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

신학적 관점에서 본 명제의 역할

by modeoflife 2025. 3. 27.

 

(1) 하나님의 진리(계시)를 언어화하는 방식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계시”란, 초월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경험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계시를 성경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 사역, 그리고 성령의 내적 조명 등 다양한 형태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계시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고 “인격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단순 지식의 전달 대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교제와 만남을 통해 주도적으로 자기를 열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이 귀한 계시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함께 나누어지기 위해서는 언어적 매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역사 속 교회 공동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수많은 체험과 증언이 존재했지만, 그것이 한 사람의 내면을 넘어서 공적 신앙으로 자리 잡으려면, “말”이나 “글”을 통한 표현이 불가피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명제(proposition)”라는 개념과 마주하게 됩니다. 명제란, 기본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평가 가능할 만큼 완결된 진술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같은 문장을 떠올려 보세요. 일견 과학적 시험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말처럼 보이지만,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이를 오래된 경험과 다양한 해석을 통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예배와 기도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감했다고 고백하면, 그 말이 구체적 삶에 뿌리내린 “경험적” 실재로 함께 자리 잡게 되는 것이지요.

 

 

동시에 어떤 이들은, 계시는 “인격적 만남”이기에 결코 언어나 명제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한 사람과 친구가 되는 과정이 아무리 깊은 설명을 해도 100% 전달되기 어려운 것처럼, “하나님과의 만남” 역시 살아 있는 교류이기에 단순히 문장 몇 줄로 묘사될 수 없는 차원이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정작 내가 그 만남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함께 나누려면, 여전히 “고백” 혹은 “진술”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나는 기도 중에 위로를 받았다” 같은 문장을 통해 다른 이들도 그 체험을 짐작하고, 공감하며, 때론 자신의 경험과 대조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언어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들어오셔서 보여 주시는 진리는 우리의 말과 개념을 초월할 만큼 광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 계시를 “공동체의 언어”로 정리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해 왔고,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같은 명제입니다. 이렇게 짧은 문장들이 교인들 사이에서 암송되고, 설교와 교육에서 해설되며, 개인의 체험과 맞물려 구체적인 믿음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계시가 역동적으로 전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명제는 결코 계시 자체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여전히 언어화된 진술보다 훨씬 넓은 스펙트럼을 갖습니다. 그럼에도 명제화는, 우리의 신앙 체험이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언어로 간단히 “압축”되고 “정리”됨으로써, 더 많은 사람에게 접근 가능해지고 서로 나누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교회는 이 언어화 과정을 통해 계시의 불가항력적 초월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이해 범주 안에서 공유하고 기억해 오는 역사를 이어 왔던 것입니다.

 

(2) 신앙고백과 교리 형성에서 명제가 지니는 위치

 

교회사 속에는 교회 공동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고민하고 숙고하며 다듬은 신앙고백(Creed)과 교리(Doctrine)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다” 같은 짧지만 단호한 문장들이 담겨 있습니다. 처음 접하면 단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 문장들은 초대 교회가 겪은 무수한 신학적 갈등과 분쟁, 그리고 공의회에서의 논의를 통해 “이것이 올바른 믿음이다”라고 합의한 결과물입니다. 교회는 이 합의를 “우리는 이걸 참된 진리로 고백하겠다”라는 명제 하나로 압축해 낸 것이지요.

 

이처럼 신앙고백은 교회가 자신들이 믿는 핵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문서입니다. 두세 줄의 짧은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속에는 교회가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치열하게 씨름해 온 흔적이 녹아 있습니다. 초대 교부들이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구원론 등을 놓고 어떻게 논쟁했고, 무엇을 지켜야 한다고 결론 내렸는지—그 결과가 모두 이 한두 문장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교회는 이 신앙고백을 예배 때 암송하거나, 신앙 교육에서 가르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세대를 넘어 공동체적 일치를 유지합니다.

