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 개념과 계시관
칼 바르트(Karl Barth)가 제시한 계시론은, 말 그대로 “인간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사건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 핵심은 “계시가 인간 쪽 노력이나 합리적 탐구로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고 할 때도,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 한, 일방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바르트에게 계시란 그와 비슷합니다. 인간 편에서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그분에 대해 확실히 알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신다고 바르트는 믿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정보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보보다 더 큰, 인격적이고 살아 있는 만남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만남이 교리나 명제 형태로 ‘고정’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바르트의 대답은 “그건 뒤따르는 해설일 뿐, 결코 계시 자체를 전부 묶어 둘 수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같은 신앙 명제는 계시의 결과로서 확립될 수 있지만, 그 한 문장만으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지닌 광대함과 신비를 온전히 담아 낼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이 관점에서 볼 때, 바르트는 교리나 명제가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가 “삼위일체”나 “성육신”처럼 중요한 진리를 고백하고 가르치는 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계시가 항상 하나님 편에서 일으키는 일종의 ‘활동적 선포’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논리나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고, 우리가 교리적 문장으로 요약해서 갖추는 순간에도, 그 문장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신비가 계속해서 살아 움직인다고 보았지요.
바르트의 계시관은 “계시는 명제 형태로 고착될 수 없다”는 점을 강하게 상기시킵니다. 물론, 교회 내에서 교리가 요긴한 도구이긴 해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건 단순 정보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맞부딪히는 인격적 사건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핵심 메시지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교리·명제 정립에 치중해 온 교회 전통에 일정 부분 비판적인 동시에, 교리 자체가 완전히 무가치하다고 보지는 않는 독특한 균형을 유지합니다. 교회가 계시를 명제로만 환원해 안주할 때, 우리가 오히려 계시의 참다운 역동을 놓쳐 버리는 게 아닐까—바르트의 문제의식은 그런 지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2) 에밀 브룬너·불트만 등 실존주의 계열 신학의 비(非)명제적 계시관
칼 바르트가 “계시는 곧 하나님의 일방적·초월적 사건”임을 강조했다면, 에밀 브룬너(Emil Brunner)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등은 그 흐름을 잇되, 좀 더 ‘개인적·실존적 차원’에서 계시를 재해석하려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단순히 교리적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existence)이 뒤흔들리는 실존적 체험이라는 점을 부각했습니다.
가령 불트만을 예로 들어 볼까요? 그는 “성경 속 신화적 언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낯익었지만, 현대 독자에게는 거리감이 크게 느껴지므로, 이를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나 부활을 말 그대로 물리적·객관적 사실로 제시하기보다는, “이 사건이 내 내면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으로 초점을 바꾸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부활”을 ‘주검에서 다시 살아난 생물학적 기적’이라는 명제로 호소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절망 속 인간을 새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실존적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것이지요. 인간이 절망하고 방황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가는”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이 실존 깊숙이 일어난다는 해석입니다.
이런 관점은, 전통적인 교리가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객관적 사실”이라는 식의 명제로 규정해 온 것과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물리적·과학적 증명을 요구할 텐데, 그런 시도는 종종 교회가 약점만 드러내기 십상이니까요. 불트만은 그보다는 “부활”의 실존적 함의—곧, 인간이 불신앙에서 믿음으로 변화되고, 어둠에서 빛으로 초대되는 체험—을 강조하자는 겁니다. 교리 문장이나 명제 한 줄로 표현되는 외부적 사실이 아니라, 내 삶 한가운데서 경험되는 ‘만남’이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에밀 브룬너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시는 단순히 어떤 정보를 획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성립되는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점에서 바르트와 결이 닮아 있지만, 브룬너는 바르트보다 “인간의 응답”이나 “실존적 자각”에 좀 더 무게를 둔 편이지요. 그리하여 교회가 삼위일체니, 성육신이니 하는 교리 명제를 아무리 정돈해 놓아도, 그 명제 자체가 “계시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겁니다. 계시는 어디까지나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하나님-인간 관계로 체험되어야 할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물론, 전통적 교리 해설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이런 실존주의 경향에 대해 “그럼 교리 명제는 다 부차적인 것인가?”라고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역사적·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고 믿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보장되겠느냐?”라는 식의 신학적 반론이죠. 하지만 브룬너나 불트만은 “명제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게 내면의 변화이고, 그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계시를 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리가 불필요하다고 한 건 아니지만, 교리 명제가 전부를 대변할 수 없다는 걸 강조한 것이지요.
