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어느 날, 요한은 환상 속에서 하늘을 보았습니다. 빛나는 도성이 내려오고, 예수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왔다"고 말했습니다(요한계시록 21:1). "눈물을 씻어 주리니 고난이 없으리라!"(요한계시록 21:4) 그의 음성은 따뜻했습니다. 전에 예수는 산 위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약속했고(요한복음 16:33), 십자가에서 고난을 짊어졌습니다(요한복음 19:30). 어느 날, 그는 폭풍 속에서 "잠잠하라"고 외쳤고(마가복음 4:39), 제자들은 평화를 보았습니다. 그의 약속은 고난 속에서도 울렸고, 그 새 세상은 마치 어둠을 걷어낸 햇살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를 심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새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영원한 평화로 완성됨을 분명히 증언합니다. 요한계시록 21:4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요한계시록 21:1—“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된 하나님의 궁극적 구속 계획의 실현입니다. 마태복음 6:10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는 새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온전히 임함을 예고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평화의 초석입니다. 골로새서 2:15는 “그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며,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음을 증거합니다. 로마서 5:1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느니라”며, 부활로 열린 평화가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16:33에서 예수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고 하셨고, 이 평화는 새 세상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입니다(히브리서 4:9,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이 남아 있도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은 새 세상의 평화를 예표합니다. 요한복음 14:27—“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는 세상적 혼란을 초월한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며, 마가복음 4:39의 “잠잠하라”는 명령은 자연까지 복종시키는 그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9:31은 “교회가 평안을 받아 든든히 서가고 성령의 위로를 받아” 성장했음을 기록하며, 박해 속에서도 초기 교회가 이 평화를 체험하고 전파했음을 증거합니다. 빌립보서 4:7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리라”며, 이 평화가 신앙의 실질적 열매임을 확인합니다.
구약의 예언은 새 세상의 평화를 예고하며 신구약의 연속성을 강화합니다. 이사야 11:6-9—“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땅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리라”—는 창조의 화평한 회복을 묘사하고, 미가 4:3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며 무기 없는 평화를 예언합니다. 이사야 65:17-19—“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애곡하는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는 요한계시록과 일치하며, 예수의 재림으로 이 예언이 성취됨을 입증합니다(요한계시록 22:3, “저주가 없으리라”).
신약의 변혁적 증언은 이 평화의 확실성을 더합니다. 고린도후서 5:17—“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이니 옛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는 새 세상의 평화가 이미 신자 안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며, 에베소서 2: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두 무리를 하나로 만드사”—는 예수가 민족 간 장벽을 허물고 평화를 이루셨음을 강조합니다. 요한일서 3:2는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그와 같아지리니”라며, 새 세상에서 완성될 평화의 영광을 예고합니다.
역사적 증언도 이를 지지합니다.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미래의 평화로운 구원”을 희망했다고 기록했습니다(Antiquities of the Jews, 18.1.6). 초대교부 유스티누스 마터는 트리포와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평화의 새 세상을 세우신다”고 주장하며(Dialogue with Trypho, 110), 초대교회의 신앙을 전합니다. 4세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영원한 평화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며(City of God, 19.13), 새 세상의 본질을 평화로 규정했습니다.
더 나아가, 새 세상의 평화는 재림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요한계시록 20:4-6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간 왕 노릇 하리라”며, 평화의 통치가 시작됨을 보여주고, 요한계시록 22:5는 “밤이 없고 주 하나님이 그들의 빛이 되시리라”며 고난의 완전한 종식을 약속합니다. 반론—예컨대 현재의 고난(로마서 8:22)—은 “온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느니라”며 새 세상을 기다리는 과정임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약의 약속,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 예수의 가르침, 초기 교회의 증거, 구약의 예언, 신앙의 변혁, 역사적 신앙, 재림의 완성은 새 세상이 평화라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증거를 제공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가져오실 영원한 평화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새 세상이 평화라는 주장에는 강력한 반대 의견이 존재합니다.
