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내전, 제국의 운명을 건 권력 다툼 (기원전 49~31년)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로마 공화국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손에는 충성스러운 군대와 막대한 전리품이 있었지만, 로마 원로원은 그를 두려워했다. 삼두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는 크라수스의 죽음(기원전 53년)으로 이미 흔들렸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 카이사르를 견제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1월 10일, 그는 약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 작은 강은 갈리아 키살피나와 이탈리아 본토의 경계였다. 군대를 이끌고 이 경계를 넘는 것은 공화국의 법을 어기는 반역 행위였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는 그의 말은 로마 내전의 시작을 알렸다. 이 싸움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까지 18년간 이어졌고, 공화국의 몰락과 제국의 탄생을 결정지었다.
루비콘 강 도하와 초기 전투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는 계산된 도박이었다. 그의 군대는 갈리아에서 단련된 제10군단을 포함한 정예 부대였지만, 숫자는 적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원을 받아 로마와 동맹 속주에서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빠르게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로마로 진군하는 길에 도시들은 저항 없이 문을 열었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허를 찔렸고, 로마를 버리고 그리스로 후퇴했다. 카이사르는 추격을 망설이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그는 스페인의 폼페이우스 지지 세력을 먼저 제거했다. 문다 전투에서 그는 적의 저항을 꺾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독재관(Dictator)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48년, 결정적인 대결이 그리스에서 펼쳐졌다.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운명을 가른 전투였다. 폼페이우스는 약 4만 명의 보병과 7천 명의 기병을 이끌었고, 원로원의 주요 인물들이 그의 진영에 있었다. 카이사르는 약 2만 명의 보병과 1천 명의 기병으로 맞섰다. 폼페이우스는 기병으로 측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예측했다. 그는 보병 일부를 창병으로 재배치해 기병을 막았고, 적의 대형이 무너지자 전군을 돌격시켰다. 전투는 하루 만에 끝났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궤멸했고, 약 6천 명이 죽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신하들에게 배신당해 암살되었다. 그의 잘린 머리가 카이사르에게 보내졌을 때,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리며 "이건 로마인의 죽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파르살루스의 승리로 카이사르는 로마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의 적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카이사르의 통치와 암살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권력을 굳혔다. 그는 연속으로 독재관에 임명되었고, 기원전 44년에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 되었다. 그의 개혁은 급진적이었다. 토지를 몰수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율리우스력을 도입해 달력을 정비했다. 원로원은 그의 뜻대로 재편되었고, 그는 신격화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공화국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고, 카이사르의 왕 같은 행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드스),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서 암살되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포함한 60여 명의 음모자들이 그를 기다렸다. 회의 도중, 그들은 단검을 꺼내 그를 찔렀다. 23번의 칼에 찔린 그는 브루투스—그가 아들처럼 여겼던 인물—를 보며 "너도냐, 브루투스?(Et tu, Brute?)"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체는 회의장 바닥에 쓰러졌고, 피가 대리석을 물들였다. 암살자들은 "공화국을 구했다"고 외쳤지만, 그들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로마를 더 큰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제2차 삼두정치와 필리피 전투
카이사르의 유언은 그의 조카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시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달려와 유산과 군대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카이사르의 오른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손잡았다. 기원전 43년, 이들은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그들의 첫 목표는 암살범 처단이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 속주에서 군대를 모았고, 삼두정치는 로마에서 반대파를 숙청했다. 약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천 명의 기사가 처형되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마케도니아)에서 두 세력이 충돌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약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도 비슷한 규모의 군대를 동원했다. 전투는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다. 첫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진영을 무너뜨렸고, 카시우스는 패배를 오인해 자살했다. 3주 뒤 두 번째 전투에서 브루투스도 패배했고, 그는 부하에게 자신을 찌르라 명하며 생을 마감했다. 이 승리로 삼두정치는 로마를 분할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이집트 포함),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이탈리아),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맡았다. 그러나 이 동맹은 불안정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기반을 다졌고,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깊게 맺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몰락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을 낳았고, 안토니우스와의 연합을 통해 로마에 맞서려 했다. 기원전 37년,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고, 그녀의 자식들에게 로마 속주를 나눠주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빌미를 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배신자로 몰며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그 문서에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재산을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죽으면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길 원한다고 밝혔다. 로마인들은 분노했고,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그리스 서부)이 벌어졌다.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은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지휘했고, 약 400척의 경량 전함(리베르누스)을 동원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500척(대형 퀸퀴레메 포함)을 이끌었지만, 함선은 무겁고 기동성이 떨어졌다. 전투 초반, 양측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함대를 이끌고 후퇴하자, 안토니우스도 그녀를 따라 도망쳤다. 그의 부하들은 배신감에 사로잡혔고, 함대는 붕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듬해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칼로 자신을 찔렀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들의 죽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다.
제국의 탄생과 내전의 여운
악티움의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기원전 27년,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그는 공화국의 형식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손에 집중되었다. 내전은 로마를 황폐화시켰다. 수십만 명이 죽었고, 속주는 약탈당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를 재편하고, Pax Romana(로마의 평화)라는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그의 통치 아래 로마는 재건되었고, 제국은 2세기 이상 번영했다.
이 내전은 개인의 야망과 충성, 배신이 얽힌 서사였다. 카이사르는 공화국을 무너뜨렸고, 그의 암살은 더 큰 싸움을 낳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사랑과 권력을 쫓다 몰락했고, 옥타비아누스는 냉혹한 계산으로 승리했다. 병사들의 피, 원로원의 음모, 그리고 민중의 환호 속에서 로마는 제국으로 거듭났다. 이 싸움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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