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논증: 도덕률이 실재함을 보여주는 근거
도덕률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먼저, 도덕률이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실체로 작용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동네에서 이웃과 함께 텃밭을 가꾸고 있다고 해봅시다. 누군가 자기 몫보다 더 많은 채소를 가져가면, "그건 잘못됐다"는 생각이 즉각 떠오릅니다. 이 반응은 개인적 선호가 아니라, "공유한 것을 공평히 나눠야 한다"는 도덕률이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물리적 세계에서 "불에 손을 대면 뜨겁다"는 법칙이 실재하듯, 도덕적 세계에서도 법칙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도덕률의 실재성은 우리가 그것을 따를 때 느끼는 만족감에서도 확인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길에서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면, "잘했다"는 내적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평화는 단순히 칭찬을 기대한 결과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물건은 돌려줘야 한다"는 도덕률이 실재하며, 그것을 따랐을 때 우리 마음이 그 실체에 반응하는 겁니다. 반대로, 그 지갑을 몰래 챙기면 "내가 잘못했나?"라는 불안이 스며듭니다. 이 불안과 만족의 대비는 도덕률이 실재하는 법칙임을 증명합니다.
또한, 도덕률은 인간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상호작용에서 실재성을 드러냅니다. 가족 모임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몫까지 음식을 독차지하면, "너무 이기적이다"는 불만이 생깁니다. 이 불만은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모두를 배려해야 한다"는 도덕률이 실재하여 관계를 조정한다는 증거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이라는 정의를 규정했고, 현대 한국의 법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고 명시합니다. 이런 법들은 도덕률이 실재하며,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도덕률의 실재성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히브리서 10:16은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도덕률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실재하는 법칙임을 뜻합니다. 도덕률은 실재합니다. 이는 우리의 내적 경험, 관계, 역사적 흔적, 그리고 신앙에서 명백해집니다.
2. 반증: 도덕률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도덕률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대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에서 도덕률이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로이 만든 주관적 가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한다"며, 보편적 도덕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과학적 회의론자 샘 해리스는 『도덕의 풍경』(The Moral Landscape)에서 도덕이 뇌의 신경 반응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공정해야 한다"는 느낌이 뉴런의 화학 작용에 불과하다고 봤습니다.
동양 철학에서도 반론이 나옵니다. 불교의 수냐타(공, 空) 개념은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비어 있다고 하며, 도덕률 같은 고정된 실체를 부정합니다. 도교의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道)는 이름 붙일 수 없다"며, 도덕률이 실재로 규정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일상에서도 "도덕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새치기는 나쁘다"고 느끼지만, 다른 이는 "효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도덕률이 실체가 아니라, 개인적·문화적 망상일 뿐이라고 봅니다.
3. 반증에 대한 반박: 도덕률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도덕률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사르트르의 "주관적 가치" 주장은 우리가 도덕률을 어길 때 느끼는 불안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약속을 어기고 "내가 자유로이 선택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잘못했나?"라는 불편함이 남습니다. 이 불편함은 도덕률이 주관적 창조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실재하는 법칙임을 보여줍니다. 해리스의 신경 반응 이론도 부족합니다. 뉴런이 작용한다고 해서 도덕률이 실체가 아닌 건 아닙니다. 중력도 뇌에서 느낀다고 "중력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순 없죠. 도덕률은 신경 반응을 통해 드러날 뿐, 그 자체로 실재합니다.
수냐타와 노자의 주장은 동양적 통찰을 주지만, 인간 경험을 무시합니다. 공(空)이 모든 것을 비운다고 해도, 우리는 "공정해야 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노자가 도를 이름 붙일 수 없다고 해도, "정직해야 한다"는 도덕률은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속임을 당하면 "그건 잘못됐다"고 느끼는 건 철학적 공(空)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주장도 약합니다. 새치기를 옹호하는 사람조차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이 변명은 "공정해야 한다"는 도덕률이 실재함을 인정하는 겁니다.
성경은 도덕률의 실재성을 확인합니다. 출애굽기 20:15-16에서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도덕률이 하나님께서 주신 실체임을 보여줍니다. 보편성, 불안, 변명은 도덕률이 실재한다는 증거입니다. 반론은 이를 무력화하지 못합니다.
4. 실천: 도덕률의 실재성을 깨닫는 방법
도덕률의 실재성을 깨닫는 삶을 실천해보세요.
- 말씀 묵상: 매일 15분 동안 로마서 2:15—“양심이 증언하거니와”—를 읽고, “오늘 내가 도덕률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 시장에서 속임을 당했을 때, 약속을 어겼을 때 어떤 불안이 있었나?”를 묵상해보세요.
- 일상 관찰: 하루 동안 도덕률의 흔적을 찾아보세요. 동료의 무책임, 새치기, 정직한 행동을 적고, “이게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실체로 느껴졌나?”를 고민해보세요.
- 작은 행동: 도덕률을 실천하며 실재성을 확인해보세요. 약속을 철저히 지키거나, 넘어진 이를 도우며, “이 행동 뒤에 실체가 있는 법칙이 작용하나?”를 느껴보세요. 하루 끝에 “도덕률이 실재한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았나?”를 기록해보세요.
결론
도덕률은 실재합니다. 이는 우리의 경험과 보편성,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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