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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은 시대와 성스러움의 회복: 예수의 복음과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사상

by modeoflife 2025. 10. 9.

 

 

Ⅰ. 서론 — 빛을 잃은 시대

 

현대인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자본과 정보의 흐름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인간의 삶을 연결한다. 우리는 과거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속도로 지식을 축적하고, 편리함을 창조하며,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깊은 내적 공허가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이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설명이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보장하지 못한다.

 

정치적 불의와 경제적 불평등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문화적 단절과 소외는 오히려 더 미묘한 형태로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들고 있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사회는 개인을 효율성과 경쟁의 논리 속에 가두고,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질문 — '나는 왜 사는가', '어디로 향하는가' — 에 대한 사유의 여지를 점점 좁혀가고 있다. 그 결과, 일부는 이러한 현실을 두고 "오늘의 시대는 어둠의 시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어둠을 단순히 사회 구조의 실패나 제도의 부재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보면, 현대의 위기는 인간이 자신 안에 내재한 신성(神性), 곧 존재의 근원적 차원을 인식하고 그것과 관계 맺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에서 비롯된다. 과학과 이성이 세계를 분해하고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인간이 본래 지녔던 경외와 초월의 감각은 점점 희미해졌다. 이러한 상실은 단순한 심리적 공허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세속화된 데에서 기인한 영적 공허, 곧 '성스러움의 상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예수의 복음과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철학은 의미 있는 대화를 이룬다. 두 사상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맥 속에 있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을 단순히 생물학적·사회적 존재로 보지 않고, 본질적으로 성스러운 존재, 다시 말해 초월과 의미를 추구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로 이해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러한 신성의 회복을 실천적 사랑과 정의의 행위를 통해 제시하였으며, 엘리아데는 이를 종교적 경험의 보편 구조 속에서 설명하였다. 따라서 두 사상의 만남은 단순한 비교를 넘어, 현대인이 직면한 영적 공허를 해석하고 극복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결국 현대는 어두운 시대일 수 있으나, 그 어둠의 본질은 절망이 아니라 성스러움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망각의 상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망각을 자각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금 빛을 향한 길 위에 서게 된다.

 

Ⅱ. 예수의 복음 — 인간 존재의 회복

 

예수의 복음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의 창시로 이해될 수 없다. 그는 제도나 교리를 세우려 한 인물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닌 존엄과 진실을 회복하도록 부르는 존재론적 혁명가였다. 그의 관심은 신앙 체계의 외적 확립보다,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되찾는 데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정치나 경제의 특정 제도에 대한 직접적 논평이라기보다, 그 제도들이 인간을 수단화하거나 억압할 때, 사랑과 정의라는 내적 원리를 통해 그것을 전복시키려는 영적 저항의 메시지였다.

 

그의 유명한 말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 22:21)는 흔히 세속과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는 선언으로 읽히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깊은 인간학적 통찰이 깔려 있다. 그것은 인간이 세속 권력에 종속된 피지배자가 아니라, 신적 질서와 자유의 주체라는 선언이었다. 예수에게서 '가이사'는 단순한 정치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구속하는 모든 형태의 세속적 지배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말은 외적 복종의 지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영적 주권을 회복하라는 요청이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억압과 유대교 제도 종교의 경직된 율법주의 속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자유와 존엄을 되찾게 하는 근원적 해방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과 함께하며, 인간의 가치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가 단지 '약자의 편'에만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는 사회적 위치나 도덕적 평판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접근했다. 부자 세리 삭개오, 유대 지도자 니고데모, 그리고 로마의 백부장과 같은 인물들과의 만남은, 그의 복음이 계층이나 집단의 경계를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외적 조건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 곧 진리를 향한 개방성과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였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사회적 정의를 넘어서는 존재의 회복의 복음이다. 그는 가난한 자와 부자를 구분하지 않고, 의로운 자와 죄인을 가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안에 숨겨진 신성(神性)을 깨닫고, 그 신성이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예수에게 있어 '구원'은 특정 종교 제도나 교리를 통과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잃어버린 성스러움의 감각을 다시 회복하는 존재론적 행위였다.

