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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오경 명칭과 기억의 프레이밍: 정경 문헌의 인지적 수용 방식에 대한 고찰

by modeoflife 2026. 1. 3.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 즉 모세오경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 모두에서 신앙·율법·정체성의 기초 문헌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이 문헌군이 오늘날 독자에게 인식되는 방식은 본문 자체의 구조뿐 아니라, 각 책에 부여된 명칭(nomenclature)에 의해 상당 부분 매개된다. 특히 현대 독자에게 익숙한 '창세기', '출애굽기'와 같은 명칭은 책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요약해 주는 동시에, 책 전체를 특정 주제 또는 사건 중심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이 글은 모세오경 각 권의 명칭이 독자의 이해와 기억에 어떠한 방향성을 부여하는지를 분석하고, 이러한 현상이 개별 책을 넘어 모세오경 전체에서 구조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명칭이 단순한 표지(label)가 아니라, 정경 문헌의 수용 방식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인지적 장치임을 밝히고자 한다.


1. 명칭과 인지적 프레이밍: 이론적 배경

인지언어학과 기억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방대한 정보를 그대로 저장하지 않고, 대표성(representativeness)과 요약 단서(cue)를 통해 정보를 구조화하여 기억한다. 문헌의 제목이나 명칭은 이러한 요약 단서 중 가장 강력한 요소로 작용한다. 즉, 명칭은 독자가 본문을 읽기 이전에 이미 "이 텍스트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암묵적 답변을 제공한다.

이 점에서 명칭은 해석을 강제하지는 않지만, 기억의 우선순위와 접근 경로를 설정한다. 이는 오류나 왜곡이라기보다, 인지 체계가 작동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프레이밍 효과가 본문의 실제 구조·비중·주제 분포와 지속적으로 어긋날 경우, 독자의 이해가 체계적으로 단순화되거나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다.


2. 창세기: 명칭과 내용 구조의 불균형

'Genesis(창세기)'라는 명칭은 '기원', '시작', '창조'라는 의미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로 인해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 책을 "세상의 시작을 설명하는 책"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본문 구조를 살펴보면, 창조 기사(1–2장)는 전체 50장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책의 대부분은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 서사와 언약 계보에 할애되어 있다.

그럼에도 '창세기'라는 명칭은 독자의 기억 속에서 이 책의 중심을 창조 이야기로 고정시키고, 족장사와 언약 전승을 부차적 이야기로 인식하게 만들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본문의 의미가 잘못 전달되었다기보다, 대표 사건 하나가 책 전체를 대변하는 인지적 압축이 발생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어 명칭 베레쉬트("태초에")가 특정 주제를 규정하지 않고 단지 본문의 출발점을 가리키는 것과 대비하면, 이러한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3. 출애굽기와 사건 중심 기억의 강화

'Exodus(출애굽기)'라는 명칭 역시 강력한 사건 요약형 명칭이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을 책의 핵심으로 부각시킨다. 그 결과, 독자는 출애굽 사건 이후 전개되는 시내산 언약, 율법 수여, 성막 규정 등을 '사건의 후속 설명' 정도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본문 분량과 신학적 기능 면에서 보면, 출애굽 사건 그 자체보다 언약 공동체의 형성과 규범 설정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히브리어 명칭 쉐모트("이름들")가 공동체의 정체성과 인적 연속성에 초점을 두는 것과 비교할 때, '출애굽기'라는 명칭은 서사의 한 지점을 전체로 환원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4. 나머지 세 권에서의 반복되는 패턴

