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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과 분석철학에서의 명제 개념

by modeoflife 2025. 3. 27.

 

(1) 논리학이란? 논증이란?

 

논리학(Logic)은 간단히 말해 “어떤 결론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이끌어 내는 근거(전제)가 타당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을 추적해서, “과연 앞뒤가 맞는가?” “모순은 없는가?” 등을 따져 보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이건 말이 안 돼”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햇빛이 쨍쨍하니 우산을 챙겨 나가야 해”라는 말을 들으면, “왜 우산?” 하고 의아해질 수 있습니다. 햇빛이 쨍쨍하다는 사실이 우산을 챙겨야 한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외선을 막으려고”라는 근거가 추가되면, 조금은 납득이 갈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전제와 결론의 연결고리를 살피는 일이 곧 논리학의 핵심입니다.

 

논증(Argument)이란, 결론과 전제가 하나의 구조로 제시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이러한 전제들이 성립하니, 따라서 이런 결론이 나온다”라는 식으로 펼쳐지는 것이 바로 논증입니다. 유명한 삼단논법(“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이 그 대표적 예시입니다. 만일 어떤 결론이 전제와 모순되거나 동떨어져 있다면, “논리적 비약이 있다”거나 “논증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겠지요. 이 책 부록 3에서 논증 예시 3가지를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신학의 맥락에서도, 누군가가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라는 결론을 제시할 때, 그가 어떤 전제(근거)로부터 이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논리학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꼭 신앙을 “증명”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우리가 왜 그렇게 믿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 결론에 이르렀는가?”를 분명히 해 줄 수 있습니다.

 

(2) 문장(sentence), 진술(statement), 주장 혹은 명제(proposition)의 구분

 

우리는 일상에서 참 다양한 형태의 문장을 사용합니다. 감탄문이나 명령문도 있고, 단순 대화나 수다 중에 곁다리로 던지는 말들도 있지요. 그런데 논리학에서 말하는 ‘명제(proposition)’란 모든 문장에 곧바로 적용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문장(sentence)은 글자나 말소리가 모여 완결된 의미 덩어리를 이룹니다. 하지만 모든 문장이 “참·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형태인 것은 아니지요. “정말 멋지네요!” 같은 감탄문이나 “비 좀 그만 왔으면” 같은 명령문은 우리가 참·거짓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은 비가 옵니다”라는 문장이라면, “비가 온다”라는 내용을 참·거짓으로 판단할 여지가 있습니다.

 

진술(statement)은 바로 이렇게 “무엇인가를 서술하거나 선언하는 문장”을 가리키며, 그중에서도 특히 “참인지 거짓인지”를 따져 볼 수 있는 의미 단위를 명제(proposition)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비가 온다”는 문장 안에는 “오늘 비가 온다”라는 명제가 들어 있습니다. 이 명제는 실제 날씨를 확인해 보면 참인지 거짓인지 평가할 수 있지요. 

 

이처럼 문장이라는 겉모습과, 그 문장 속에서 판단 가능한 내용을 구분해 두면 편리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문장 속에도 “하나님은 선하다”라는 명제가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곧 “참인지 거짓인지를 따질 수 있는 진술”로 분류됩니다. 그 판단이 과학적 방법만으로 가능하냐의 문제는 별개이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누군가는 참된 고백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의문 섞인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명제로서의 성격을 띱니다.

 

(3) 참·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조건과 논리적 구조

 

명제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릴 수 있는 기준이나 과정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관찰이나 실험, 혹은 맥락적 증거로 검증할 수 있는 문장도 있고, 취향이나 가치관에 많이 의존하는 문장도 있으며, 종교나 형이상학적 신념과 연결되어 쉽게 객관화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논리적 구조에 있어서, 전제를 몇 가지 깔아 두고 이로부터 결론을 추론하는 방식을 ‘연역(deduction)’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포유류는 폐로 호흡한다, 고래도 포유류다, 따라서 고래도 폐로 호흡한다”처럼, 일반 원리를 구체 사례에 적용하는 식이지요. 반대로 ‘귀납(induction)’이란, 여러 구체적 사례에서 공통점을 발견해 일반적 결론을 끌어내는 방식입니다. “이곳 커피가 매번 맛있었다, 그러니 오늘도 맛있을 가능성이 높다”와 같은 식입니다. 

 

다만 명제가 갖는 참·거짓의 조건은 언제나 시대와 문화, 그리고 대상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햇빛이 쨍쨍하다” 같은 자연 현상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하지만, “이 커피는 최고로 맛있다” 같은 문장은 주관적 요소가 크게 작용할 수 있지요. 