 

교리(Doctrine)는 신앙고백보다 더 체계적이면서도 폭넓게 신앙 진리를 정리해 놓은 것을 가리킵니다.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등으로 구분된 학문적 신학 분야에서, 수많은 신학자들의 연구와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한두 줄의 명제적 진술로 요약될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삼위일체란 한 본체(Ousia)에 세 위격(Hypostases)이 존재한다”라는 말은, 그저 간단한 교리 지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 아타나시우스, 아퀴나스, 칼케돈 공의회 등 역사적 사상과 공의회 합의의 결정체입니다. 그 문장 속에는 교회가 세대를 거쳐 지켜 왔던 신앙 유산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듯 신앙고백과 교리가 명제 형태를 띠는 것은, 교회가 “우리는 이런 내용을 믿는다”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명제는 짧고 간결하기에 전달력이 높고, 공동체 내부에서 일관된 교육·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명제 한 줄이 교리의 모든 풍성함을 다 담아 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핵심 요점을 놓치지 않는다”는 장점을 제공합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가 이 문장들을 세대에서 세대로 인계할 때, 해당 진술이 표현하는 신앙의 핵심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교회가 형성해 온 신앙고백과 교리문은 그 자체로 공동체적 합의이자 역사적 유산이며, 명제적 형태를 띠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배우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왜 우리는 이렇게 믿는가?”라는 심층적 질문을 할 때, 그 명제 뒤편에 자리 잡은 성경적·역사적·신학적 논의에 관심을 갖게끔 만든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명제들을 통해 “공동체가 붙드는 핵심 신앙”을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배제하며, 세대에 걸쳐 그 믿음을 견고히 유지해 온 것입니다.

 

(3) ‘계시’와 ‘명제’의 연관성: 인격적 만남 vs. 진술로서의 계시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본질적으로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사건인데, 단순한 언어적 진술—즉 명제—로 과연 다 표현이 가능할까?” 실제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문장 하나가 그분의 사랑을 모두 담아 낼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계시라는 것이 인간이 뽑아 내는 정보나 개념적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 실존적 경험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명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격적 체험만으로는 그 만남이 개인의 주관적 세계 안에 머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인생의 어느 순간, 기도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히 느꼈다고 합시다. 그 체험이 당사자에게는 강렬한 사건이겠지만, 그걸 말이나 글로 전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함께 듣고 배우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같은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 언어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그 체험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나아가 자기 삶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명제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체험을 공유하고 공동의 믿음으로 확장하는 데 꼭 필요한 장치’로 등장합니다. 한 개인의 체험이 “나만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함께 공감하고 숙고할 수 있는 공적 고백으로 전환되는 통로가 되는 셈이지요. 예배나 소그룹 모임, 설교와 교육 등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문장이 반복되고 해석될 때, 사람들은 그 말이 가리키는 실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체험해 가게 됩니다.

 

사실 계시는 신앙인이 스스로 연구해 얻어 낸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열어 보이신” 관계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언어 이전의 차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 이전의 경험을 해석하거나 공적으로 인정하기 위해선, 대부분의 경우 언어적 표현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이 사건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체험이 어떤 신학적·공동체적 함의를 갖는지”를 정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니까요.

 

교회는 “계시가 언어로 환원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언어화 없이는 계시를 나누기 어렵다”는 사실을 함께 인정합니다. 인격적 만남을 충분히 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명제를 계속해서 가르치고 고백하는 이유는, 그 말(명제)이 체험을 공유하고 기억하는 대표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명제는 인격적 관계를 축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만남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주고, 함께 숙고하도록 돕는 “입구”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만약 언어가 없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체험을 타인과 나눌 수 있을까요?

-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문장만 있고, 실제적 체험이 없다면 그 말은 나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올까요?

- 교회가 굳이 신조나 교리를 만들어 “이것이 정답입니다”라고 선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삼위일체나 그리스도론 같은 복잡한 신학 주제가, 한두 줄의 문장으로 요약됐을 때 생기는 장점과 한계는 무엇인가요?

- 누군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다”라고 했을 때, 그 체험을 공동체가 공감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 체험이 풍성하다고 해서 신앙고백이나 교리의 필요가 사라질까요, 혹은 반대로 명제를 잘 외운다면 체험이 자동으로 보장될까요?

-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같은 말을 듣고, 사람들은 대체로 어떻게 반응할까요?

- 교회는 이러한 명제적 선언을 단순히 ‘외워 두라’고 권유하기보다, 구체적인 삶의 실천과 공동체적 나눔을 통해 그 문장이 생동하도록 돕고 있나요?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명제, 신학 그리고 신앙'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