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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왕조 - 중세 왕권의 계승과 절대주의의 좌절, 그리고 입헌군주제의 형성

by modeoflife 2025. 12. 16.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uart)는 영국사에서 왕권과 의회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환기의 왕조였다. 1371년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어 1603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스튜어트 왕조는, 중세적 군주권을 근대 국가 위에 그대로 이식하려 했으나 결국 그 시도는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영국은 대륙의 절대왕정과는 다른 길, 즉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로 이행하게 된다.

이 글은 스튜어트 왕조를 단순한 왕조사로 다루기보다, 왕권·의회·종교·법의 관계가 어떻게 재구성되었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특히 스튜어트 왕조가 왜 절대왕정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 실패가 어떻게 근대 정치 질서를 탄생시켰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1. 스튜어트 왕조 이전: 잉글랜드 왕권의 제도적 전통

스튜어트 왕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잉글랜드 왕권이 이미 제한된 군주제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 이후, 왕권은 관습법(common law), 귀족 회의, 그리고 점진적으로 발전한 의회 제도와 긴장 관계 속에 놓여 있었다.

튜더 왕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지만, 이는 종교개혁·관료제·의회 협력을 통해 유지된 것이었지, 법과 관습을 초월한 절대주의는 아니었다. 스튜어트 왕조는 이러한 제도적 토대 위에 등장했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구조적 갈등이 발생한다.


2. ‘스튜어트(Stuart)’라는 명칭의 의미와 기원

‘스튜어트(Stuart)’라는 이름은 원래 가문명이 아니라 관직명에서 유래한 성씨이다. 이 명칭은 고대 영어 stigweard 또는 중세 프랑스어 seneschal과 연결되며, ‘왕실 재정과 궁정을 관리하는 집사(high steward)’를 의미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스튜어트 가문은 대대로 왕실 집사(Lord High Steward of Scotland) 직을 세습했고, 이 관직명이 가문명으로 고착되었다. 즉, 스튜어트 왕조는 행정 관료적 기원을 가진 왕가였으며, 이는 부르봉 왕조처럼 영지명에서 유래한 왕조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 점은 스튜어트 왕조가 왕권을 개인적 신성보다는 직무와 권한의 연속성으로 이해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하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오히려 신권적 절대주의를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


3. 스튜어트 왕조의 성립: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로

스튜어트 왕조는 1371년 로버트 2세의 즉위로 스코틀랜드 왕조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의 역사적 전환점은 1603년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왕관의 연합(Union of the Crowns)’ 상태에 들어간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신봉하며, 왕을 법 위에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의회가 조세 승인권과 입법 관여권을 확보하고 있었고, 국왕의 재정은 의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스튜어트 왕조는 즉위 초기부터 왕권 이념과 제도 현실 사이의 긴장에 직면했다.


4. 찰스 1세와 왕권–의회 충돌의 격화

찰스 1세(재위 1625–1649)는 스튜어트 왕조의 정치적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군주였다. 그는 의회를 반복적으로 해산하고, 의회 승인 없는 과세와 강제 대출을 시행했으며, 국교회 중심의 종교 정책으로 사회적 반발을 키웠다.

1642년 발발한 잉글랜드 내전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주권이 왕에게 있는가, 아니면 법과 의회에 있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내전의 결과 찰스 1세는 처형되었고, 이는 유럽 역사상 군주가 ‘국민의 이름으로’ 처형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5. 공화정, 왕정복고, 그리고 명예혁명

찰스 1세 사후 잉글랜드는 크롬웰의 공화정 체제를 경험했으나, 이는 장기적 대안이 되지 못했다. 1660년 왕정복고로 찰스 2세가 즉위하면서 스튜어트 왕조는 복원되었지만, 왕권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약화되어 있었다.

결정적 전환점은 1688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다. 제임스 2세의 전제적·친가톨릭 정책에 반발한 의회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를 초청했고, 이 과정에서 국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는 통치할 수 없는 존재로 재정의되었다.

1689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은 왕권의 한계를 명문화하며, 스튜어트식 절대주의의 종언을 확정지었다.


6. 스튜어트 왕조의 역사적 의미

스튜어트 왕조는 절대왕정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 실패를 통해 근대 입헌주의를 제도화한 왕조였다. 부르봉 왕조가 절대왕정의 완성자였다면, 스튜어트 왕조는 절대왕정의 한계를 실증한 사례였다.

영국의 정치적 근대성은 혁명 이후에도 왕정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는 왕조의 연속성 속에서 권력의 성격만이 변화했음을 의미하며, 스튜어트 왕조는 그 전환의 중심에 있었다.


결론

스튜어트 왕조는 중세적 왕권을 근대 국가에 적용하려 했으나, 잉글랜드의 제도적 전통과 사회 구조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왕조는 실패했지만, 정치는 성공했다. 왕권은 제한되었고, 법과 의회는 주권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 점에서 스튜어트 왕조는 몰락한 왕조이면서도, 동시에 근대 민주 정치의 산파 역할을 한 왕조로 평가될 수 있다.

