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증: 도덕률에 대한 반론이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근거
앞서 우리는 인간이 도덕률을 느낀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도덕률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도덕률은 본능일 뿐이다"거나 "사회가 만든 관습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명제에서는 이런 반론들이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도덕률이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는 점부터 논해보죠. 시장에서 상인이 저울을 속이면 "그건 부당하다"고 느끼는 건 본능일까요? 배고프면 밥을 먹고 싶어 하는 건 본능입니다. 춥게 느껴지면 따뜻한 곳으로 가려는 것도 본능이죠. 하지만 도덕률은 다릅니다. 누군가 새치기를 하면 "공정해야 한다"는 기준이 우리 마음에서 튀어나옵니다. 이건 생존 본능과 달리, "해야 한다"는 규범을 제시합니다.
본능과 도덕률의 차이를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본능은 보통 하나를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무서우면 도망가고 싶죠. 하지만 도덕률은 종종 본능과 충돌합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넘어진 노인을 보면 "도와줘야 한다"는 도덕률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비가 와서 옷이 젖을까 봐 망설여진다면, 그건 본능입니다. 여기서 도덕률은 본능을 억누르고 "도와주는 게 맞다"고 우리를 이끕니다. 만약 도덕률이 본능이라면, 왜 본능과 싸울까요? 이는 도덕률이 본능 이상의 무언가임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반론은 "도덕률은 사회적 관습이다"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건 도덕률의 보편성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조선 시대에 약속을 어기면 "신뢰를 잃는다"고 여겼고, 고대 로마에서도 도둑질을 금지했습니다. 현대 서울의 직장인도 동료가 책임을 회피하면 "무책임하다"고 느낍니다. 문화마다 겉모습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선 손으로 밥을 먹고, 다른 곳에선 젓가락을 쓰죠. 하지만 "정직해야 한다"는 도덕률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일관됩니다. 사회적 관습이라면 왜 이렇게 보편적일까요? 성경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로마서 2:14-15는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니 그들의 양심이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도덕률은 사회가 만든 게 아니라, 인간 본성에 새겨진 것입니다.
이 반론들이 타당하지 않은 이유는 변명과 불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친구가 "버스가 늦어서 약속을 못 지켰어"라고 변명하면, 그는 "약속을 지키는 게 맞다"는 도덕률을 이미 느낀 겁니다. 본능이나 관습이라면 변명할 필요도, 불안할 이유도 없습니다. 도덕률에 대한 반론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2. 반증: 도덕률에 대한 반론이 타당하다는 주장
도덕률에 대한 반론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첫째, "도덕률은 본능이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생존과 번식을 위한 본능의 결과라고 했습니다. 그는 "남을 돕는 건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전략"이라며, 도덕률이 본능의 변형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둘째, "도덕률은 사회적 관습이다"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사모아에서의 성장』(Coming of Age in Samoa)에서 도덕이 문화마다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사모아에서는 성적 자유가 도덕적이라며, 보편적 도덕률은 없다고 봤습니다.
현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에서 도덕률이 권력의 도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옳고 그름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허구"라고 주장했습니다. 일상에서도 "도덕은 개인마다 다르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새치기가 나쁘다"고 느끼지만, 다른 이는 "빨리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도덕률이 본능이거나, 사회적·개인적 조건의 산물이라며, 반론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3. 반증에 대한 반박: 도덕률에 대한 반론의 타당성은 설득력이 없다
이 반론들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먼저, "도덕률은 본능이다"라는 주장을 보죠. 도킨스는 도움을 주는 행동이 생존 본능이라고 하지만, 이는 도덕률의 갈등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길에서 넘어진 노인을 돕는 건 생존과 무관합니다. 오히려 비에 젖고 시간이 늦어질 위험을 감수하죠. 본능이라면 왜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줘야 한다"고 느낄까요? 시장에서 상인을 속이고 쌀을 싸게 사도, 집에 와서 "내가 잘못했나?"라는 불안이 듭니다. 이 불안은 생존 본능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도덕률은 본능과 싸우며 우리를 이끄는, 본능 이상의 감각입니다.
"도덕률은 사회적 관습이다"라는 반론도 약합니다. 미드는 사모아의 성적 자유를 들었지만, 사모아에서도 약속을 어기거나 공동체를 배신하면 비난받았습니다. 겉모습은 달라도 "정직"과 "공정"은 보편적입니다. 조선의 시장에서도, 로마의 포럼에서도 도둑질은 금지됐습니다. 관습이라면 왜 이렇게 일관될까요? 니체의 "권력의 도구" 주장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약자가 "공정해야 한다"고 느낄 때, 그건 강자의 지배와 무관합니다. 새치기에 화내는 건 권력이 아니라 도덕률에서 옵니다. 성경은 이를 확인합니다. 창세기 3:11에서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짓고 "두려워 숨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회적 관습이 아니라, 도덕률을 느낀 결과입니다.
개인마다 다르다는 주장도 허점투성입니다. "새치기가 나쁘다"와 "빨리 가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새치기를 옹호하는 사람도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이 변명은 "공정해야 한다"는 도덕률을 인정하는 겁니다. 도덕률에 대한 반론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본능, 관습, 권력으로 도덕률을 줄일 수 없습니다.
4. 실천: 도덕률에 대한 반론을 넘어서는 방법
도덕률에 대한 반론을 넘어, 그 실체를 깨닫는 삶을 실천해보세요.
- 말씀 묵상: 매일 15분 동안 로마서 2:14-15—“양심이 증언한다”—를 읽고, “오늘 내가 본능과 도덕률의 갈등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 예를 들어, 약속을 지키려다 편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나?”를 묵상해보세요.
- 일상 관찰: 하루 동안 "본능"과 "도덕률"을 구분해보세요. "배고프다"는 본능, "동료에게 밥을 나눠줘야 한다"는 도덕률을 적고, “왜 도덕률이 본능과 달랐을까?”를 고민해보세요.
- 작은 행동: 도덕률을 따르며 반론을 시험해보세요. 넘어진 이를 돕거나, 속이고 싶은 유혹을 참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이게 본능이나 관습 때문인가, 아니면 도덕률을 느낀 결과인가?”를 느껴보세요. 하루 끝에 기록하며 반성해보세요.
결론
도덕률에 대한 반론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본능이나 관습을 넘어, 인간 본성에 새겨진 실체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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