첫째, 새 세상이 평화라면 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 질병, 고난이 끊이지 않을까요? 2023년 유엔 보고서(UN Global Humanitarian Overview)는 3억 명 이상이 기아와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밝히며, 요한계시록 21:4의 “고난이 없다”는 약속과 현재 현실이 모순됨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8:22—“온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한다”—는 평화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며, 새 세상이 지금도 평화라는 주장을 약화시킵니다.
둘째, 유대교는 새 세상이 오지 않았다고 보며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2:4—“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는 평화의 새 세상을 예언하지만, 예수 이후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졌다고 주장합니다. 랍비 문헌 탈무드는 “메시아 시대에 평화가 없으면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라며(Berakhot 34b), 예수의 첫 오심과 재림을 모두 부정합니다. 유대교는 새 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 봅니다.
셋째, 이슬람은 새 세상을 기독교와 다르게 해석하며 평화의 정의를 거부합니다. 꾸란 21:104—“우리가 하늘을 두루마리처럼 접는 날”—는 종말을 인정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서 이슬람의 승리를 돕는다고 봅니다(하디스, Sahih Bukhari 4:55:657). 힌두교는 윤회로 고난이 끝없다고 보며, 불교는 열반을 통해 개인적 평화만 가능하다고 하여 기독교의 보편적 새 세상을 부정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은 새 세상을 신화적 상상으로, 부활을 허구로 치부합니다. 토마스 페인(이성의 시대)은 요한계시록을 “광신적 환상”이라 조롱하며, 평화로운 새 세상이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비판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부활과 새 세상을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망상”이라며, 죽음과 고난의 제거가 자연법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은 종말론을 심리적 위안으로 간주하며, 평화의 새 세상을 비현실적 희망으로 봅니다.
다섯째, 현대 과학은 고난 없는 새 세상을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으로 간주합니다. 스티븐 호킹(블랙홀과 아기 우주)은 우주가 엔트로피 증가로 붕괴할 뿐, 초자연적 평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2022년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서는 연간 5천만 명이 질병으로 사망한다고 밝히며, “사망이 없다”는 주장이 생물학적으로 터무니없음을 보여줍니다. 뇌과학자 샘 해리스는 고통이 인간 신경계의 필수 요소라며, 고난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합니다.
여섯째, 성경 자체의 모순도 의문을 제기합니다. 요한계시록 21:4는 “사망과 고난이 없다”고 하지만, 마태복음 24:6-7은 “전쟁과 기근이 있으리라”며 고난이 끝날 때까지 계속됨을 예고합니다. 요한계시록 20:7-9는 천 년 후 “사탄이 풀려나 민족을 속이고 전쟁이 있다”고 하여, 평화가 영원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히브리서 11:13은 믿음의 선조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며, 새 세상이 실현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적 증거가 부족합니다. 2021년 기후 위기와 팬데믹(출처: IPCC Report, 2021)은 고난을 심화시켰으나, 새 세상의 평화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천년왕국 해석(전천년, 후천년, 무천년)이 분열되어(출처: Barna Group, 2022, “Eschatology Survey”), 새 세상의 평화에 대한 합의조차 없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도 추종자들의 희망일 뿐, 객관적 증거가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 고난, 타 종교의 반대, 회의론, 과학적 불가능성, 성경 모순, 증거 부족은 새 세상이 평화라는 주장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새 세상의 평화를 현재의 고난이나 인간적 잣대만으로 판단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의 구속 계획을 오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현재 고난(UN 3억 명, 로마서 8:22)이 새 세상의 평화를 반증한다고 보지만, 이는 새 세상이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약속임을 간과합니다. 요한계시록 21:1-4는 “새 하늘과 새 땅”과 “고난이 없는” 상태를 재림 이후로 제시하며, 로마서 8:23-24는 “우리가 고대하는 바 구속함을 받는 것이라”며 현재 고난이 새 세상의 전조임을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24:8—“이 모든 것은 해산의 고통의 시작이라”—는 고난이 평화로 가는 과정임을 증거합니다.
