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굴 제국 내전, 인도의 왕좌 다툼 (17세기)
17세기 무굴 제국은 인도 아대륙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샤 자한(1628~1658년)과 아우랑제브(1658 ~ 1707년)의 통치 아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 시기는 황제의 권력과 왕좌를 둘러싼 치열한 내전으로 얼룩졌다. 무굴 제국(1526 ~ 1857년)은 바부르가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델리 술탄국을 무너뜨리며 세웠고, 그의 손자 아크바르(1556 ~ 1605년)가 종교적 관용과 중앙집권으로 제국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17세기에 접어들며 황제의 사후 계승 문제와 황자들 간의 갈등은 제국의 통합을 위협했다. 특히 샤 자한의 병을 계기로 벌어진 1658년 내전과 아우랑제브 통치 중의 반란은 무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피의 드라마였다. 이 "인도의 왕좌 다툼"은 황실 가족의 내분을 넘어, 제국의 정치적 구조, 종교적 균형, 지방 세력의 변화를 뒤흔든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무굴 제국의 계승 전통과 갈등의 뿌리
무굴 제국은 몽골과 페르시아 전통을 계승한 통치 체제를 가졌다. 황제는 절대 권력을 행사했지만,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는 제도가 없었다. 황자들은 어머니의 지위나 군사적 능력에 따라 왕좌를 노렸고, 이는 "탁트 야 탁타(Takht ya Takhta)"—"왕좌 아니면 장례"—라는 말로 요약되었다. 황제들은 다처제를 통해 여러 아내와 첩에게서 자식을 낳았고, 이들은 성장하며 각기 군대와 지방 귀족(만사브다르)의 지지를 얻었다. 17세기에는 제국의 번영이 황자들의 야망을 키웠고, 황제의 죽음이나 병은 곧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샤 자한 이전에도 계승 다툼은 있었다. 자한기르(1605~1627년)는 아들 쿠스라우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실명시켰으며, 샤 자한(당시 쿠람 왕자)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며 동생들과 싸웠다. 17세기 들어 제국의 영토와 재력이 커지며, 황자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도 늘어났다. 이는 내전을 더 격렬하고 파괴적으로 만들었다.
샤 자한의 병과 황자들의 충돌 (1657~1658년)
1657년 9월, 샤 자한은 델리에서 심각한 병(요로 질환으로 추정)에 걸렸다. 타지마할을 완성하며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그는 50대 후반으로, 건강 악화 소식이 퍼지자 네 아들이 왕좌를 놓고 움직였다:
- 다라 시코(Dara Shikoh): 장남으로, 샤 자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수피즘을 신봉하며 힌두교와 이슬람의 융합을 추구했고, 아크바르의 포용 정책을 계승했다. 델리와 아그라를 기반으로 약 6만 명의 군대를 모았다.
- 샤 슈자(Shah Shuja): 둘째 아들로, 벵골의 총독이었다. 그는 독립적인 성향을 보이며 동부 지역에서 약 3만 명의 병력을 준비했다.
- 아우랑제브(Aurangzeb): 셋째 아들로, 데칸 지역의 총독이었다. 이슬람 정통주의를 신봉하며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고, 약 5만 명의 정예군을 이끌었다.
- 무라드 박시(Murad Baksh): 막내로, 구자라트의 총독이었다. 야심은 컸지만 경험이 부족했고, 약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1657년 말, 샤 자한의 병세가 악화되자 황자들은 각기 행동에 나섰다. 샤 슈자는 벵골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델리로 진군했고, 무라드는 구자라트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아우랑제브는 무라드와 동맹을 맺고 다라를 제거하려 했다. 1658년 2월, 샤 슈자는 바라나시 근처 바하두르푸르 전투에서 아우랑제브에게 패배하고 도망쳤다. 무라드와 아우랑제브는 세력을 합쳐 다라 시코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사무가르 전투: 왕좌를 건 대결 (1658년 5월 29일)
1658년 5월 29일, 아그라에서 동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사무가르 전투(Battle of Samugarh)는 무굴 내전의 절정이었다. 다라 시코는 약 6만 명의 병력을 이끌었고, 아우랑제브와 무라드의 연합군은 약 5만 명이었다. 북인도의 무더운 평야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무굴 군대의 전술과 장비를 보여준다.
- 다라 시코의 군대:
- 병력: 2만 명의 라지푸트 기병, 3만 명의 보병(아시가루 비슷한 징집병 포함), 1만 명의 포병과 코끼리 부대.
- 무기: 코끼리에 탄 중무장 병사(창과 검), 대포, 활과 화살.
- 전략: 코끼리와 포병으로 적의 진형을 돌파한 뒤 기병으로 추격.
- 지휘관: 다라의 충신 미르자 라자 자이 싱(라지푸트 왕족).
- 아우랑제브의 군대:
- 병력: 1만 5천 명의 기병(페르시아와 투르크 용병 포함), 2만 명의 보병, 1만 명의 포병.
- 무기: 빠른 기병용 검(샴쉬르), 대포, 소형 화승총(초기 화기).
- 전략: 기동성을 활용한 측면 공격과 포격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림.