 

신학적 문장,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라는 명제도, 특정 관점에서는 매우 분명한 결론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그걸 어떻게 객관적으로 검증하느냐”라는 의문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나 성경, 역사적 신앙고백 등 다양한 근거(전제)를 함께 바라보며 그 결론의 타당성을 생각해 보는 논리 구조가 필요해지곤 합니다.

 

(4) 분석철학이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 대륙철학 전통과 다른 길을 간 영미권 철학자들은 “철학이 너무 추상적인 말들만 늘어놓는 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면밀히 분석해, 애매함을 제거하고 정확한 논리 구조를 밝혀 냄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끈 초기 사상가들은 수학과 논리학을 철학에 적극 도입했습니다. 여러 단어와 문장, 특히 명제가 나타내는 의미를 극도로 세분화하여, “이 문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그 대상을 어떻게 가리키는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분석철학자들은 과학적 방법론과 결합해, “경험으로 검증 불가능한 말은 의미가 없다” 같은 강경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논리실증주의). 이때 종교의 언어, 곧 “신이 존재한다” 같은 문장은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무의미하다고 보는 태도가 나타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 후, 언어가 단지 검증 가능성만으로 평가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일면서, “언어는 맥락과 용법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쪽으로 관점이 확장되었습니다.

 

(5) 분석철학적 전통(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 등)의 관점

 

분석철학을 이야기할 때, 흔히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세 인물을 대표적으로 꼽습니다.

 

프레게는 현대 논리학의 시초라 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의미와 지시 개념을 체계화했습니다. “샛별”과 “금성”처럼 다른 단어가 사실상 같은 대상을 가리킬 수 있음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들이 쓰이는 맥락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의미 작용을 일으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명제란 단지 단어의 모음이 아니라, 언어가 실제 세계를 어떻게 지시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습니다.

 

러셀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가리키는 문장은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유니콘은 뿔이 하나 달린 말이다”라는 문장이 ‘유니콘’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다루고 있음에도, 언어적으로는 그럴듯한 서술처럼 보이니 말이지요. 이런 논의를 통해, 어떤 명제가 참이나 거짓을 넘어서 “과연 의미 있는 말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적 쟁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초기 저술인 『논리-철학 논고』에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고, 명제는 그 사실을 ‘그림’처럼 그려 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는 언어 게임(language game) 개념을 내세우며, 언어의 의미가 맥락적이고 상황적이라는 쪽으로 시각을 전환했습니다. 이것은 “명제는 단지 세계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을 넘어서, “명제를 쓰는 사람들의 생활 양식과 공동체 규칙 안에서만 의미가 생긴다”는 쪽으로 시야를 넓혀 주었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분석철학에서는 명제가 실제 세계나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말하거나 듣는 사람들의 합의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등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측면까지 다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학 영역에서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같은 명제가 공동체 안에서, 혹은 개인의 영적 체험 안에서 어떻게 ‘참’으로 받아들여지고 실현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6) 프레게(Frege)의 관점: '의미(Sinn)와 지시(Bedeutung)'

 

프레게는 언어가 세계를 가리키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의미(Sinn)’와 ‘지시(Bedeutung)’라는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샛별”과 “금성”은 서로 다른 단어이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두 표현의 ‘의미’는 다르지만 ‘지시 대상’은 동일합니다. 이처럼 언어가 실제 세계의 대상을 어떻게 가리키는지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했던 것이 프레게의 핵심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이나 “하나님” 같은 신학적 개념을 떠올려 보면, 우리의 일상 경험 영역에서 직접 확인하거나 지시할 만한 구체적 대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나 “천국이 존재한다”와 같은 문장은 의미 없는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의미(Sinn)’를 지닌 채로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할 때, 그 문장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눈앞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어도, “사랑”이나 “관계성”을 통해 전해지는 어떤 뜻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프레게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확인 불가능하다 해도, 그 이름을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 안에서는 충분히 고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학적으로는 이 문제가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가”라는 고민과 이어집니다. 경험적 대상처럼 곧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또 그분을 가리키는 말들이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방문하거나 측정할 수 없지만, 신앙인들은 그 개념에 담긴 ‘의미’를 공유하며 소망을 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천국을 말할 때 떠오르는 다양한 이미지, 약속, 희망이 곧 그 언어가 지닌 의미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게의 논리를 신학 언어에 적용해 보면, 하나님이나 천국을 가리키는 말이 실제 세상에서 구체적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그 개념들이 함축하는 가치를 분명히 느끼고, 실천으로 연결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실재나 천국의 객관성을 충분히 입증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프레게가 제안한 ‘의미와 지시’ 구분 자체가 “신적인 존재의 현실성”을 확고히 해 주기보다는,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구성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동시에 한계도 존재합니다. 긍정적인 면에서, 프레게의 입장을 활용하면 “하나님” 혹은 “천국”이라는 말들이, 현실 세계에서 경험적으로 찾기 어려운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강력하고도 유효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앙공동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해석되는 동안, 그 개념들은 단순한 단어 이상으로 공동체 생활과 윤리를 지탱해 주는 핵심이 됩니다.

