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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주석과 교리화 과정에서의 명제화

by modeoflife 2025. 3. 30.

 

교회가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라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 같은 교리를 확립해 온 이야기를 살펴보면, 어느 날 갑자기 신비로운 하늘 문이 열려서 한 줄 “계시”가 떨어졌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사실은 성경이라는 방대한 텍스트를 초대 교회부터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까지 오랜 세월 주석하고, 그 주석의 결론을 교회 공동체가 토론·합의·정리한 끝에 비로소 교리(명제)를 형성해 온 것이지요. 왜냐하면 “나는 삼위일체다”라고 직접 표기된 본문은 성경 어디에도 없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다”라는 문장도 구절 그대로 찾긴 어렵거든요.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그 결론에 도달했을까요? 바로 역사적 주석 전통이 교리화의 필수 조건이었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1) 초대 교회·중세·종교개혁 시기 교리 성립의 해석학적 배경

 

초대 교회 시절을 떠올려 보면, 성경 읽기가 지금처럼 신학 교과서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부들 사이에서도 해석 방식이 제각각이었는데, 누군가는 알레고리(비유·상징) 해석을 좋아하고, 또 다른 이는 문자적 의미를 중시했지요. 가령, 구약의 ‘지혜’(Sophia)나 ‘말씀’(Logos)을 두고 “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고,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암시하는 본문과 인성을 암시하는 본문을 각각 어떻게 종합할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바로 이런 다채로운 독법들이 누적되면서, “예수님은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시다” 등 교리 명제가 조금씩 생겨 난 토양이 된 것이지요.

 

 

중세에 이르면,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등을 적극 받아들이며 주석 방식을 체계화합니다. “사중적 해석 방법(quadriga)”—문자적, 우화적, 도덕적, 영적—으로 성경을 해설하고, 교부들의 글과 철학적 논리를 합쳐 교리를 더욱 정교화했지요. 가령, 삼위일체 관련 본문이 있을 때, 그냥 “이건 이렇게 믿는다”고 못 박는 대신, ‘문자적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있고, 우화적으로는 어떤 해석이 가능하며, 도덕적·영적으론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나눠 살펴보게 됩니다. 이런 전통이 종교개혁 시기까지 이어져, 루터나 칼뱅 같은 인물들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강력히 외치게 된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톨릭교회가 부가한 해석이나 권위를 대거 재점검하되, 본문 자체를 다시 읽어 보자는 취지를 내세웠으니까요.

 

루터와 칼뱅이 막대한 분량의 성경 주석서를 남기고, 설교 중에 성경 구절 하나하나를 근거 삼아 교리적 결론을 이끌어 내려 했던 것도, 사실상 “성경 본문을 교리화”하는 작업에 큰 기여를 한 셈입니다. “이 교리 문장이 과연 어느 본문에 뿌리를 두고, 어떻게 논리적 일관성을 확보하느냐”가 중요했으니까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는 온전한 하나님, 온전한 인간”이라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배경에는, 성경 본문을 수없이 묵상·토론하며, 그 교리와 본문의 상호 관련을 꼼꼼히 살핀 교회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지요.

 

교리 명제가 단숨에 뚝딱 생겨난 ‘초자연적 선포’가 아니라, 길고 풍부한 주석과 해석의 역사를 통해 추출·합의된 결과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 과정에서 갈등도 많았고, 공의회나 교부들의 글에 서로 다른 해석이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바로 그 주석 역사 속에서,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며 공동체가 일치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하고, 한두 줄의 교리 문장으로 선언했지요. 그래서 교리가 단순 암기 덩어리가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는 오랜 전통의 결정체”임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상징적·비유적 텍스트를 명제로 환원하는 위험과 유익

 

성경을 읽다 보면, 한두 줄에 “이건 이렇게 믿는다”라고 바로 요약하기 어려운 문장들이 수없이 나타납니다. 시편이나 예수님의 비유, 요한계시록처럼 상징과 비유가 가득한 본문들이 대표적이지요. 이런 텍스트를 교리 문장, 즉 명제로 곧장 환원하려다 보면, 그 풍부한 이미지와 다층적 의미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이를 단순히 “예수님은 떡이시다!” 식으로 곧장 교리화하면 어딘가 어색해 보입니다. 사실 그 문장에는 우리가 곰곰이 곱씹어야 할 다양한 함의가 깃들어 있거든요. “떡”은 일상적 양식을 상징하기도 하고, “생명”은 단순한 육체 생존을 넘어 영원한 생명까지 아우릅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이 문장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영적 양식이 되신다는 뜻”이라고 너무 단순화해 버리면, 깊은 상징성이나 본문의 문학적 터치가 생략되고, 교인들은 예수님이 가진 다채로운 의미 중 일부분만 접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유나 상징을 전혀 교리화하지 않고, “그냥 아름다운 서정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없습니다. 시편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웅장함,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종말론적 희망 등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문장들이 의외로 교회가 신앙고백으로 삼아야 할 핵심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 같아서 자라난다”는 비유를 통해, 교회는 “하나님 나라는 작은 시작에서 엄청난 확장으로 이어진다”라는 교리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곧 교회가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고 고백하게끔 만듭니다.