- 지휘관: 아우랑제브와 그의 장군 킬리치 칸.
전투는 아침 8시경 시작되었다. 다라의 코끼리 부대가 아우랑제브의 전선을 돌파하며 초반 우세를 잡았다. 코끼리들은 보병을 짓밟고 포병 진지를 흔들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포병을 재배치해 코끼리 측면을 집중 포격했고, 겁에 질린 코끼리들이 다라의 진영으로 되돌아와 혼란을 일으켰다. 오후 1시경, 다라는 코끼리에서 내려 말을 타고 전선을 재정비하려 했지만, 이 모습이 부하들에게 그의 죽음으로 오해받았다. 사기가 꺾인 다라의 군대는 붕괴했고, 아우랑제브의 기병이 추격하며 승리를 확정지었다. 약 1만 명이 전사했고, 다라는 아그라로 도망쳤다. 아우랑제브는 약 3천 명의 손실을 입었다.
아우랑제브의 승리와 샤 자한의 유폐
사무가르 전투 후, 아우랑제브는 무라드를 배신했다. 1658년 6월, 그는 무라드를 연회에 초대해 술에 취하게 한 뒤 감금했다. 무라드는 1661년 처형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아그라로 진군해 샤 자한을 아그라 요새의 샤 부르즈 탑에 유폐했다. 샤 자한은 딸 자한아라와 함께 1666년까지 8년간 갇혀 지냈고, 창문 너머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했다. 1658년 7월, 아우랑제브는 델리에서 "알람기르 1세"로 즉위하며 황제가 되었다. 다라는 1659년 펀자브에서 붙잡혀 참수되었고, 샤 슈자는 아라칸(오늘날 미얀마)으로 도망쳤다가 1660년 실종되었다.
아우랑제브 통치와 아크바르의 반란 (1681년)
아우랑제브의 통치는 무굴 제국의 영토를 최대(약 400만 평방킬로미터)로 확장했지만, 내부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이슬람 정통주의를 강화하며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지자야(비무슬림 세금)를 부활시켰다. 이는 라지푸트와 마라타의 반발을 샀다. 1681년, 그의 넷째 아들 무함마드 아크바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크바르는 아버지의 종교 탄압과 데칸 전쟁에 반대하며, 마라타 왕국의 삼바지와 동맹을 맺었다.
아크바르는 약 2만 명의 병력을 모아 라자스탄에서 반란을 시작했다. 아우랑제브는 5만 명의 대군을 보내 맞섰다. 1681년 6월, 아지메르 근처 전투에서 아크바르는 패배했고, 데칸으로 후퇴했다. 삼바지의 지원을 받았지만, 1686년 아우랑제브의 지속적인 추격에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로 망명했다. 이 반란은 실패했지만, 아우랑제브가 데칸에서 마라타와 20년 이상 싸우게 만들며 제국의 재정과 군사력을 소진시켰다.
17세기 말의 균열과 지방 세력의 부상
아우랑제브의 강경 정책은 제국의 균열을 가속화했다. 1689년, 그는 마라타 지도자 삼바지를 붙잡아 처형했지만, 이는 마라타 반란을 더 격화시켰다. 시크교도들도 1699년 구루 고빈드 싱의 지도 아래 무장 단체(칼사)를 결성하며 저항했다. 지방 총독(나와브)과 토지 소유주(자민다르)는 점차 독립성을 키웠다. 예를 들어, 벵골의 나와브 무르시드 쿨리 칸은 17세기 말부터 중앙에 세금을 보내지 않고 자치 세력을 구축했다.
군사적 세부 묘사: 무굴 군대의 전술과 장비
- 코끼리 부대: 무굴 군대의 상징으로, 사무가르 전투에서 다라가 사용했다. 코끼리는 등에 하우다(탑)를 얹고, 창병과 궁수를 태웠다. 최대 10미터 높이에서 적을 짓밟았지만, 포격에 취약했다.
- 기병: 아우랑제브의 주력으로, 페르시아산 말에 탄 기병은 샴쉬르(곡선 검)와 방패로 무장했다. 속도와 기동성이 뛰어났다.
- 포병: 포르투갈과 오스만 기술을 도입한 대포는 사무가르에서 결정적이었다. 구경 6~12파운드의 청동 대포가 주로 사용되었다.
- 보병: 징집병과 용병으로 구성된 보병은 창, 검, 초기 화승총(마치락)을 들었다. 사무라이처럼 조직화되지는 않았지만 숫적으로 우세했다.
내전의 여파와 17세기의 유산
17세기 무굴 내전은 제국의 전성기를 끝냈다. 아우랑제브의 승리는 단기적 안정을 가져왔지만, 그의 종교 정책과 끝없는 전쟁은 제국을 약화시켰다. 1707년 그의 죽음 이후, 후계 다툼은 더 빈번해졌고, 18세기에는 마라타, 시크, 영국 동인도 회사가 제국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인도의 왕좌 다툼"은 무굴 제국의 화려한 궁전과 피로 물든 전장을 동시에 남겼다. 이 내전은 인도 아대륙의 정치적, 종교적 지형을 재편하며, 제국의 쇠락과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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