 

그의 복음은 세상의 제도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혁명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내면이 사랑과 정의로 회복될 때, 그 변화가 사회와 세계로 확장될 것이라 믿었다. 다시 말해, 그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먼 미래의 신비한 장소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고 진리를 따를 때 열리는 존재의 새로운 방식이었다.

 

결국 예수의 복음은 인간에게 "너는 더 이상 세상의 소유물이 아니라, 신의 형상을 지닌 자유로운 존재"라고 선언하는 존재 회복의 초대장이었다. 이 초대는 종교적 구원의 약속이기 이전에,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 속 신성에 응답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의 전환에 대한 부름이었다.

 

Ⅲ. 엘리아데의 통찰 — 성스러움의 퇴락과 현대의 어둠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20세기 종교학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성스러움에 대한 경험"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적으로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즉 신성한 질서와 교감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고대 사회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노동, 식사, 결혼, 심지어 죽음—는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신성한 질서(cosmos)에 참여하는 행위였다. 고대인은 세계를 단순한 물질적 공간이 아니라, 의미와 신비가 깃든 상징적 공간으로 인식했다. 그는 땅을 갈 때 신의 창조 행위를 재현했고, 축제를 통해 신과 인간의 시간을 연결했다. 삶 전체가 '성스러움의 리듬'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인간은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급격히 멀어졌다. 과학혁명과 합리주의, 자본주의의 확산은 세계를 신비와 의미의 장이 아닌 객관적 사실과 효율의 체계로 바꾸었다. 엘리아데는 이 과정을 "탈신성화(de-sacralization)"라 부른다. 인간은 세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초월의 차원을 제거했다. 세상은 더 이상 '성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측정과 계산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은 신비를 해명했지만, 그 대가로 의미의 지평을 잃었다.

 

이러한 세속화의 결과, 현대인은 풍요 속에서도 방향을 잃은 존재가 되었다. 엘리아데는 이런 인간을 "호모 프로파누스(homo profanus)"—즉, 성스러움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이라 부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우주적 질서 속에 위치시키지 못하고,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성취라는 좁은 틀 안에서 삶을 해석한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 구조 속에는 여전히 초월을 향한 그리움, '성스러움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불일치—초월을 갈망하지만 그것을 상실한 상태—가 현대인의 불안을 낳는다. 엘리아데에게 현대의 어둠은 기술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중심을 잃은 인간의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이를 단적으로 "탈의미화된 풍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은 물질적으로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지만, 동시에 이유를 잃은 노동, 목적을 잃은 소비, 관계를 잃은 사회 속에 살아간다. 인간은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지만, 더 이상 그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엘리아데의 언어로 말하자면, 현대인은 더 이상 '세계 안에서 신을 경험하는 능력', 곧 경외의 감각을 상실한 존재다.

 

이 현상 자본가와 의사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본가는 생산성과 이윤을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그는 부와 성장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으며,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가 섬기는 신은 진정한 구원이나 의미를 주지 못한다. 자본은 스스로 목적이 될 때,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대신 끝없는 결핍과 경쟁의 신화로 몰아넣는다. 그는 풍요 속에서도 불안하고, 성공 속에서도 허무하다.

 

한편,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존재이지만, 현대 의학의 구조 속에서는 종종 기술자적 존재로 축소된다. 그는 질병을 신비나 운명으로 보지 않고, 단지 신체적 결함으로 해석한다. 물론 이는 인간 생명의 연장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치유'의 신성한 의미를 잃게 만들었다. 의사는 인간의 몸을 고치지만, 그 영혼을 돌보지 않는다. 그는 생명의 기술자는 될 수 있지만, 생명의 경외를 아는 치유자는 되지 못한다. 엘리아데의 관점에서 이는 성스러움의 상실이 인간의 전문 영역에까지 침투한 상징적 사례다.