 

상징·비유적 텍스트에서 교리를 추출해 낸다는 것은, 본문이 갖는 풍부한 층위와 해석자의 주관 사이의 줄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치우쳐도 문제가 생깁니다. 지나치게 “이건 이런 명제!”라고 환원해 버리면 텍스트의 시적·내면적 깊이를 놓치고, 반대로 “이건 단지 은유일 뿐”이라고만 한정해 버리면 교회가 그 본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신앙의 뼈대(교리)를 놓칠 수 있지요.

 

이렇게 보면, 상징적·비유적 텍스트를 명제로 끌어오는 일은 여러 면에서 위험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유익도 상당합니다. 교회가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이런 핵심 진실을 배우고 공유한다”고 간결하게 정리해 두면, 교인들은 빠르고 분명하게 그 진리를 인식하고 공동체 안에서 통일된 이해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양식”이라는 교리 명제가 대표적 예로,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생명의 떡” 이미지를 일관된 신앙교육이나 설교에서 활용할 수 있지요.

 

따라서 중요한 건, 명제화 과정에서 본문의 다차원적 의미를 적절히 살리고, 너무 구체적으로 축소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태도일 겁니다. “상징은 상징으로 남겨 두면서도, 그 핵심 교훈을 교리 문장으로 요약해 본다”는 식의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런 면에서, 교회가 전승해 온 해석학적 지혜와 학자들의 주석이 큰 역할을 합니다. 한 문장 교리를 뽑아낸 뒤에도, 그 문장이 본문의 풍성함을 온전히 대변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하니까요.

 

결론적으로, 비유나 상징을 명제화한다는 건 긴장 어린 작업입니다. “풍부함” vs. “명확함”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고, 교회의 공동 신앙에 꼭 필요한 확실성을 주면서도, 텍스트가 보여 주는 다채로운 의미의 스펙트럼을 온전히 해칠지 않을 정도로만 간추리는 작업이니까요. 이 균형이 잘 잡힌다면, 교회는 상징 텍스트 속 깊은 본문의 세계를 잃지 않으면서도, 간결하고 공유 가능한 교리 진술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비평적 성서학(역사비평·문학비평 등)과 명제 해석의 긴장

 

19세기 이후,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이나 문학비평 같은 새로운 학문적 접근이 성서 연구에 도입되면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 본문은 이런 교리를 증언한다”라고 믿어 온 해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예컨대, 한 복음서가 특정 공동체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해 편집되고 구성되었다고 본다면, 교회가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신성을 곧바로 증언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것이 정말 본문의 원 의도였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역사비평은 “성경이 어떤 역사적 배경, 편집 과정, 공동체적 상황을 거쳐 지금의 형태가 되었는가?”를 탐색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나 성육신 등 교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삼았던 본문을 다시금 조사해 보면, 그 교리적 결론이 과연 성경 저자가 본래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후대 교회가 신학적 필요에 따라 덧입힌 해석인지 재평가가 가능해집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명제적 해석”으로 확립된 전통 교리가 흔들리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지요.

 

반면, 교회(특히 보수·복음주의 진영) 측에서는 “비평적 방법이 지나친 회의주의로 흐르면서, 본문의 영적 메시지와 진정성을 훼손하거나 가려 버리는 건 위험하다”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단순히 ‘편집된 인문학 텍스트’로만 취급하면, 그 안에 담긴 구원의 메시지나 하나님의 계시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명제 중심의 교리 해석과 비평적 성서학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이 존재합니다. 명제 해석 쪽에서는 “교회가 지닌 정통 교리를 흔들지 않고, 본문이 그 교리를 증언한다”고 보지만, 역사비평·문학비평 쪽에서는 “원 텍스트가 지닌 맥락과 편집 사정을 제대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학계는 이 양측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해석학적 프레임워크를 고민 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긴장 관계는 교회가 교리화를 통해 얻은 유익(정통 신앙을 공통언어로 유지하고, 이단을 배격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등)과, 텍스트가 가진 역사적·문학적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요구가 부딪히는 지점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리가 본문을 과도하게 ‘자기 입맛대로’ 읽지 않도록 경계하면서도, 교회가 공동체적 신앙 고백을 잃지 않으려면 어떠한 절충과 토론이 필요한지, 오늘날에도 관심과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교회 전통에서 성경 본문은 비유·묵시·서신 등 다양한 장르로 되어 있는데, 이를 교리로 환원하는 작업은 언제나 이점과 위험이 공존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처럼 예수님이 사용한 비유를 곧장 명제화해 “예수님은 포도나무다”라고 치환한다면, 과연 그 말이 성경 본문이 주려는 풍부한 이미지를 다 담아 낼 수 있을까요?

- 현대 학문(비평학) 덕분에 본문의 역사·문학적 맥락을 더 깊이 알게 되었지만, 교회가 지켜 온 교리 명제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 교회 현장에서 설교나 성경 공부 시, 구절 하나하나에 “이건 이런 교리를 증명한다”라고 지나치게 연결 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균형 있게 조정할 수 있을까요?

- 성경은 해석학적으로 매우 다채로운 의미를 함축하지만, 교회는 보통 하나의 교리적 결론(명제)에 합의하려고 합니다. 이 다의적 텍스트와 일관된 교리 사이의 긴장을 어디서 해결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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