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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두 창세기 – 신들의 물결 속에서

by modeoflife 2025. 10. 8.

 

에리두 창세기 개요

  • 개요: 수메르 신화의 고대 텍스트로, 세계와 인류 창조, 대홍수, 첫 도시의 기원을 다룸. 2천년 BCE경 작성된 가장 오래된 창조 신화 중 하나.
  • 창조 부분: 신들이 세계를 창조하고, 점토로 인간(수메르인, '검은 머리 사람들')과 동물을 빚음. 에리두를 첫 도시로 세우고, 신들이 인간에게 도시 건설·농경 지식을 줌.
  • 홍수 이야기: 인간 소음에 화난 엔릴이 대홍수(Abubu)를 일으켜 인류를 멸하려 함. 엔키가 지우수드라(Ziusudra)에게 배 건설을 속삭여 생존케 함.
  • 결말: 홍수 후 지우수드라가 제물로 신들 용서를 구하고, 영생을 얻음. 재창조와 문명의 순환 강조.
  • 의의: 성경 창세기와 유사,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핵심(창조-파괴-재생).

 

제1장: 안개의 속삭임

세상이 아직 꿈속처럼 흐릿한 안개와 젖은 점토로 뒤덮여 있을 때, 하늘의 신 안(An)은 끝없는 청공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땅의 신 키(Ki)를 스쳤다. 키는 부드러운 흙의 품 안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안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숨결이 스치자, 세상에 첫 번째 바람이 피어났다. 바람은 부드럽게 속삭이듯 불어오며, 그 속에서 엔릴(Enlil)이 태어났다. 엔릴의 몸은 폭풍처럼 거칠었고, 그의 손짓 하나에 하늘과 땅이 갈라졌다. 세상의 경계가 그려지는 순간, 우주가 처음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엔릴이 손을 뻗자, 강이 솟아올랐다. 그 강은 은빛 뱀처럼 굽이치며 흘렀고, 끝자락에 에리두(Eridu)가 서있었다. 그곳은 신들의 첫 번째 쉼터, 젖은 땅 위에 솟은 도시였다. 엔키(Enki), 지혜와 물의 신은 그곳에 에-아부 신전을 세웠다. 그는 강물에 손을 담그고, 물결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다. 그의 손끝에서 점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진흙이 형태를 갖추며, 인간이 빚어졌다. 그들은 신들의 그림자처럼 약하고 연약했지만, 눈동자에는 별빛이 스며 있었다. 신들을 섬기고, 제물을 바치며 살아갈 존재들.

처음 인간들은 조용했다. 새벽 안개가 걷히면 제단에 향을 피우고, 신들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 노래는 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고, 신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셨다. 에리두의 거리는 평화로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조차 강물의 속삭임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도시가 불어나고, 인간의 숫자가 세상을 가득 채웠다. 망치질 소리가 돌을 깨뜨렸고, 노래가 웃음과 울음으로 뒤섞였다. 시장은 소란으로 넘쳤고, 밤하늘은 인간들의 외침으로 물들었다. 그 소음은 하늘의 궁정까지 스며들었다. 신들은 더 이상 고요한 밤을 이루지 못했다.

제2장: 번개의 선언

하늘의 신전은 별빛으로 빛났다. 엔릴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은 폭풍구름처럼 검었고,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렸다. "이 소란은 내 잠을 빼앗는다! 그들의 노래는 더 이상 기도가 아니다. 혼돈의 메아리일 뿐이야. 이 세상을 다시 씻어야 해. 물로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한다."

신전 안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과 키는 서로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오직 엔키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강물처럼 잔잔했다. "그들은 우리의 손으로 빚은 자들입니다, 엔릴이시여. 그 소음은 생명의 증거입니다. 그들의 웃음과 울음이 세상을 채우는 것 아닙니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엔릴의 시선이 엔키를 꿰뚫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 듯했다. "자비는 더 큰 혼돈을 부른다. 질서를 위해 모든 것을 물로 녹여야 해. 이 결정은 변하지 않는다."

그 말에 바람의 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의 판관들은 점토판에 날카로운 주먹으로 새겼다. '홍수(Abubu)가 세상을 덮으리라.' 그 명령은 돌처럼 무거웠고, 세상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제3장: 벽 너머의 비밀

그날 밤, 엔키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에-아부 신전의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물의 신비가 스며든 벽 앞에 섰다. 그 벽은 산처럼 단단했고, 안에는 인간들의 운명이 새겨진 상형문자가 빛났다. 엔키는 벽에 이마를 기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벽이여, 내 말을 전하라. 슈루팍의 의로운 자, 지우수드라(Ziusudra)에게 전하라. 세상의 물이 일어날 것이다. 도시의 탑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소리가 영원히 침묵될 테다. 그러나 너는 들어라. 배를 지어라. 네 가족과 모든 생명의 씨앗을 그 안에 모아라. 나의 말은 네 구원이 될 것이다."

엔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신의 규율을 어긴 죄를 짊어지고,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그의 가슴은 인간들의 얼굴로 가득 찼다.