둘째, 유대교의 반대(이사야 2:4)는 새 세상의 평화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이사야 11:6-9—“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리라”—는 예수의 재림으로 성취될 평화를 예언하며, 요한계시록 19:15—“그가 만국을 다스리시리라”—는 예수가 평화의 왕으로 오심을 보장합니다. 유대교가 예수를 거부해도, 로마서 11:26—“구원자가 시온에서 나와 죄악을 제거하리라”—는 새 세상에서 유대인까지 포함될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평화의 미실현은 아직 때가 안 된 결과일 뿐입니다.
셋째, 이슬람(꾸란 21:104)과 타 종교의 다른 해석은 새 세상의 평화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33—“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와 요한계시록 21:5—“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평화의 새 세상을 이루실 유일한 권위를 가지심을 선언합니다. 이슬람의 선지자 역할 주장이나 힌두교·불교의 상대주의는, 사도행전 4:12—“구원을 주시는 이름은 오직 예수뿐이니라”—로 무력화되며, 새 세상의 평화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합니다.
넷째, 회의론자(페인, 도킨스, 러셀)의 신화적 비판은 새 세상을 자연주의로만 본 결과입니다. 고린도전서 15:3-6은 부활을 “많은 증인”이 본 역사적 사실로 증거하며, 도킨스의 과학적 불가능성은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설명하지 못합니다(창세기 1:1). 요한계시록 1:7—“모든 눈이 그를 보리라”—는 새 세상의 평화가 환상이 아닌 실체적 실현임을 보장합니다. 러셀의 심리적 위안론은 이사야 55:11—“내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이루리라”—로 반박됩니다.
다섯째, 현대 과학(호킹, WHO)의 반대는 새 세상의 초자연적 본질을 무시합니다. 히브리서 11:3—“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느니라”—는 창조주 예수께서 고난과 사망을 제거하실 권능을 가지심을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19:26—“하나님께는 다 가능하니라”—는 과학적 한계를 초월한 새 세상의 평화를 보장하며, 요한계시록 22:3—“저주가 없으리라”—는 자연법칙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입증합니다. 과학은 하나님의 뜻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여섯째, 성경 내 모순(마태복음 24:6-7, 요한계시록 20:7-9)은 구속사의 단계를 오해한 해석입니다. 마태복음 24:6-7의 고난은 재림 전 표징이며, 요한계시록 21:4의 평화는 그 이후 완성입니다. 요한계시록 20:7-9의 사탄의 반역은 천년왕국 후 잠깐의 사건으로, 요한계시록 20:10—“마귀가 불못에 던져지리라”—로 영원히 끝나 새 세상의 평화가 지속됨을 보장합니다. 히브리서 11:13의 “약속을 받지 못함”은 믿음으로 소망을 본 선조들을 뜻하며(히브리서 11:1), 새 세상이 미래에 실현됨을 반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적 증거 부족(기후 위기, 천년왕국 논쟁)은 새 세상의 평화를 반박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20—“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는 새 세상이 현세가 아닌 재림 후 도래함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4:30—“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는 평화의 새 세상이 예수의 재림에 달렸음을 증거하며, 천년왕국 해석 분쟁은 인간의 이해 차이일 뿐, 하나님의 약속(하박국 2:3, “정한 때가 있다”)을 흔들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고난, 타 종교, 회의론, 과학, 성경 해석, 증거 부족은 새 세상의 평화를 세상적 관점에서만 본 단견입니다. 신약의 약속, 예수의 구속, 구약 예언, 초대교회 소망, 하나님의 주권은 새 세상이 평화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으로 완성하실 영원한 평화의 보증입니다.
새 세상이 평화라는 믿음은 일상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예수의 평화를 구해보세요. 둘째, 이웃과 화해하며 새 세상의 평화를 오늘부터 살아보세요. 셋째, 하루 한 번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며 소망을 품어보세요. 이는 새 세상의 평화를 기다리며 지금 평안의 삶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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