템이나 불변의 공리가 아니라, 언제라도 새 질문 속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집니다.
이쯤 되면, 교회 입장에서는 “해체주의가 교리까지 흔들어 버리면, 우리가 붙들어 온 복음의 핵심이 다 무너지는 것 아닐까?”라는 우려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해체주의에서는 종종 “끝없이 해석하는 과정 외에는 어떤 확정된 ‘의미’도 없다”라는 급진적 결론에 이르기도 하지요. 이럴 때, 교리(명제)라는 견고한 틀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 공동체로서는, “복음의 본질마저 파편화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해체주의가 교리에 던지는 질문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때로는 너무 “우리가 선포하는 명제는 절대적 진리”라고만 굳게 믿고, 그 명제를 해석·적용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인 권력 작용을 일으켜 온 역사도 부정할 수 없거든요. 예컨대, 식민지 시대에 “예수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선언이 현지 문화를 억압하고 서구 가치를 강요하는 논리로 변질된 사례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해체주의는 바로 이런 권력적 독단이나 문화적 편향을 비판적으로 드러낼 기회를 줍니다. 교회가 그동안 당연시했던 전통이나 해석에 대해 “이게 정말 복음 자체인지, 아니면 특정 시대·권력·문화가 섞인 담론인지” 성찰할 수 있게 하는 거죠.
“교리 명제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해체주의가 보여 주는 비판과 해석의 유동성” 사이에는 긴장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해체가 너무 극단으로 치달으면, 신앙의 코어(core)를 잃고 영적 혼란에 빠질 수 있고, 반대로 교회가 해체주의를 무시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만하거나 시대착오적 권력 언어에 빠질 위험이 있지요. 그래서 교회가 해체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어도, 그 시선이 제기하는 질문—“정말 이 명제를 이렇게 해석하는 게 최선인가? 혹시 문화·권력적 편향이 없나?”—은 경청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이처럼 해체주의의 도전은 교리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겸손하게” 만들어 줄 가능성이 큽니다. “명제가 신앙의 본질을 안전하게 담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되, 동시에 끊임없이 “혹시 우리가 언어화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은 더 광대하지 않을까?”라고 묻는 것이죠. 교회가 그렇게 신앙의 중심을 지키면서도 열린 비판을 수용하는 태도를 갖추게 된다면, 해체주의가 제기하는 언어·담론 비판도 복음 안에서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3)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속에서 신학 명제의 자기 주장 방식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절대적 진리를 쉽사리 인정하기보다는,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가 공존하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전통적으로 붙들어 온 교리적 명제를 어떻게 ‘유일한 진리’로서 주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외치면, 곧바로 “그건 당신들만의 주장일 뿐이지 않느냐?”라는 반론이 터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지닌 핵심 교리를 어떻게 전달하고 설득해 나가야 할지가 중요한 과제가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먼저 모색되는 태도는 ‘겸손한 절대성’입니다. 즉,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 온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시다”라는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독단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대화와 검증의 장’으로 초대하는 방식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믿음을 절대적 진리라고 확신하되, 이는 상대를 눌러 버리거나 배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진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지만,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논점과도 진지하게 대화하고 싶다”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교회가 독선적 배타성에만 갇힌 집단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고백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과, 타자에 대한 존중심을 함께 드러내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한편, 교리를 단지 “이거 믿어라”라고 주장하기보다, ‘대안적 내러티브’를 통해 보여 주는 방식도 중요해졌습니다. 포스트모던 감수성에 익숙한 사람들은 논리적 증명이나 공식적인 교리 선언보다는, 실제 삶에서 확인되는 이야기와 체험에 더 쉽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담긴 사랑과 희생, 교회 공동체가 역사 속에서 실천해 온 헌신과 돌봄의 사례는, 그 어떤 추상적 교리보다 더 강력한 설득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나 성육신과 같은 교리가 딱딱한 신학 언어가 아니라, 고통과 소외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던 실제 삶의 이야기로 드러난다면, 그 교리들이 왜 중요한지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입니다. 이는 교리가 말로만 외쳐지는 지시 문장이 아니라, 삶으로 체험되고 입증되는 서사라는 점을 강조하는 접근입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교회가 자칫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닫힌 공동체’로 보이지 않으려면, 다른 종교나 철학 전통에 대한 상호 인정과 대화의 자세를 갖추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구원을 발견했지만, 여러분의 전통도 역사적으로 분명히 소중한 통찰과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상호 존중의 기초가 마련됩니다. 이는 곧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진리를 포기하지 않지만, 동시에 다른 전통이 지닌 지혜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무시하지도 않는다”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대를 경청하며 대화를 전개하는 모습은, 교회를 배타성과 독선의 이미지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교리 명제의 자기 주장 방식은, 더 이상 “이게 유일한 길이니 따라와라”라고 독단적으로 외치는 데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교리를 확신하되,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풍성한 삶의 이야기와 실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상대방이 ‘함께 고민해 볼 만하다’고 느끼게 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교리의 절대성을 단순히 뿌리째 흔들어 버리기보다, 그 절대성이 역사와 문화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소통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다른 목소리에도 열려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오히려 그 교리가 지닌 매력과 설득력이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더욱 깊이 빛날 수 있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텍스트 해체 관점에서, 교회가 전해 온 명제는 역사·권력이 개입된 담론일 뿐이라고 볼 때, 교회는 어떤 대응 논리를 펼칠 수 있을까요?
- 포스트모던 다원주의가 신앙 명제에 제기하는 비판—“그것은 너희 시각이지, 왜 모두가 믿어야 하나?”—에 교회는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까요?
- 명제를 해체할 때, 복음의 본질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코어’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 논리적 ‘체계’로 이루어진 교리 대신, 대안적 내러티브나 증언 형식으로 신앙을 전하면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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