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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의 칼싸움 (15세기 말)

by modeoflife 2025. 4. 5.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의 칼싸움 (15세기 말)

15세기 말, 일본은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전국 시대)라는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이 시대는 중앙 권력이 붕괴하며 지방 다이묘(大名)들이 서로의 영토와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운 시기로,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종 승리까지 약 150년간 이어졌다. "센고쿠"는 "전쟁의 나라"를 뜻하며, 특히 15세기 말(1490년대~1500년대 초)은 오닌의 난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 다이묘들이 칼을 뽑아 들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칼싸움"이 본격화된 초기 단계였다. 이 시기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 무력해지고, 천황은 상징으로 전락한 가운데, 지방 영주들이 사무라이와 농민 군대를 이끌고 피로 얼룩진 전투를 벌였다. 이 혼란 속에서 다이묘들의 야망과 배신, 사무라이의 충성심이 얽히며 일본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씨앗이 뿌려졌다.

센고쿠 시대의 기원: 오닌의 난과 권력의 붕괴

센고쿠 시대의 발단은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년)이었다. 이 내전은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요시마사의 아내 히노 도미코는 아들 요시히사를 지지했고, 그의 동생 요시미를 지지하는 호소카와 가츠모토(細川勝元)와 요시미를 배신한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이 대립했다. 이 갈등은 두 거대 다이묘 가문—호소카와(동군)와 야마나(서군)—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약 15만 명의 병력이 교토를 전장으로 삼아 10년간 싸웠다. 교토는 불타고 폐허가 되었으며,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오닌의 난이 끝난 1477년에도 평화는 오지 않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전쟁은 지방 다이묘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쇼군 요시마사는 예술과 문화에 몰두하며 통치에 무관심했고, 그의 후계자들은 권력을 잡지 못했다. 중앙의 공백 속에서 다이묘들은 독립적인 군벌로 변모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은 약 200~300개의 소규모 세력으로 나뉘었고, 각 다이묘는 성을 쌓고 병력을 모아 이웃을 공격했다. "게코쿠조(下克上)"—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쓰러뜨리는 현상—가 사회를 뒤흔들며, 충성보다 야망이 지배적인 가치가 되었다.

15세기 말의 다이묘들: 초기 칼싸움의 주역

15세기 말, 일본 전역에서 다이묘들이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원래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 관리(슈고)나 토지 소유주였으나, 혼란을 틈타 독립적인 군사력을 구축했다. 이 시기 다이묘들은 아직 전국을 통일할 힘은 없었지만, 지역 패권을 놓고 치열한 칼싸움을 벌였다. 주요 인물과 그들의 초기 충돌을 살펴보자.

1. 호조 소운(北条早雲): 간토의 신흥 세력

호조 소운(1456~1519)은 센고쿠 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게코쿠조" 인물이다. 그는 원래 이세 가문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 본명은 이세 소즈이였다. 1491년, 그는 이즈(오늘날 시즈오카현)의 슈고 아시카가 차차마루와의 분쟁에 개입했다. 차차마루가 폭정을 일삼자, 소운은 이를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이즈를 점령했다. 1494년, 그는 이즈의 오다와라 성을 거점으로 삼아 호조 가문을 세웠다. 그의 군대는 약 2천 명으로, 사무라이와 아시가루로 구성되었다. 소운은 전투뿐 아니라 외교에도 능해 이웃 다이묘들과 동맹을 맺으며 세력을 키웠다. 그의 칼싸움은 이후 호조 가문이 간토를 지배하는 기반이 되었다.

2. 시마즈 다다히사(島津忠久): 큐슈의 패자

큐슈 남부에서는 시마즈 가문이 두각을 나타냈다. 시마즈 다다히사(1476~1519)는 15세기 말 사츠마(오늘날 가고시마현)를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490년대, 그는 이웃 다이묘인 이토 가문과 충돌했다. 이토 요시스케와의 전투에서 시마즈는 약 3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이토의 성을 포위했다. 그의 군대는 산악 지형을 활용한 기습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사츠마를 넘어 오스미와 휴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 칼싸움은 큐슈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초기 경쟁의 시작이었다.

3.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 간토의 방어자

간토 지역에서는 우에스기 가문이 호조 소운과 대립했다. 우에스기 노리마사(1470년대 활동)는 15세기 말 호조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1498년경, 호조 소운이 사가미(오늘날 가나가와현)를 공격하자, 노리마사는 약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방어에 나섰다. 이 전투는 소규모 충돌의 연속이었지만, 이후 우에스기 켄신과 다케다 신겐의 대결로 이어지는 간토 지역 다툼의 전조였다.

