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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야망과 저항 (기원전 58~50년)

by modeoflife 2025. 4. 5.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야망과 저항 (기원전 58~50년)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무대를 찾았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북부 이탈리아)와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 너머 일부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42세, 이미 빚더미에 앉아 있었고, 원로원의 보수파는 그의 급성장을 경계했다. 삼두정치 동맹(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은 균열 조짐을 보였고, 카이사르는 군사적 승리와 부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로마의 권력 중심으로 올라서야 했다. 갈리아는 그에게 완벽한 기회였다. 로마의 북쪽 국경 너머, 끝없는 숲과 강, 그리고 분열된 켈트족 부족들이 있는 그 땅은 정복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갈리아인들은 단순한 야만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용맹했고, 그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8년간의 갈리아 전쟁은 카이사르의 천재성과 잔혹함, 그리고 갈리아의 불굴의 저항이 얽힌 피로 물든 서사시였다.

전쟁의 도화선: 헬베티족과 비브락테 전투

갈리아 전쟁의 첫 장은 헬베티족의 이동으로 열렸다. 스위스 고원에 살던 이 켈트족 부족은 기원전 58년경 인구 과다와 북쪽에서 밀려오는 게르만족(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압박을 피해 남쪽으로 이주하려 했다. 약 36만 명—전사, 여성, 아이, 노인을 포함한 거대한 무리—이 짐을 싣고 알프스를 넘으려 했다. 카이사르는 이를 로마의 동맹 부족인 에두이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는 원로원에 보고도 없이 즉시 군대를 소집했다. 그의 병력은 약 3만 명, 여섯 개 군단과 보조 부대였다. 로마군은 중무장 보병(레기온)과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철저한 훈련과 군율로 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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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브락테 전투(기원전 58년)는 에두이족 영토 근처에서 벌어졌다. 카이사르는 언덕 위에 진을 치고 헬베티족을 기다렸다. 헬베티족은 가족과 가축을 이끌며 느리게 이동했고, 그들의 전사들은 창과 방패로 무장한 채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로마군은 방패벽(테스투도)을 형성하며 적의 공격을 막았고, 필룸(투창)을 던져 헬베티족의 대형을 무너뜨렸다. 전투는 몇 시간 동안 치열하게 이어졌다. 헬베티족은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로마군의 조직력과 카이사르의 지휘는 그들을 압도했다. 카이사르는 측면에서 기병을 투입해 적을 포위했고, 결국 헬베티족은 패배했다. 약 10만 명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고, 살아남은 11만 명은 원래 살던 곳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이 승리는 카이사르에게 갈리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지만, 그의 잔혹함은 갈리아 부족들에게 로마의 진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북부 갈리아의 저항: 사비스 강 전투와 네르비족

첫 승리 후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부로 진격했다. 벨가에족과 네르비족, 아트레바테스족 등 북부 부족들은 로마의 침략에 맞서 연합했다. 이들은 헬베티족과 달리 기동성이 뛰어났고, 숲과 늪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에 능했다. 기원전 57년, 사비스 강(오늘날 벨기에 사브르 강으로 추정)에서 벌어진 전투는 카이사르의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로마군은 강을 건너 진영을 구축하던 중이었다.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천막을 세우고 있었고, 지휘관들은 방심한 상태였다. 이때 네르비족과 연합군 약 6만 명이 숲속에서 뛰쳐나와 기습을 감행했다.

네르비족 전사들은 맨발로 달려와 로마군을 덮쳤다. 그들의 창과 검이 로마 병사들을 찔렀고, 혼란 속에서 제10군단의 일부가 붕괴했다. 카이사르는 즉시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는 방패를 집어 들고 병사들 사이에 서서 "로마의 명예가 너희 손에 달렸다! 후퇴는 없다!"고 외쳤다. 그의 용기와 침착함은 군대를 재정비하게 했다. 로마군은 방패벽을 다시 세우고 반격에 나섰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네르비족은 패배했고,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약 1만 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그의 리더십은 병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갈리아인들이 결코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로마군의 보급선을 끊고, 기습으로 지치게 만들며 저항을 이어갔다.

