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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받지 않은 그리스도인 -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구원 가능성 논쟁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위치와 지속적 영향력

by modeoflife 2025. 12. 1.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격렬하게 반복된 질문은 단 하나였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의 이름도, 교회도, 성경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초대교회 로마의 지하 묘지부터 2025년의 스마트폰 화면까지, 2천 년 동안 한 번도 잠들지 않았다. 그때마다 교회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단호한 배타주의였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 세례의 물 한 방울 없이는 누구도 천국 문을 넘을 수 없다는 확신. 다른 한쪽은 떨리는 희망의 길이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그은 선을 넘어설 수 있다. 세례의 물이 닿지 못한 곳에도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 이 두 번째 길을 우리는 포괄주의라 부른다.

포괄주의의 역사는 길고 굴곡졌다. 2세기에는 유스티누스라는 철학자 출신 순교자가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으나, 5세기에는 어거스틴이 그 문을 상당히 좁혔다. 그러나 600년 동안 교회가 하나의 단단한 금속처럼 모두 문을 잠궜던 것은 아니었다. 지역 전통과 신학자의 성향에 따라 좁게나마 틈이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는 엄격했다. 그러다 12세기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13세기에는 한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그 바람을 체계라는 돛에 담아 거대한 항해를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는 고대 교부들로부터 흩어진 씨앗 하나하나를 주워 모아 정원사가 씨를 심듯 체계적으로 심었다. 그리고 그 정원은 750년이 지난 지금도 가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로 푸르게 살아 있다. 오늘날 교황청이 발행하는 교리서 847항과 1260항, 전 세계 주교들이 미사 강론에서 반복하는 “교회 밖에서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말은 모두 그 정원에서 자란 열매다. 이 글은 그 씨앗이 어떻게 심겼고, 어떻게 자랐으며, 어떻게 오늘날 14억 신자의 신앙 고백이 되었는지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의 정점에, 그리고 중심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서 있다.



1. 고대 교부 시대: 포괄주의의 첫 번째 물결 (2–3세기)

2세기 중엽, 기독교가 아직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 있을 때, 한 철학자 출신의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선언을 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제1 변증서》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이성 자체이시며(λόγος), 그 로고스를 따라 산 자는 시대와 종교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다”고 썼다. 그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헤라클레이토스를 모두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세례도, 복음도 몰랐지만 그들 안에 심겨진 ‘로고스의 씨앗(spermatikos logos)’이 그들을 구원받을 수 있는 이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헬레니즘의 중심에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했다. 그는 이교 철학자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조명된 자들”이라 부르며, 진리 추구 자체가 은총의 작용일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 《티마이오스》를 “모세의 아티카 방언으로 쓴 책”이라 묘사할 만큼 고대 철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오리게네스는 이 포괄적 시도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그는 《원리론》과 《카타 켈소스》에서 ‘최종 회복(apokatastasis)’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열어두었으며,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피조물을 결국 끌어안는 미래를 탐구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후대 오리게네스주의의 극단적 해석과 뒤섞여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합의된 결론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공식 차원에서 포괄주의의 첫 번째 물결은 일단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 파도가 남긴 물결 자국은 수 세기 뒤 다시 해안으로 밀려올 작은 씨앗이 되었다.

 


2. 어거스틴의 역설과 중세 초기의 배타주의 (5–11세기)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만 해도 포용적인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교도들 가운데에도 구원받은 이가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나마 긍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의 격렬한 논쟁은 그의 신학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원죄의 깊이를 깨달은 순간, 그는 세례의 절대적 필요성을 칼날처럼 세웠다. 《죄의 공로와 용서와 유아 세례에 대하여》에서 그는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도 은총을 받지 못했기에 형벌을 면치 못한다.” 그 형벌이 지옥의 불인지, 아니면 영원한 행복의 박탈에 그치는 ‘가장 가벼운 형벌’인지에 대해서는 후대까지 논쟁이 이어졌지만, 어거스틴의 목소리는 서방 교회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그 후 약 700년 동안, 그러니까 5세기 말부터 12세기 초까지, 교회는 대체로 단단한 성벽을 쌓았다. 세례의 물 한 방울 없이는 구원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아누스의 외침이 여전히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 성벽에도 늘 좁은 틈이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 순교자 트라야누스를 위해 눈물로 기도한 성녀의 전설을 전하며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제도 너머로 흐를 수 있음을 암시했고, 일부 수도원 전통은 ‘세례의 열망’이라는 개념을 조용히 품고 있었다. 그 열망은 아직 이름 없는 씨앗에 불과했지만, 바람이 불면 싹을 틔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중세 초기는 배타주의의 긴 겨울이었다. 포괄주의는 불씨만 남긴 채 잿더미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불씨는 결코 꺼지지 않았다. 12세기의 르네상스가 다가오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이슬람 철학자들의 책이 유럽으로 밀려들 때, 그 잿더미 속에서 붉은 숨결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세례의 물이 닿지 않은 수많은 탁월한 영혼들을 마주한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이 닫았던 문을 다시 살짝 열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문을 가장 체계적으로, 그리고 가장 넓게 연 사람은 13세기의 한 도미니코회 수도사였다.