 

반면, 이러한 의미 중심 접근이 “그렇다면 하나님이나 천국이 과연 실재하는가”라는 전통적 신학 물음에 충분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는 지적도 가능합니다. “지시 대상이 없다”는 것이 단순히 “지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로 치환되어도 되는가, “하나님이 실재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우리에게 ‘지시 대상’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나 천국이 단순한 관념이나 언어적 의미로만 축소될 위험이 있다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레게가 제시한 ‘의미와 지시’ 개념은 신학적 언어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뛰어넘는 신적 대상이라 해도, 그 이름을 부르고 고백하는 언어적 행위에 분명한 의미가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실재나 초월적 세계의 사실성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어떻게 언어로 표현되도록 허락하셨는가”라는 더 깊은 탐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말로서 하나님을 어떻게 가리키는가”라는 문제는 신학 내에서뿐 아니라 철학적 언어 이론과의 대화에서도 끊임없는 긴장과 탐색을 요구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러셀(Russell)의 관점: 기술 이론(Theory of Description)

 

러셀의 기술 이론(Theory of Description)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언급하는 문장이 과연 말이 되는지, 그리고 그 문장에 담긴 내용이 어떻게 참·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지 고민한 끝에 탄생했습니다. 이를 통해, 실제로 그 대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문장 자체가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울 때, 도대체 그 문장은 어떤 식으로 의미를 얻는가를 분석해야 한다고 러셀은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현실에서 프랑스에는 왕이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는 이 문장을 가리켜 “이건 참이야” 혹은 “이건 거짓이야”라고 쉽게 판단하기가 곤란합니다. 이러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예시로 “금빛 산은 해발 3,000m이다”라는 문장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금빛 산’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눈으로 확인하거나 지도로 확인하여 참·거짓을 쉽게 판별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산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문장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러셀은 단순히 “그 문장은 말이 안 돼”라고 끝내 버리는 대신, 문장을 세분화해서 분석하고, 숨어 있는 기술(記述, description)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금빛 산은 해발 3,000m이다”라는 문장을 러셀의 기술 이론으로 분석해 보면, 단순히 “금빛 산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를 넘어, 문장을 더 세밀하게 분해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먼저 이 문장이 표면적으로는 “금빛 산이라는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이 해발 3,000m 높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산이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말이 안 되는 헛소리가 될까요, 아니면 거짓말일까요, 혹은 어떤 의미 체계를 갖고 있을까요.

 

러셀은 여기서 “금빛 산”이라는 표현을 ‘기술(記述, description)’로 보고, 이를 논리적으로 풀이해 봅니다. 예를 들어,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x가 있는데, 그 x는 산이고, 금빛을 띠며, 해발 3,000m 높이이고, 동시에 금빛 산을 만족하는 것은 오직 그 x뿐이다.” 그러고 나서 이런 x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세상과 대조해 보는 것이지요.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산이 실제로 있다면, 우리가 탐사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그런 산이 전혀 없다면, 문장을 논리적으로 풀었을 때 “그런 x는 없다”는 결론이 나와서, 문장이 참으로 판정될 수 없다는 식으로 귀결됩니다.

 

다시 말해, 문장 속 “금빛 산”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지시어(“이 대상이 여기 있다”)가 아니라, “산이면서 금빛을 띠는, 그리고 유일하게 그런 특성을 지닌 대상”이라는 일종의 조건묶음이라는 것입니다. 문장 전체를 논리적으로 전개해 보면, 존재 여부를 평가할 근거가 더 명확히 드러난다는 게 러셀의 주장입니다. 이를 통해 “금빛 산은 해발 3,000m이다”라는 문장이 겉보기에는 그저 허황된 말처럼 보여도, 잘못된 논리 구조를 가졌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저 문장을 구성하는 기술(記述)이 현실에서 성립하는지 확인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러셀은 이런 식의 분석을 통해, 현실에 없거나 관찰할 수 없는 대상을 말하는 문장도 나름의 논리적 구조를 품고 있으며, 그 구조를 차근차근 풀어 보면 “참인지 거짓인지, 혹은 아직 확인할 수 없는 문장인지”를 좀 더 분명히 가늠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요컨대 “금빛 산은 해발 3,000m이다”라는 문장도, 막연히 “없는 거니까 말도 안 돼”라고 끝내 버리는 대신, “금빛 산”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고, 실제 세계와 어느 지점에서 맞물리는지 논리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신학 영역으로 넘어가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면,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혹은 “하나님을 본 적도 없는데, 그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지?”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러셀의 입장을 적용해 보면, “하나님”이라는 대상이 물리적·경험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그 문장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말하는 문장도 논리적으로 분석이 가능하듯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경험 세계를 초월하거나 직접 관찰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문장을 이루는 기술 구조나 서술 방식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신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서술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을 서술하는 속성(예: 전능하시다, 사랑이시다)은 논리적으로 어떤 자리에 놓이는가.”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세계와 어떻게 정합성을 가질 수 있는가.”