이 실존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은 “비(非)명제적 계시관”을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고백하는 교리 문장이 곧 계시 전부냐?”라는 예민한 질문을 교회에 던진 셈입니다. “계시”가 곧바로 교리 한 줄로 환원될 수 없는, 훨씬 더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명제 자체를 최종 진리로 삼는 태도를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 신학에서는 계시와 교리 명제 사이에 어떤 긴장을 유지하는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고, 이는 이후 교회가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전통 교리를 해설·교육할 때 더 폭넓은 해석(역사·문학·실존 등)을 고려하도록 이끈 결정적 동인이 되었습니다.
(3) 명제적 계시론의 의의와 한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히 “내적인 체험”이나 “신비로운 만남”만으로 전수될 수 있을까요? 많은 복음주의·보수 교단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는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데, 이를 흔히 명제적 계시론(propositional revelation)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성경과 교리라는 형태로 명료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를 통해 교회는 ‘무엇을 믿는가’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예수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라는 한 문장은, 초대 교회에서부터 교회가 겪은 수많은 논쟁과 전통을 통해 확고해진 결론입니다. 명제적 계시론자들은 이런 교리 문장이 바로 계시 자체라고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계시된 진리를 “온전히 담아 내는 언어적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이 명제를 기준 삼아 신앙을 교육하고 이단을 배격할 수 있으니, 공동체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말씀”이라는 진술을 명제로 확립하면, 그 범위 밖에 있는 문서를 ‘성경과 동일’하게 여기는 문제를 미연에 막을 수 있다는 식입니다.
이런 관점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가 공통분모를 유지하는 데 명제만큼 선명한 도구도 드물기 때문이죠. 교리 문장 하나가 있으면, 교인들은 “아, 우리가 믿는 건 이거구나!”라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상이나 이단이 들어올 때도, “이건 이 명제와 어긋나니 옳지 않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신앙의 알맹이를 간단히 공유하고 부정확한 이해를 정정하는 기능을, 교리적 명제가 확실히 해낼 수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명제적 계시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한두 줄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문제 의식이 대표적이지요.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에서 비롯되는 사건이고, 거기엔 수많은 감정·경험·관계가 어우러지는데, 이를 단숨에 교리 문장으로 환원하면 “지식”에 치우쳐 버릴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문장은 분명 옳고 귀하지만, 그것을 단순 정보로만 머릿속에 담아 둔다면, 예수님의 희생이 내 삶을 어떻게 뒤흔들고 변화시키는지는 흐릿해질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사람마다 신앙체험이 다르고, 성경 본문도 장르가 다양하니,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교리만을 강조하다 보면, 초월적 체험이나 풍성한 상징 언어가 담고 있는 깊이가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 있습니다. 교리 문장 하나를 “절대적 진리”로만 삼다 보면, 오히려 본문이 가진 다면성을 놓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지요. 그럼에도 “명제적 계시”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이들은 “만약 그러한 명제 정리가 없다면, 교회는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구별하기가 훨씬 어려워질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명제적 계시론은 교회가 시대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분명히 선언하며, 신앙공동체의 정체성과 순수성을 지키는 데 큰 몫을 해 왔습니다. 동시에, 신앙이 ‘지식화’되는 위험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겼지요. 즉, 짧은 문장 하나로 모든 계시의 신비를 다 담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도, 교회가 적절한 명제 정리를 통해 공동체의 고백을 선명히 전해 주는 역할은 결코 무시하기 힘든 가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개념은 교리 명제화와 어떤 긴장을 만들어 낼까요? “말씀”을 초월적 사건으로 보면서도 명제 형태를 갖추려 할 때,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질지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 에밀 브룬너나 불트만처럼 “계시는 실존적 변화 사건”이라고 말할 때, 교회가 전통적으로 고백해 온 신앙 명제(삼위일체, 성육신 등)는 어떤 지위를 가지게 될까요? 단순 해설에 머무는 걸까요, 아니면 더 깊이 있는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일까요?
- 명제적 계시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분명한 형태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떤 장점을 갖나요? 그 장점이 혹시 “관념적·추상적 신앙”에 빠질 위험과는 어떻게 맞부딪힐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 “계시”라는 단어는 교회에서 자주 쓰이지만,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인간이 그 계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제화가 계시를 분명히 표현해 주는 동시에, 계시가 지닌 신비를 왜곡하거나 제한하진 않을까요?
- 우리는 일상 언어에서 “하나님은 선하시다” 같은 명제를 쉽게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이 명제적 계시인가, 아니면 개인 체험과 공동체적 해석이 녹아 있는 발화(發話)일까요? 그리고 그 구분이 실제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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