이러한 현상은 모세오경의 나머지 세 권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 레위기는 명칭상 레위인과 제사장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공동체 전체를 위한 거룩 규범을 다룬다. 그럼에도 "제사장 전용 규례집"이라는 인상이 널리 퍼져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책의 명칭은 바이크라(וַיִּקְרָא), 곧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이다. 이 명칭은 특정 집단(레위인)을 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적 소명이 공동체를 향해 발화되는 행위 자체를 강조한다. 히브리어 명칭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제사장 직무를 다루는 기술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어떻게 거룩함이라는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지를 규범적으로 서술한 문헌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레위기’라는 헬라어·라틴어 계열 명칭은 본문의 적용 범위를 축소하여 기억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 민수기는 인구 조사라는 행정적 요소를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광야 서사와 신앙적 시험이라는 핵심 주제를 가리게 된다. 히브리어 명칭은 베미드바르(בְּמִדְבָּר), 즉 "광야에서"이다. 이 명칭은 책의 핵심을 통계나 숫자가 아니라 공간적·서사적 상황에 두며, 광야를 시험·형성·전환의 장소로 규정한다. 히브리어 명칭에 따르면 이 책은 행정 문서가 아니라, 공동체가 약속의 땅에 이르기 전 겪는 불순종과 훈련의 과정을 기록한 서사 문헌이다. 반면 ‘민수기(Numbers)’라는 명칭은 부차적 요소를 대표성의 중심으로 끌어올려, 책 전체의 신학적 긴장을 흐리게 만든다.

-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이라는 명칭으로 인해 새로운 법전이라는 오해를 낳지만, 실제로는 모세의 고별 설교와 언약 재확인이 중심이다. 히브리어 명칭 데바림(דְּבָרִים)은 "말씀들"이라는 의미로, 이 책의 형식과 성격을 정확히 드러낸다. 신명기는 새로운 율법을 제정하는 문헌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율법을 설교적·기억적 방식으로 재진술하는 텍스트이다. 히브리어 명칭은 법의 ‘두 번째 판본’이라는 오해를 차단하고, 이 책을 언약 공동체를 향한 마지막 권면과 선택의 요청으로 위치시킨다. 이에 비해 ‘Deuteronomy’라는 명칭은 책의 수사학적 성격을 법전 중심으로 환원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이 다섯 권 모두의 사례는 공통적으로, 헬라어·라틴어 계열 명칭이 본문의 복합적 구조 가운데 하나의 대표 요소를 선택하여 책 전체의 정체성으로 확장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명명 방식은 독자의 이해를 돕는 요약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서사·규범·언약이 복합적으로 얽힌 본문을 단일 주제 중심으로 환원하여 기억하게 만드는 인지적 효과를 동반한다. 반면 히브리어 성경의 명칭 체계는 본문의 첫 발화나 서사적 출발점을 그대로 채택함으로써, 요약이나 해석을 선행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히브리어 명칭은 독자가 특정 주제나 사건을 미리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문의 전개와 발화 흐름을 따라가도록 하는 중립적 진입점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대비는 성경 명칭이 본문의 의미 내용을 직접 규정하기보다는, 독자의 기억 구조와 텍스트 접근 방식을 형성하는 인지적 장치로 작동한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5. 모세오경 전체에 대한 구조적 영향

이러한 명칭 체계가 반복되면서, 독자는 모세오경을 하나의 연속된 서사로 인식하기보다,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진 다섯 권의 독립 문헌으로 기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언약의 점진적 전개, 공동체 형성의 연속성, 기억과 계보의 축이 분절되어 인식된다.

중요한 점은, 이 현상이 본문의 오류나 신학적 왜곡 때문이 아니라, 서지학적·언어적 명명 방식과 인간 기억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 쓰였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름 붙여졌는가"에 있다.


결론

본 고찰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모세오경 각 권의 명칭은 독자의 기억과 이해에 특정 방향성을 부여하며, 이는 인지적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이다. 둘째, 이러한 효과는 개별 책에 국한되지 않고 모세오경 전체에서 구조적으로 반복된다. 셋째, 이로 인해 모세오경은 하나의 연속된 언약 서사라기보다, 대표 사건 중심의 분절된 문헌군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모세오경 연구에서 명칭은 부차적 문제가 아니라, 정경 문헌이 어떻게 읽히고 기억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요소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는 명칭을 수정하자는 주장이라기보다, 명칭이 가진 인지적 힘을 자각한 상태에서 본문을 읽어야 한다는 해석학적 요청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