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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화의 이점과 제한

by modeoflife 2025. 3. 30.

 

“우리는 삼위일체를 믿는다”라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인간이시다” 같은 한두 줄 교리 문장을 떠올리면, 교회가 지닌 핵심 신앙 고백들이 대부분 명제 형태로 정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명제화를 통해 교회는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어디까지가 정통이고 어디부터는 이단인지 경계를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을 얻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분명히 한 문장으로 정리하려다 보면, 성경 본문이 지닌 다양하고 다층적인 의미가 단순화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오지요. 특히 현대 해석학이 강조하는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 개념에 따르면, 해석자는 본문을 읽으면서 이미 가진 교리적 전제나 전통에 영향을 받고, 그 해석이 다시 교리에 영향을 주는 식이므로, 명제가 절대적으로 고정된 상태일 수는 없다는 문제 제기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1) 교단·교회 내 공통 신앙고백의 확립과 경계 설정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가 교리(명제)를 체계화하고 이를 공식 고백문으로 삼는 일은 어찌 보면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시다”라는 진술이 없다면, 교회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지 애매모호할 테니까요. 특히 초대 교회 시절처럼 이단 논쟁이 빈번하던 시기에는 “예수님은 피조물인가? 아니면 영원전부터 하나님이신가?” 같은 질문이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때 공의회나 교부들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라는 한 줄 명제화로 정리해 주면, 교회가 “우리의 신앙은 이거다!”라고 빠르게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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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명제화가 이루어지면, 그 명제를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 간에 경계가 생깁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같은 고백을 공유하며 일치감을 누리고, 외부에서 가령 다른 문헌을 들고 와 “이것도 성경과 동등하게 신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도를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말씀”이라는 명제화를 이미 해 두었다면, 추가 문헌을 성경과 동급으로 추켜세우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듯 말이죠.

 

이처럼 교리 문장이 가지는 선명함은 공동체를 정의하고, 이단·오류를 배격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이건 맞고, 이건 틀리다”를 얼버무리지 않고 정리해서, 신앙공동체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잡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이 과정이 마치 무엇이든 표준 시험 답안처럼 되어 버리면, 성경이 본래 지닌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간과하거나, 교인들이 단순 암기로 그칠 위험이 높아진다는 우려도 동시에 나오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명제화는 교회 역사에서 “공통 신앙고백을 확립하고, 이단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대가로 유연함이 줄어들고, 본문이 가진 풍부한 뉘앙스가 생략될 가능성이 생긴다는 문제를 함께 안게 되었습니다.

 

(2) 다양성·다의적(多義的) 성경 텍스트의 단순화 문제

 

삼위일체, 성육신, 구원론 같은 교리 명제들은, 한두 줄로 간결히 요약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을 지닙니다. 교회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다”라고 선언해 주면, 신앙인들이 금방 핵심 진리를 붙잡고 일치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명제로 귀결”하는 과정에서, 성경 본문이 지닌 풍부한 상징과 이야기, 시적 운율이 과도하게 축소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한계시록이나 구약의 예언서·묵시문학을 떠올려 보세요. 이런 본문은 별, 짐승, 보좌, 일곱 인, 새 예루살렘 같은 수많은 이미지와 상징을 펼쳐 놓으며, 독자에게 상상력과 다층적 해석의 길을 열어 줍니다. 그 상징을 통해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폭넓게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런데 교회가 “이 묵시문학 구절은 곧바로 ‘종말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라는 교리 문장이다”라며 한두 줄 결론만 뽑아 버리면, 그 풍부한 시적·상징적 여운이 크게 잃어진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는 이렇게 봤다”고 해서, 그 외 다른 관점의 해석이 틀렸다고 단정 짓는 식이 될 수도 있고요.

 

물론, 교리 명제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한 방향으로 신앙고백을 확립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신앙의 핵심 포인트를 빨리 전수하는 데만큼 유효한 도구도 없으니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代贖)이다”라는 문장이 없었다면, 복음서의 수많은 장면과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기가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교리 명제는 이런 “핵심 요약” 기능을 맡아, 교회 생활과 교육을 수월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분명히 유익합니다.