 

결국 자본가와 의사는 각각 현대 문명의 두 축—경제적 합리성과 과학적 이성—을 대표하지만, 그 안에서 공통된 한계를 드러낸다. 그들은 모두 풍요와 지식을 획득했으나, 그 근원적 의미를 상실했다. 엘리아데가 지적한 현대의 어둠은 바로 이런 모순이다. 인간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지만, 그 지식이 존재의 깊이를 밝혀주지 못한다. 세속화된 인간은 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려 하지만, 그 신화는 더 이상 초월로 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이러한 진단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종교적 성향, 즉 성스러움을 경험하려는 본능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탈신성화된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신성의 흔적을 만든다. 그는 현대의 예술, 사랑, 혹은 과학적 탐구 속에서도 초월을 향한 그리움의 흔적을 읽어낸다. 이것은 인간이 완전히 세속적인 존재로 전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엘리아데의 사상은 현대를 단순히 "어두운 시대"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시대를 성스러움이 퇴락한 시대이자, 동시에 그것을 재발견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대로 본다. 탈신성화의 과정은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들었지만, 그 공허 속에서 다시금 신성의 빛을 찾으려는 갈망을 일깨운다. 바로 이 점에서 엘리아데의 통찰은 현대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그 속에 내재한 구원의 가능성을 동시에 포착한다.

 

Ⅳ. 예수와 엘리아데의 만남 — 성스러움의 회복을 향한 길

 

예수와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언어로 인간의 문제를 사유했지만, 그들의 통찰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만난다. 두 사상 모두 인간을 단순히 사회적 존재나 이성적 주체로 한정하지 않고,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존재, 즉 자기 초월을 통해 의미를 찾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인간의 불행은 제도나 구조의 결함 이전에, 존재의 중심을 잃은 영적 상태, 곧 성스러움과 초월의 감각이 소멸한 데서 비롯된다.

 

예수의 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미래의 천상적 공간이나 종교적 제도 속의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 속에서 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상태,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 안의 신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할 때 열리는 존재의 새로운 차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1)고 말하며, 초월이 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인간 관계와 내면의 변화 속에 실현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복음은 인간이 세속의 권력과 탐욕의 구조를 넘어, 자기 안의 신적 가능성을 일깨우는 실천적 초대였다.

 

엘리아데 역시 이러한 인간의 내적 변화를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본래 세계를 성스러운 의미망 속에서 경험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하지만 현대인은 그 세계를 '탈신성화된 현실'로 환원시키며, 의미를 상실한 기능적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렸다. 엘리아데에게 인간의 회복은 다시 성스러움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능력을 되찾는 일, 곧 세속 속에서 신성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 있다. 이때 '성스러움의 체험'은 단지 종교적 신비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다시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 즉 존재를 단순한 사물로 보지 않고 '의미의 현현(顯現)'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인식의 방식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와 엘리아데의 "성스러움의 회복"은 본질적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예수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세속의 질서 속에 신적 질서를 드러냈고, 엘리아데는 인간이 일상의 순간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함으로써 세계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자는 행위의 언어로, 후자는 인식의 언어로 같은 진실을 말한다. 결국 두 사상 모두 세속 속에서 초월을 살아내는 인간, 다시 말해 일상의 현실을 성스러움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예수에게 있어 사랑은 단순한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 속에 임재하시는 방식이었다. 엘리아데에게 있어 성스러움의 체험 또한 초월이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내는 현상, 즉 '하이로파니아(hierophany)'였다. 이 두 개념은 상이한 종교적 전통 속에서도 깊이 닮아 있다. 예수는 "사랑하라"는 행위를 통해,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을 인식하라"는 깨달음을 통해, 모두 신적 실재가 인간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말한 사랑은 하이로파니아의 한 형태이며, 엘리아데가 말한 성스러움의 경험은 곧 사랑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대는 단순히 신성을 잃은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신성의 부재를 자각하기 시작한 시대이며, 바로 그 자각이 회복의 출발점이 된다. 예수의 복음이 인간에게 내면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촉구했듯, 엘리아데의 사상은 인간에게 세속 속에서 성스러움을 재발견하라고 촉구한다. 두 사상은 모두 인간이 스스로의 삶 속에서 신성의 흔적을 되살릴 때, 비로소 현대의 공허와 불안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예수와 엘리아데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한 점에서 만난다. 그것은 '성스러움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잊힌 것'이라는 통찰이다. 인간이 다시 그것을 기억하고 실천할 때, 세속적 현실조차 초월의 장(場)으로 변모할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와 엘리아데의 '성스러움의 회복'은, 모두 인간이 자기 안의 신성을 인식하고 그 빛으로 세계를 비추는 길을 가리킨다. 바로 그 지점에서, 현대의 어둠은 더 이상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되찾기 위한 여정의 서막이 된다.

