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케리그마의 기원과 신약성경적 정립
‘케리그마’(κῆρυγμα)는 ‘공식적으로 선포하다’라는 의미의 케뤼쏘(κηρύσσω)에서 유래하며, 본래 왕의 명령이나 승전보를 도시 전체에 알리는 전령의 공표 행위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은 이 개념을 새롭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음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공적 외침으로 재정립한다. 예수의 첫 말씀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이러한 의미의 원형적 선포이며, 초대교회는 이 중심 메시지를 십자가와 부활 사건 안에서 확장하여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 케리그마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권위 있게 선포하여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초대교회의 핵심 복음 외침이며(행위), 동시에 그 외침의 메시지(내용 자체)이다(Kerygma is the authoritative proclamation that the kingdom of God has already come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and it is at the same time the very message that calls people to repentance and faith)
2. 초대교회 케리그마의 구조와 의미
C. H. Dodd는 사도행전의 설교들을 분석하면서 초대교회 케리그마가 일정한 흐름을 이룬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그가 밝힌 여섯 가지 요소는 (1) 구약 예언의 성취, (2) 예수의 사역과 십자가, (3) 부활, (4) 성경 증언, (5) 성령 강림과 교회 탄생, (6) 회개와 세례의 촉구이다.
이 구조는 단순한 사건의 배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현재의 청중에게 삶의 전환을 요구하는 실존적 호소라는 점을 드러낸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전한 부활 전승은 이러한 케리그마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담아낸 형태이며, 초기 교회의 신앙과 공동체 형성에서 결정적 위치를 차지했다.
3. 20세기 케리그마 신학의 두 흐름: 불트만과 반불트만
루돌프 불트만은 근대인의 세계관 속에서 신약의 신화적 요소가 이해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케리그마를 실존적 결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재해석했다. 그의 해석학은 인간이 말씀 앞에서 ‘지금 여기’의 결단으로 응답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지만, 역사적 사건성을 희생시키고 결국 부활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실존적 사건”으로 축소하는 주관주의에 빠진다는 결정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쿨만, 예레미아스, 라이트는 케리그마의 실존적 의미와 역사적 실재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서사를 통해 십자가와 부활을 해석하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 이야기의 절정이 실재로 일어났고 그 사건이 세계를 새롭게 하는 전환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성과 신학적 깊이를 동시에 회복한다는 점에서 현대 신약학의 균형 잡힌 방향을 대표한다.
4. 포스트모던 상황과 케리그마의 재의미화
포스트모던 사유는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메시지를 권력 담론으로 의심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케리그마의 본래적 성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케리그마는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아니라, 억눌린 자를 향한 대안적 세계의 개시였기 때문이다.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언어가 억압적 현실을 흔드는 상상력의 힘이라고 보며, 케리그마를 기득권의 언어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의 음성으로 이해한다. 밴후저 역시 언어행위론을 통해 케리그마가 단순 정보가 아니라 새로운 실재를 여는 수행적 증언임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 해체의 시대는 오히려 케리그마가 지닌 전복적 성격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간이다.
5. 한국 교회를 향한 케리그마의 재소환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는 성장주의와 번영주의 담론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역설을 주변화해 왔다. 오늘날 일부 대형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십일조하면 100배 축복”이라는 식의 설교가 마치 케리그마인 양 전해지는 현실은, 초대교회의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외침과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케리그마는 약함과 자기 비움 속에서 드러나는 십자가의 역설, 부활의 공공적 의미, 그리고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회개의 확장이다. 이러한 회복은 케리그마를 다시금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화해,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창조적 메시지로 되돌리는 길이 된다.
6. 맺는말: 사건과 선포의 현재성
케리그마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요 1:14)의 연속이며, 성령의 역사 속에서 지금도 인간의 삶을 흔들고 새롭게 하는 살아 있는 공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근원적 사건이며, 그 사건은 오늘도 회개와 믿음을 요구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21세기 케리그마를 ‘약자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창조를 새롭게 하는 부활의 증언’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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