3. 12세기 르네상스와 포괄주의의 부활

12세기 말, 유럽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랍·유대 사상과의 접촉을 통해 지적 지평이 급속히 넓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복음을 접할 수 없었던 이슬람·유대 사상가들이 지적·도덕적으로 놀라울 만큼 탁월하다는 현실은 신학자들에게 문제를 던졌다. “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두 지옥에 가는가?”

이 질문을 가장 급진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피에르 아벨라르였다. 그는 고대 철학자들을 ‘암묵적 그리스도인’으로 부르며 자연법에 따른 삶이 구원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1141년 수아송 공의회에서 정죄 직전까지 몰릴 정도로 대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제자들과 후학을 거치며 은밀하게 전승되었다.

휘고 성 빅토르는 보다 조심스럽게 “암묵적 신앙(fides implicita)” 개념을 제안했다. 명시적 신앙 고백이 없어도 하느님을 향한 성실한 열망과 양심에 충실한 삶이 신앙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었다.

이 시기에 스콜라 학자들은 세례 준비자가 세례 직전 죽었을 때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깊이 다뤘다. “세례의 열망(votum)이 세례의 은총을 대신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점차 널리 받아들여졌고, 이 개념은 아퀴나스에 의해 정점에 이르게 된다.



4. 토마스 아퀴나스: 포괄주의의 체계적 정점

토마스 아퀴나스는 흩어진 불씨를 거대한 숲으로 성장시킨 인물이었다. 《신학대전》 III부 68문 2항에서 그는 “성사를 실제로 받을 수 없는 이에게는 세례의 열망이 그 효과를 대신할 수 있다”고 정식화했다. 이 문장은 서방 전통에서 가장 교의적으로 안정된 포괄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아퀴나스는 열망을 둘로 나누었다.
첫째, 명시적 열망(explicit votum)은 복음과 세례를 알고 실제로 그것을 원했으나 받을 수 없는 경우.
둘째, 암묵적 열망(implicit votum)은 복음에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양심의 명령을 따르고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을 향한 근본적 지향을 품은 경우다.

아퀴나스는 이 암묵적 열망까지도 구원에 충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하느님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을 제공하신다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지옥의 현실성과 보편구원론의 오류를 명확히 선을 그었다. 그의 신학은 자비의 가능성을 열되, 그 문을 무제한으로 넓히지 않은 균형의 신학이었다.



5. 중세 후기에서 근대까지: 아퀴나스 계열의 확산

아퀴나스가 죽은 지 수십 년 뒤,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에서 세례받지 않은 트라야누스 황제와 리페오를 천국에 배치했다. 이는 아퀴나스의 일반적 교리 적용이라기보다 중세 주석가들이 말하던 ‘특별 계시’ 혹은 ‘기적적 환원’이라는 예외적 구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구원과 관련하여, 세례의 갈망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진술을 제시한 반면 고해성사에 대해서는 보다 제한된 형태의 가르침을 남겼다. 제6회기 의화에 관한 교령 제4장과 제14장은 의화가 “재생의 세례 또는 그 갈망(lavacrum regenerationis aut eius voto)”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직접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세례를 실제로 받지 못한 이라도 세례를 받고자 하는 참된 갈망이 있다면 의화―즉 구원에 이르는 은총 상태로의 이심(移心)―에 도달할 수 있음을 밝힌다. 이는 공의회 문헌 안에서 세례의 갈망이 구원에 관련된 효력을 지님을 분명히 언급한 유일한 자리이다.