제4장: 꿈의 나무들

슈루팍의 새벽은 평소처럼 고요했다. 지우수드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 – 물의 신비가 스며든 속삭임. 그것은 신의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점토판을 꺼내 꿈의 지시를 새겼다. '배를 지어라. 물이 올 것이다.'

강가로 내려간 그는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며 웃었다. "지우수드라, 미쳤나? 하늘은 맑은데 배라니! 물고기라도 잡으려는 건가?" 한 노인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지우수드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땅의 습한 냄새를 맡으며 중얼거렸다. "하늘이 조용할 때, 땅은 비밀을 준비한다." 그는 나무를 자르고, 피치를 녹여 틈을 메웠다. 배는 거대하게 솟아올랐다. 아래층은 물의 방으로, 동물들의 울음이 메아리쳤고, 위층은 빛의 방으로 가족의 안식처가 되었다. 중심에는 향로가 놓여,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며 신의 은총을 빌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피했다. 하지만 지우수드라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은 피로 물들었지만, 눈에는 결의가 빛났다.

제5장: 물의 분노

바람이 갑자기 변했다. 강물이 거꾸로 솟구치고,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엔릴의 손짓 하나에 제방이 무너졌다.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빗물이 쏟아지며 땅을 삼켰고, 파도가 도시를 집어삼켰다.

하루, 이틀, 사흘, 일곱 날 동안 물은 멈추지 않았다. 산맥이 잠기고, 에리두의 탑이 무너졌다. 지우수드라의 방주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흔들렸다. 바람이 포효하며 배를 몰아쳤고, 안에서는 동물들의 울음이 뒤섞였다. 지우수드라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이 물은 신의 숨결일 뿐이야. 지나가면 다시 땅이 피어날거야." 그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눈빛은 단호했다.

배 안의 사람들은 침묵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끝없는 바다뿐. 하늘은 검은 눈물로 울었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물속에 가라앉았다. 지우수드라는 밤마다 향을 피웠다. "엔키여, 당신의 자비를 믿습니다."

제6장: 고요의 산

시간이 흘러 바람이 잦아들었다. 지우수드라는 문을 열었다. 세상은 잿빛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물결은 고요했다. 그는 새를 날렸다. 먼저 비둘기. 그것은 피곤한 날개로 돌아왔다 – 쉼터가 없었다. 다음 제비. 그것도 돌아왔다. 마지막 까마귀는 날아오르자마자 사라졌다. 지우수드라는 무릎을 꿇었다. "홍수가 물러갔구나. 신들의 분노가 끝났다."

방주는 험준한 산 꼭대기에 멈춰 섰다. 그 산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땅으로 내려섰다. 발밑의 흙은 아직 축축했지만, 공기에는 희미한 풀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는 즉시 제단을 쌓고 향을 피웠다.

제7장: 피어오르는 연기

제단 위에 불꽃이 타오르자, 향기가 피어났다. 지우수드라는 무릎 꿇고 신들의 이름을 불렀다. "오 안, 오 엔릴, 오 엔키, 오 닌후르사그여. 당신들의 뜻이 나를 통해 흘렀나이다. 이제 분노를 거두소서. 이 제물이 증거가 되게 하소서."

연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신전의 문을 두드리며 엔릴의 궁정에 닿았다. 엔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가 풀렸다. 엔키가 앞으로 나섰다. "보십시오, 엔릴이시여. 그가 제물을 바칩니다. 그의 마음은 순수합니다. 그의 생명은 신성하니, 용서하소서."

엔릴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라. 그는 인간이면서 신의 뜻을 따른 자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

제8장: 빛의 문턱

강의 입구,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곳에서 지우수드라는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자국은 물결에 스러졌고, 그림자는 사라졌다. 신들은 그를 하늘과 땅의 경계로 이끌었다. "지우수드라에게 신처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 바람이 불자, 강물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 파문은 세상을 돌며, 새로운 생명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제9장: 흙의 속삭임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부드러운 흙이 남았다. 그 흙에서 새싹이 돋아났고, 사람들은 다시 집을 지었다. 그들은 신들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며, 지우수드라의 이야기를 불렀다. "그는 신의 꿈을 본 자였다. 그의 손이 세상을 구했고, 그의 침묵이 신들의 분노를 녹였다."

매년 홍수가 끝나는 날, 그들은 강가에 모여 향을 피웠다. 연기가 오르면 바람이 불었고,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물이 씻고, 흙이 숨쉬는 법. 이것이 영원의 순환이다."

제10장: 영원한 노래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도, 에리두의 강은 여전히 빛났다. 그 물에는 지우수드라의 기억이 스며 있었다. 사람들은 강가에 앉아 그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 세상은 물에 잠겼고, 오직 한 사람의 빛만 남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지우수드라, 신의 침묵 속에서 세상을 구한 자."

그 노래는 바람에 실려 퍼졌고, 새로운 세대의 가슴에 새겨졌다. 창조와 파괴의 순환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신의 그림자였다. 하지만 그 그림자에는 희망의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