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증: 도덕률이 불안을 일깨운다는 근거
지금까지 우리는 도덕률이 실재하며 초월적 근원을 암시함을 살펴봤습니다. 이번 명제에서는 도덕률이 우리에게 불안을 일깨운다고 주장하겠습니다. 도덕률은 단순히 규범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길 때 우리 마음에 불편함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친구와 함께 프로젝트를 하다가 공을 가로채 혼자 칭찬을 받았다고 해보세요. 처음엔 기뻤을지 몰라도, 곧 "내가 잘못했나?"라는 불안이 스며듭니다. 이 불안은 도덕률이 실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경고처럼 작용한다는 증거입니다.
도덕률이 불안을 일깨우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높은 기준 때문입니다. 길에서 배고픈 이를 보면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치면, "내가 무심했나?"라는 불편함이 남습니다. 이 불편함은 도덕률이 단순한 사회적 규칙이 아니라, 우리 양심에 깊이 새겨진 실체임을 보여줍니다. 도덕률은 우리가 편히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웁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이웃과 다투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질렀다고 해보세요. 나중에 "내가 너무했나?"라는 불안이 드는 건,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도덕률이 우리를 흔드는 겁니다.
이 불안은 도덕률의 초월적 성격과도 연결됩니다. 도덕률이 인간 내부에서만 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겨도 쉽게 떨쳐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회사에서 동료를 속이고 승진을 챙겨도, "이게 정당했나?"라는 불안이 밤잠을 설치게 합니다. 이는 도덕률이 인간을 넘어선 근원에서 왔기에,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를 명확히 합니다. 요한일서 3:20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니라"고 합니다. 도덕률은 하나님의 법으로서,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 더 큰 진실을 깨닫게 합니다.
도덕률이 일깨우는 불안은 우리를 성찰로 이끕니다. 우리가 도덕률을 어길 때 느끼는 불편함은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라,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도덕률은 불안을 통해 우리를 흔들며, 초월적 근원과의 관계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2. 반증: 도덕률은 불안을 일깨우지 않는다는 주장
도덕률이 불안을 일깨운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문명과 그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서 불안이 도덕률 때문이 아니라, 억압된 욕망의 결과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덕적 불안은 사회가 강요한 억제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를 설파하며, "불안을 없애려면 도덕적 규범을 무시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덕률이 불안을 일깨운다는 생각을 부정했습니다.
동양 철학에서도 반론이 나옵니다. 불교의 선종은 "마음이 고요하면 불안도 없다"며,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는 평화를 강조합니다. 유교의 순자는 『순자』에서 인간 본성이 악하다고 보며, 불안이 도덕률이 아니라 본성의 갈등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일상에서도 "불안은 도덕과 무관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남을 속여도 잘 먹고 잘 산다"며, 도덕률이 불안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들은 불안이 도덕률과 상관없는 개인적·심리적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3. 반증에 대한 반박: 도덕률이 불안을 일깨우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도덕률이 불안을 일깨우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프로이트의 "억압된 욕망" 이론은 우리가 도덕률을 어길 때 느끼는 특유의 불안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동료를 속이고 승진을 얻어도, "내가 정당했나?"라는 불안은 사회적 억압과 무관합니다. 아무도 모르고 처벌받지 않아도 불편함이 남는 건, 도덕률이 실재하며 우리 양심을 흔드는 겁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도 한계가 있습니다. 남을 속이고 즐거움을 추구해도, "내가 잘못했나?"라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도덕률이 쾌락을 넘어 우리를 붙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선종의 "고요한 마음"은 훌륭하지만, 도덕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길에서 배고픈 이를 지나치면 고요함을 유지해도 "도와줬어야 했나?"라는 불편함이 남습니다. 순자의 본성 악설도 부족합니다. 본성이 악하다면 불안을 느끼지 않아야 하지만, 우리는 "평화를 깨뜨렸다"는 도덕률을 어길 때 불안해합니다. "잘 먹고 잘 산다"는 일상적 주장은 더 약합니다. 속이고 잘 사는 듯한 사람도, 밤에 혼자 있을 때 "내가 옳았나?"라는 불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도덕률이 불안을 일깨운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창세기 3:10에서 아담은 죄를 짓고 "두려워서 숨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도덕률이 하나님의 실체로서 우리를 흔드는 증거입니다. 도덕률은 불안을 일깨웁니다. 이는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초월적 법칙의 작용입니다.
4. 실천: 도덕률이 일깨우는 불안을 탐구하는 방법
도덕률이 일깨우는 불안을 깨닫고 다루는 삶을 실천해보세요.
- 말씀 묵상: 매일 15분 동안 요한일서 3:20—“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때라도”—를 읽고, “오늘 내가 도덕률을 어기고 불안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동료에게 공을 돌리지 않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를 묵상해보세요.
- 일상 관찰: 하루 동안 불안이 생긴 순간을 기록해보세요. "이웃과 다투고 불안했다", "배고픈 이를 지나치고 불편했다" 등을 적고, “이 불안이 도덕률에서 왔나?”를 고민해보세요.
- 작은 행동: 도덕률을 따르며 불안을 줄여보세요. 친구에게 공을 돌리거나, 배고픈 이를 도우며, “불안이 줄어드나? 어떤 평화가 오나?”를 느껴보세요. 하루 끝에 기록하고 반성해보세요.
결론
도덕률은 불안을 일깨웁니다. 이는 우리를 흔들어 더 큰 진실과 하나님께로 이끄는 실체입니다.
# 명제로 풀어보는 순전한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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