 

그렇다면, 명제화 때문에 생기는 단순화 문제는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걸까요? 사실, 신앙 공동체는 이 딜레마를 이해하고, 대개는 명제와 텍스트를 함께 병행시키는 방식을 택해 왔습니다. 가령,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자 참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배우면서, 실제로 복음서 속 이야기(예: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예수님, 베다니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오병이어 기적)들을 폭넓게 묵상하고 해석하곤 하지요. 이런 식으로, 교리는 한두 줄 명제에 머무르지 않고, 성경 본문과 상호작용을 계속할 때 본래 의미를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명제화는 교회로 하여금 “복합적인 텍스트를 효과적으로 공유”하게 해 주는 편리한 도구이자, 동시에 자칫하면 텍스트의 다양한 함의를 너무 빨리 확정적 결론으로 만들어 버리는 ‘가위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이 위험을 인지하고, 교리 문장에 다 담기지 않는 본문의 잔여(殘餘)와 신비를 활짝 열어 두는 겸손한 태도를 지닌다면, 명제화의 유익과 텍스트의 다층성을 어느 정도 균형 있게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3)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 안에서의 명제의 유동성

 

성경을 해석하거나 교리를 이해할 때, 우리는 흔히 한 가지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읽고, 그 해석 결과에 따라 다시 신앙 지식을 보강하거나 교정해 나갑니다. 이런 과정을 현대 해석학은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이라 부르며, 간단히 말해 해석자는 결코 ‘백지 상태’로 본문 앞에 서지 않는다는 통찰을 강조합니다. 이미 교회가 제공한 교리나 명제, 개인이 가진 문화적·역사적 배경이 본문 해석에 스며들고, 그 해석이 또다시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순환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예컨대 과거에 어떤 교회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구절을 곧바로 명제화하여, “교회에서는 여성이 발언권이 없다”라고 규정해 두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와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 교회가 여성의 역할을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고, 이에 성경 본문의 맥락과 언어적 배경, 역사적 상황을 다시 세심히 살펴볼 계기가 생긴 거지요. 그 결과, 교회는 “바울이 특정 상황에서 특정 갈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 여성 일반을 예배에서 영원토록 침묵시키라는 보편적 명령은 아니었다”고 재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때 원래의 명제(“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 뉘앙스와 적용 범위가 상당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처럼 “명제”가 당시에는 절대적 진리처럼 보였어도, 본문에 대한 해석이 변하거나 공동체가 새 눈을 띄게 되면, 그 명제 자체도 재해석되고 수정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지요. 이 사실은 “우리가 가진 교리적 명제가 실제로는 유동적이고, 해석자와 공동체가 어떤 맥락에서 본문을 새롭게 읽느냐에 따라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만큼 교리가 완전히 굳어버린 돌덩이가 아니라, 본문을 성찰하고, 역사적 맥락과 공동체 경험을 더해 새롭게 조명될 수 있는 일종의 ‘의미 축적물’이라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현대 해석학이 교회에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명제 역시 해석학적 순환 안에서 유동적일 수 있다.” 즉,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핵심 교리는 여전히 성경과 전통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구체적 해설이나 뉘앙스가 상황과 문화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달리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교회가 교리를 다룰 때 “바로 이것이 절대 불변의 결론이다”라고 지나치게 단언하기보다, “이 교리가 참되다고 믿지만, 해석의 지평이 확장될 때 우리도 이 교리를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겸손한 태도를 요구합니다.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관점은 교회 공동체가 명제를 가질 때, 그것을 무조건 독단적으로 내세우기보다, “본문과 맥락, 공동체 경험” 사이의 왕래를 계속 열어 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게 할 때 교리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계속 살아 움직이며 본문과 대화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깊이 체화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교회의 공동 신앙을 위해, 짧은 교리 명제를 정리하고 공유하는 일은 분명 장점이 있지만, 그로 인해 성경 본문이 지닌 풍부한 의미가 훼손될 위험도 생기지 않을까요?

- “다양성”과 “일치” 사이에서, 교회는 교리 명제 하나를 내세워 통일성을 추구하면서도, 본문의 다의적 해석 가능성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야 할까요?

- 해석학적 순환 이론은 교리(명제)가 불변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과 시대 상황에 따라 갱신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교회는 이런 관점을 어떻게 실천해야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요?

- 교단이나 교회 내에서 “이 명제는 우리가 붙드는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과,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는 서로 상충될까요, 아니면 병행이 가능할까요?

-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도구로서 명제화는 큰 유익을 주지만, 동시에 남용되면 본문의 시·서사·상징성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이를 방지하려면 어떤 원칙을 세우면 좋을까요?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명제, 신학 그리고 신앙'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