 

 

[추가: 스튜어트 → 하노버 → 윈저 왕조]

 

스튜어트 왕조 (House of Stuart, 1603–1714)

스튜어트 왕조는 잉글랜드 왕권이 중세적 군주 개념에서 근대적 헌정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격렬한 충돌을 경험한 왕조였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에 기초해 국왕의 권위를 법과 의회 위에 두려 했으나, 잉글랜드는 이미 관습법과 의회 전통이 강하게 자리 잡은 사회였다. 이로 인해 왕권과 의회 사이의 긴장은 구조적 갈등으로 고착되었다.

이 갈등은 17세기 잉글랜드 내전과 찰스 1세의 처형, 그리고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은 국왕을 법과 의회에 종속시키며 입헌군주제를 확립했고, 스튜어트 왕조는 정치적 실패를 통해 근대적 주권 개념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 왕조의 몰락은 절대주의의 좌절이자, 의회 주권의 역사적 승리를 의미한다.

 

스튜어트 왕조의 단절은 단순한 혈통의 소멸이 아니라, 정치적·종교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결과였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확립했고, 국왕은 의회가 승인한 헌정 질서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로 재정의되었다. 이 시점부터 왕위 계승은 더 이상 순수한 혈통 문제가 아니라, 헌정 질서에 대한 수용 여부의 문제로 바뀌었다.

결정적 요인은 종교 문제였다. 스튜어트 왕조 말기의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통치는 개신교 국가로서의 영국 정체성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의회는 가톨릭 군주의 재등장을 체제 위협으로 간주했고, 이에 따라 1701년 「왕위계승법(Act of Settlement)」을 제정하여 가톨릭 신자 및 그 후손의 왕위 계승을 법적으로 배제했다.

마지막 군주인 앤 여왕(재위 1702–1714)은 개신교였으나, 직계 생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그 결과 스튜어트 가문 내의 가장 가까운 혈통 계승자들은 모두 가톨릭이었고, 헌정 질서상 왕위 계승이 불가능했다. 이로써 스튜어트 왕조는 정치적·종교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의회 결정으로 단절되었다.



하노버 왕조 (House of Hanover, 1714–1901)

하노버 왕조는 스튜어트 왕조 단절 이후, 종교와 의회의 결정에 따라 외국 왕가가 영국 왕위를 계승한 사례였다. 1701년 왕위계승법은 국왕의 자격을 개신교 신앙으로 제한했으며, 이에 따라 독일 하노버 선제후 가문의 게오르크 1세가 즉위하였다. 이는 혈통보다 헌정 질서와 의회의 판단이 왕권 위에 있음을 제도적으로 확인한 사건이었다.

하노버 왕조 초기 국왕들은 영국 정치에 소극적이었고, 그 결과 내각과 총리 중심의 통치가 빠르게 정착되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국왕의 실질적 권력이 축소되고, 의회가 정책 결정의 중심이 되는 근대 의회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발전하였다. 하노버 왕조는 왕권을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왕조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 사례였다.

 

하노버 왕조의 종식은 스튜어트 왕조처럼 혁명이나 강제적 폐위의 결과가 아니라, 국제법과 왕위 계승 규칙의 차이에서 비롯된 비교적 평화로운 단절이었다. 하노버 왕조는 1714년부터 영국과 하노버를 동시에 지배하는 동군연합(personal union) 형태로 유지되었으나, 두 국가의 왕위 계승법은 동일하지 않았다.

결정적 계기는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였다. 영국에서는 여성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하노버는 살리카법(Salic Law)을 적용해 여성의 왕위 계승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빅토리아는 영국 여왕이 되었지만, 하노버 왕위는 남성 계승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넘어갔고, 이로써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연합은 종료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이 영국 왕조 자체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하노버 왕조의 혈통이 그대로 이어졌고, 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을 거쳐 윈저 왕조로 명칭만 변경되었다. 따라서 하노버 왕조의 ‘단절’은 영국 왕조의 붕괴가 아니라, 대륙 영지와의 연결이 끊어진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윈저 왕조 (House of Windsor, 1917–현재)

윈저 왕조는 하노버 왕조의 혈통을 계승하면서도, 정치·문화적 환경 변화에 대응해 왕조의 외형을 재정의한 결과로 성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반독일 정서가 확산되자, 조지 5세는 기존의 독일계 왕조명인 작센코부르크고타를 포기하고 ‘윈저’라는 영국적 명칭을 채택했다. 이는 혈통의 변화가 아닌 상징의 재구성이었다.

윈저 왕조 하에서 영국 군주제는 완전히 상징적 제도로 정착했다. 국왕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며, 국가 통합과 헌정 질서의 연속성을 대표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오늘날 윈저 왕조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존속하는 군주제의 전형을 보여주며, 영국 입헌군주제의 최종적 형태를 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