반면, 제14회기 고해성사에 관한 교령 제4장은 죄의 용서, 곧 구원 질서 안에서의 화해가 어떤 조건에서 성사 이전에도 가능할 수 있는지를 다루며, 완전 통회(contritio perfecta)가 고해성사에 나아가려는 의향(votum confessionis)을 포함할 경우 실제 고해 이전에도 죄가 용서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진술은 어디까지나 통회의 내적 성격과 그 의향에 따른 임시적·준비적 효력을 설명하는 것으로, 고해성사 자체가 갈망을 통해 대체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처럼 트리엔트 공의회 문헌은 세례의 갈망에 대해서는 의화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인정하여 구원 질서 안에서 명확한 역할을 부여한 반면, 고해성사와 관련해서는 완전 통회와 고해 의향으로 인해 성사 이전에도 죄의 용서가 가능할 수 있다고 제한적으로 설명하며, 성사의 대체 가능성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구원과 관련된 두 가지 경우는 공의회 문헌의 범위 안에서 명확히 구분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17세기 스콜라 신학에서 루이스 데 몰리나와 프란시스코 수아레스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를 조화시키는 문제를 다루면서,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구원에 충분한 은총을 제공하신다는 전통적 가르침을 정교하게 체계화하였다. 이들의 논의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신학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은총·자유의지·섭리에 관한 논쟁을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시켰다.

이와 평행한 시대에 활동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스는 자신의 영성적·목회적 저술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보편적 초대를 강조하였다. 그는 하느님이 모든 이를 향해 자비를 베푸신다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언어로 제시하며,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이해시키려 했다.

이렇게 해서 몰리나와 수아레스가 학문적 차원에서 은총과 구원의 보편성을 논의했다면, 프란치스코 살레스는 동일한 교회의 가르침을 영성적·실천적 맥락에서 표현하였다. 서로 직접적으로 연계된 체계를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저술은 모두 하느님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향한 은총을 제공하신다는 교회의 일관된 전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6. 20세기: 아퀴나스 노선의 공식적·결정적 수용

 

20세기에 이르러 카를 라너는 아퀴나스와 스콜라 전통에서 논의된 ‘암묵적 열망(votum implicitum)’ 구조를 현대 신학과 철학의 개념 언어로 재해석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다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배경으로,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익명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 개념을 제시하였다. 라너의 작업은 아퀴나스의 견해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스콜라 신학에서 형성된 구조를 현대적 상황 속에서 해석한 시도로 평가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16항과 《선교 교령》(Ad Gentes) 7항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교회 밖의 이들에게도 다양한 방식으로 현존하며, 양심을 성실히 따르는 자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진술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교회의 전통 속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은총의 보편성 이해를 현대 세계와 종교다원적 상황 속에서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1992년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846–848항과 1260항에서 세례의 필요성과 더불어 세례의 열망(votum baptismi)에 의한 구원 가능성을 명시하며,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통일된 구조로 제시하였다. 교리서는 중세 스콜라 신학, 트리엔트 공의회, 바티칸 II 문헌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정리함으로써, 구원과 은총의 보편성에 관한 교회 교리를 하나의 일관된 체계 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결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속적 현재성

기독교 역사에서 유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각 서로 다른 시대적 맥락 속에서,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구원 이해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유스티누스는 2세기 저술에서 ‘로고스의 씨앗’(logoi spermatikoi)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 이전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의 흔적이 작용할 수 있다고 진술하였다. 아퀴나스는 세례의 열망(votum baptismi)과 같은 성사적 열망 개념을 통해, 세례를 실제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역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아퀴나스의 이러한 성사·구원론적 구조는 이후 교회의 공식 문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의화 교령에서 “세례 또는 그 갈망”을 언급하며 성사 열망의 신학적 틀을 명확하게 제시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16항과 《선교 교령》(Ad Gentes) 7항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교회 밖의 이들에게도 도달할 수 있다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현대적 언어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문헌들은 아퀴나스의 구원론적 구조뿐 아니라 성경과 교부 전통, 그리고 이후의 신학적 논의를 함께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 846–848항과 1260항에서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세례의 열망 또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성실한 응답이 구원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한다. 이처럼 교회는 다양한 시대의 신학적 통찰을 종합하여 구원에 관한 교리를 제시해 왔으며, 아퀴나스의 사상은 그러한 전통 안에서 지속적으로 참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