분열과 정복: 카이사르의 외교와 공병술

카이사르는 무력만으로 갈리아를 정복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부족 간의 불신과 경쟁을 이용했다. 에두이족과 렘미족 같은 강력한 부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금화, 식량, 보호 약속으로 그들을 설득했고, 반대하는 부족에는 무자비한 보복을 가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56년 벤네티족(브르타뉴 지역 해양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카이사르는 그들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노예로 팔았다. 그러나 이 외교술은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기원전 53년, 동맹이었던 에두이족이 배신하며 로마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갈리아인의 변덕은 칼보다 더 위험하다"고 한탄했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은 공병술에서도 빛났다. 로마군은 갈리아의 험한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놀라운 속도로 다리와 도로를 건설했다. 기원전 55년,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족을 위협하기 위해 그는 10일 만에 400미터 길이의 목재 다리를 완성했다. 병사들은 하루 30~40킬로미터를 행군하며 진흙과 숲을 뚫었다. 이 과정에서 병사들은 지쳤고, 군량은 부족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현지에서 약탈을 허용하며 사기를 유지했다. 그의 군율은 엄격했지만, 병사들은 그를 따랐다. "카이사르가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어도 따라가겠다"는 말이 군대 내에서 돌았다.

알레시아 전투: 갈리아의 마지막 저항

기원전 52년, 갈리아의 운명을 건 대결이 펼쳐졌다. 아르베르니족의 젊은 지도자 베르킹게토릭스는 부족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는 약 8만 명의 전사를 이끌고 알레시아 요새(오늘날 프랑스 알리즈 생렌 근처)에 자리 잡았다. 베르킹게토릭스는 키 크고 강인한 전사로, 갈리아인들에게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는 로마군을 지치게 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약 5만 명의 군대(11개 군단과 보조 부대)를 이끌고 요새를 포위했다. 카이사르의 전략은 천재적이었다. 그는 요새를 둘러싼 18킬로미터 길이의 방벽(콘트라발라티오)을 쌓고, 외부 구원군을 막기 위해 21킬로미터 길이의 외곽 방벽(시쿰발라티오)을 추가로 건설했다. 방벽에는 참호, 목재 탑, 함정이 설치되었다.

알레시아 안에서는 식량이 떨어졌다. 베르킹게토릭스는 여성, 아이, 노인을 요새 밖으로 내보냈지만, 카이사르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방벽 사이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갔다. 곧 갈리아 구원군 약 25만 명이 도착했다. 에두이족, 아르베르니족, 기타 연합 부족으로 구성된 이 군대는 방벽을 뚫으려 했다. 전투는 며칠간 이어졌다. 갈리아 전사들은 사다리를 타고 방벽을 넘으려 했고, 로마군은 화살, 투석기, 끓는 기름으로 응전했다. 카이사르는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결정적인 순간, 로마 기병(게르만족 용병 포함)이 구원군의 후방을 쳤고,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 베르킹게토릭스는 요새 안에서 돌격을 시도했지만, 로마군의 방어는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베르킹게토릭스는 항복했다. 그는 백마를 타고 카이사르 앞에 나타나 무기와 망토를 내려놓았다. "내 백성을 살려달라"는 그의 말은 기록에 남았지만, 카이사르는 냉정했다. 베르킹게토릭스는 로마로 끌려가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목이 잘리는 순간, 갈리아의 저항도 끝났다.

전쟁의 종말과 여운

기원전 50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역을 평정했다. 약 100만 명이 죽고, 그만큼이 노예로 팔렸다. 그는 금, 은, 노예로 가득 찬 전리품을 로마로 가져왔다. 그의 정치적 입지는 철옹성처럼 굳건해졌고, 병사들은 그를 신처럼 숭배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갈리아인들에게 재앙이었다. 그들의 부족 문화는 로마화되었고, 언어와 전통은 점차 사라졌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나는 왔고, 보았고, 이겼다(Veni, Vidi, Vici)"고 썼지만, 그 문장 뒤에는 피로 물든 갈리아의 들판과 잊혀진 전사들의 외침이 있었다.

이 전쟁은 로마 내전의 씨앗을 뿌렸다. 카이사르의 성공을 시기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그를 적으로 돌렸고, 기원전 49년 그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운명을 걸었다. 갈리아 전쟁은 한 사람의 야망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또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베르킹게토릭스의 마지막 저항, 카이사르의 냉혹한 결정, 그리고 병사들의 피땀은 오늘날까지 전쟁의 본질을 묻는 이야기로 남았다.

 

# 전쟁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