 

Ⅴ. 결론 — 어둠의 시대를 넘어

 

현대의 위기는 과학의 한계나 정치 제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신비를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변해버린 데서 생겨난 영적 위기다. 인간은 세계를 분석하고 조작하는 능력을 극대화했지만, 그 과정에서 세계를 '느끼는' 능력을 상실했다. 자연은 대상이 되었고, 타인은 기능이 되었으며, 삶은 효율과 경쟁의 논리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결코 이성적 계산으로만 규정될 수 없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고, 초월을 그리워하며, 스스로를 넘어서는 존재다. 바로 이 초월의 능력이 잃어버린 신성, 즉 성스러움의 감각을 회복할 가능성의 근거가 된다.

 

예수의 복음과 엘리아데의 사상은 이 문제의 해답을 서로 다른 언어로 제시한다. 예수는 사랑을 통해,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의 체험을 통해 인간이 다시 자기 중심으로, 더 정확히 말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갈 길을 제시했다. 예수의 복음은 인간이 사랑의 행위를 통해 신의 형상을 회복하는 여정이며, 엘리아데의 종교철학은 인간이 세속 속에서 신성의 흔적을 인식함으로써 세계의 의미를 되찾는 여정이다. 두 길은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그것은 세속 속의 초월, 일상 속의 신성이라는 새로운 인간 이해의 지평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대는 과연 어두운 시대인가?"라는 질문은 다시 묻혀야 한다. 과연 '어둡다'는 판단은 절망을 전제하지만, 엘리아데와 예수의 메시지는 그 어둠이야말로 빛을 향한 각성의 조건임을 일깨운다. 인간은 성스러움을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상실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것의 가치를 자각하게 된다. 어둠은 신성의 부재가 아니라, 신성을 다시 찾기 위한 침묵의 공간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어둠은 끝이 아니라 회복의 서막, 부재를 통한 재발견의 가능성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하며, 인간 내면 속에 빛의 씨앗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가르쳤다. 엘리아데 역시 인간이 본래적으로 호모 렐리기오수스, 즉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 두 통찰은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이 사랑의 행위를 통해 타인과 세계를 다시 성스럽게 바라볼 때, 기술 문명과 세속 질서 속에서도 신성은 새롭게 현현한다. 다시 말해, 구원은 초월의 세계나 미래의 약속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삶 속에서, 세속을 성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신비한 교리나 초자연적 체험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순간 속에서 신성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에 경외로 응답하는 태도—즉 하루를 기적으로 느끼는 능력이다. 이러한 감각이야말로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며, 동시에 다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회복의 통로다. 예수의 복음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드러냈듯, 엘리아데의 철학은 성스러움의 경험을 통해 세계의 의미를 되살린다. 사랑과 경외가 만나는 그 자리에서 인간은 다시 중심을 되찾고,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빛을 인식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결국 현대는 '어두운 시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빛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시대, 성스러움을 망각한 결과로서 그것을 더 깊이 갈망하게 된 시대이다. 어둠은 끝이 아니라, 신성의 귀환을 위한 통로이다. 예수의 복음과 엘리아데의 철학은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인간은 신성을 잃을 때 비로소 어둠을 본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신성을 기억할 때, 다시 빛을 본다."

 

따라서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신비의 저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에서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세속의 일상을 성스럽게 바라보는 눈을 되찾을 때, 이 시대는 더 이상 절망의 시대가 아니라, 빛의 회복이 시작되는 시대로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