 

특히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을 떠올려 보십시오. 안셀무스(Anselm)를 비롯해 많은 신학자가 “하나님을 ‘가장 완전한 존재’로 정의하기만 해도, 이미 그 존재는 필연적으로 실제해야 한다”는 방식의 논리를 제시해 왔습니다. 러셀의 기술 이론을 도입하면, “그 정의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기술(記述)을 사용해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계와 부딪힐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점검하는 기회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시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 “신은 우주를 창조하셨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현실에서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과학적 관찰로 전부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 문장을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신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특정 방식으로 기술(記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궁극적 설명으로 “신”을 도입할 때, 그 신을 어떤 속성(전능·초월·창조주)으로 묘사하는가가 곧 기술 이론에서 분석할 만한 부분이 됩니다. 즉, “창조주인 신”이라는 언어 표현이 과연 어떤 논리적 틀 안에서 말이 되고, 신앙 공동체는 그 표현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관점을 신학에 적용할 때, 경계해야 할 몇 가지 지점도 있습니다. 먼저, 러셀의 기술 이론은 기본적으로 논리·언어분석 차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을 실제 역사와 체험 속에서 만난다고 고백하는 부분까지 전부 포괄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로 관계를 맺으며, ‘성령의 역사’를 실제로 경험한다고 믿는데, 그 체험적·실존적 요소들은 기술 이론이 초점을 맞추는 “논리 구조의 명료화”만으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 같은 범주로 놓으려 하면, 신앙 고백 자체를 크게 훼손할 우려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전통적 기독교는 하나님을 “실재하는 인격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계시와 역사적 개입을 중시합니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언급 방식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면, 신앙 고백이 단지 “분석을 요하는 허구적 대상”으로 치부될 위험이 있는 것이지요. 이는 신앙 고백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실제 세계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시는가(계시)라는 핵심을 무시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러셀의 기술 이론은 철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언급하는 문장도 나름의 논리적 의미 구조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같은 문장이 현실 검증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요소를 지닌다고 해서, 그 문장이 즉시 무의미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식으로 그 문장이 기술(記述)되고 세계와 연결되는지,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서술될 때 어떤 속성이나 관계가 전제되는지를 논리적으로 분해해 볼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다만, 이러한 분석이 곧바로 신앙 고백에 내재한 초월적 실재, 곧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셔서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신다”는 믿음을 입증해 주거나, 반대로 부정해 버린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언어와 논리에 대한 탐구는 우리가 쓰는 문장을 좀 더 명확히 다듬고 이해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신앙 공동체가 경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성, 혹은 초월적 만남의 실제성을 논리학적 분석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하거나 평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같은 문장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작업은 유의미합니다. 신앙 언어가 “현재 프랑스의 왕”이나 “금빛 산”처럼 단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말하는 문장과 어떻게 닮아 있는지, 또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말과 사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깊이 성찰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 이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명제가 전개되는 방식을 다양한 각도에서 재검토하고, 동시에 그 언어가 표현하려는 초월적 실재에 관해 신앙의 전통과 체험을 더욱 풍성하게 대화시킬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8)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관점: 언어 게임(Language Game)과 초월적 언어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쓴 『논리철학 논고』에서 언어가 세계의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언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림처럼 묘사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후기 사상에서는 “언어는 하나의 게임과 같아서, 그 게임이 가진 규칙과 맥락 속에서만 의미가 생긴다”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를 언어 게임(language game)이라고 부르는데, 말을 할 때도 단순히 외부 대상과 1:1로 대응하는 게 아니라, 말이 쓰이는 상황과 규칙, 공동체의 ‘생활 양식’ 등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지요.