전쟁의 세부 양상: 칼과 창의 춤

15세기 말 센고쿠 시대의 전쟁은 대규모 군대보다는 소규모 부대 간의 충돌이 주를 이뤘다. 다이묘들은 사무라이와 아시가루를 중심으로 군대를 구성했다.

- 사무라이: 이 시기 사무라이는 주군에 충성하는 전사로, 약 10~20%가 말을 타고 싸웠다. 그들의 주요 무기는 긴 창(야리), 활(유미), 그리고 카타나였다. 카타나는 백병전에서 사무라이의 영혼을 상징했으며, 적의 갑옷을 뚫는 날카로운 곡선형 날이 특징이었다. 예를 들어, 호조 소운의 부하들은 이즈 전투에서 카타나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 아시가루: 농민 출신 보병은 다이묘 군대의 주력이었다. 그들은 긴 창과 간단한 대나무 갑옷으로 무장했고, 숫적 우위를 제공했다. 1490년대 오우치 가문의 야마나카 성 전투에서 아시가루는 적의 목책을 뚫으며 승리를 이끌었다.

전술은 지형과 기습에 의존했다. 다이묘들은 산과 숲을 활용해 매복을 준비했고, 성을 방어 거점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시마즈 다다히사는 사츠마의 산악 지형에서 적을 유인한 뒤 측면 공격으로 제압했다. 성 공략은 흔했지만, 이 시기 성은 목재로 지어져 화공에 취약했다. 화살에 불을 붙여 성문을 태우는 전술이 자주 사용되었다.

무기는 주로 냉병기였으나, 15세기 말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화약 무기(테포)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1490년대에는 아직 실전 배치가 드물었지만, 큐슈의 다이묘들이 이를 실험적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칼과 창이 여전히 전장의 주인공이었다.

주요 전투와 사건

1. 이즈 점령 (1494년)  

호조 소운은 이즈의 오다와라 성을 점령하며 다이묘로 떠올랐다. 그는 약 1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밤에 기습을 감행했다. 아시카가 차차마루의 수비군은 잠에서 깨어나 싸웠지만, 소운의 부하들이 성문에 불을 지르며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이 전투는 약 3일간 이어졌고, 소운은 승리 후 이즈를 기반으로 간토로 세력을 확장했다.

2. 사가미 충돌 (1498년경)  

호조 소운과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전투는 간토의 패권을 건 초기 칼싸움이었다. 사가미의 강변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우에스기는 약 4천 명, 호조는 2천 명을 동원했다. 우에스기의 사무라이들은 강을 건너 공격했지만, 호조의 매복 부대가 측면을 쳤다. 전투는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으며 끝났고, 이후 간토는 계속된 분쟁의 중심이 되었다.

3. 사츠마 통일 전투 (1490년대)  

시마즈 다다히사는 이토 가문과의 전투에서 사츠마를 통일했다. 그는 약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토 요시스케의 성을 포위했다. 이토의 수비군은 약 1천 명으로 저항했지만, 시마즈의 아시가루가 성벽을 기어오르며 돌파했다. 전투는 이틀간 이어졌고, 이토는 패배 후 항복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

15세기 말 다이묘의 칼싸움은 일본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농민들은 전쟁에 징집되어 고통받았고, 마을은 약탈당했다. 전투 후 다이묘들은 승리한 사무라이에게 토지를 나눠주며 충성심을 보상했다. 이로 인해 사무라이 계급은 점차 명예와 충성을 중시하는 집단으로 발전했다. "부시도"의 초기 형태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 다이묘들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상업을 장려했고, 시장과 항구가 발달했다. 예를 들어, 오우치 가문은 야마구치 지역에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빈부 격차는 커졌고, 농민 반란(잇키)이 늘어났다. 종교 세력도 전쟁에 뛰어들었다. 잇코 잇키(일향종 신자들)는 다이묘에 맞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16세기까지 이어졌다.

15세기 말의 의미와 전개

15세기 말의 칼싸움은 센고쿠 시대의 기초를 닦았다. 이 시기 다이묘들은 지역 패권을 장악했지만, 전국 통일의 꿈은 아직 멀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거물 다이묘의 등장을 위한 토양을 만들었다. 16세기로 접어들며 철포와 대규모 군대가 전쟁을 바꿨지만, 15세기 말의 칼과 창은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다이묘의 칼싸움은 생존과 권력을 건 투쟁이었다. 전장에서는 사무라이의 피가 흐르고, 농민의 땀이 섞였다. 이 혼란 속에서 일본은 무사 지배의 시대로 나아갔고, 센고쿠 시대는 일본사의 가장 격동적인 장을 열었다. 15세기 말은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역사의 서막을 알린 시기였다.

 

# 전쟁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