 

이 시각을 신학 용어인 “하나님”이나 “천국” 같은 개념에 적용하면, 그 문장들이 “이 세계에 사실로 존재한다”고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특정 언어 게임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라고 할 때, 그 말을 검증하기 위해 우주 끝까지 카메라를 들고 가서 “찾았다, 못 찾았다”를 따져 볼 수 없습니다. 대신 그 문장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신앙인들이 예배와 기도, 공동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활용하고 체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치 “축구 경기에서 손으로 공을 잡으면 반칙이다”라는 말이 축구라는 규칙 체계 안에서는 분명한 뜻을 가지지만, 축구의 규칙을 모르는 이에게는 낯선 말일 뿐인 것과 비슷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이나 “천국” 같은 표현은 과학적 사실 진술이라기보다, 특정 언어 게임 속에서 통용되는 신앙 행위·실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천국은 진짜 있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은 “어디에 있는데? 증거는?”이라며 과학적·실증적 근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천국”이라는 표현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얻거나,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과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런 활동(예배, 기도, 말씀묵상, 교리교육 등)이 곧 “천국”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기능하는 언어 게임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천국”은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 생활과 실천에서 살아 있는 언어 규칙이 됩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같은 문장도 과학 실험으로 증명될 진술이 아니라, 그 문장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실천하는지, 공동체가 이 표현을 통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고 용서하는지 등을 살피며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문장은 단순히 “사랑의 신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란 표현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체득하느냐가 포인트라는 것이지요.

 

다만, 이런 언어 게임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결국 하나님이나 천국은 외부 세계와 무관한 공동체 내부 언어 게임일 뿐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신앙 전통은 하나님이 실제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셨다고 믿으며, 천국 역시 그저 상징이 아니라 실재하는 곳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언어 게임 관점만 강조하면, 자칫 그 모든 고백이 “내부 규칙과 맥락으로만 돌리는 자족적 시스템”으로 축소돼 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는 것이지요.

 

또 다른 문제는, 실제로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났다”든지 “기도 가운데 체험했다” 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언어 게임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언어 게임 이론은 우리가 말하는 표현이 사회적 규칙에서 어떻게 생겨나고 기능하는지를 잘 보여 주지만, “신이 진짜로 존재하고 역사하신다”는 종교적 실재성을 완전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개념은 신학 언어의 독특함을 이해하는 데 꽤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천국 같은 말이 과학적·실증적 방식으로 증명되지 않음에도, 여전히 강력한 실효성을 지니고 개인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이유를 “그 언어가 특정 공동체의 삶과 규칙, 실천과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축구 경기의 규칙을 모르면서 축구를 한다”고 말하기 어렵듯이, “신앙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뜻, 천국의 소망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런 게임과 규칙, 그리고 생활양식 속에서만 자연스럽게 통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이 주는 통찰은 “하나님”이나 “천국”이라는 말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 진술인지 아닌지로만 평가하기보다는, “이 용어들이 실제 교회와 신앙인의 생활 세계에서 어떻게 쓰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주목하라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럼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하는가” 하는 고전적 물음에 충분한 답을 주는 이론은 아닙니다. 어떤 신앙 전통에서는 하나님이 정말로 자기를 계시하시고, 초월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신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언어 게임” 시각을 통해, 신앙 언어가 사라지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살아 있는 힘을 가지는 이유와, 외부에서 보기에는 쉽게 납득되지 않을 수 있는 개념이 왜 그 공동체에게는 자명하게 느껴지는지 한결 쉽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9)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논리학과 논증 개념을 떠올려 볼 때, 내가 평소 내세우는 주장과 결론은 어떤 전제에 기반하고 있나요? 혹시 막연한 느낌이나 분위기에 의존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 문장·진술·명제를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하며, 평소 내가 사용하는 말 중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내용은 얼마나 될까요? 또 그 사실을 의식하며 대화를 나누는 편인지 점검해 보면 어떨까요?

- “하나님은 선하시다”와 “이 커피는 맛있다”처럼 둘 다 명제 형태를 띠지만 서로 다른 차원의 문장을 비교해 본다면, 참·거짓을 판단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를까요?

- 분석철학이 언어와 의미의 명확성을 강조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내 일상 언어에는 얼마나 모호함이 깃들어 있고, 이 모호함을 줄이는 것이 늘 최선인지, 아니면 인간관계나 신앙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 프레게·러셀·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가리키는 명제의 의미를 고민했는데, 이것을 “하나님”이나 “천국” 같은 초월적 개념에 적용하면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요?

- 사도신경의 한 문장을 골라 그 안에 담긴 명제들을 분리해 보는 경험을 해 보면 어떨까요? 어떤 명제는 쉽게 동의되는 반면 다른 명제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되짚어 보실 수 있겠나요?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명제, 신학 그리고 신앙'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