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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스파르타, 마지막까지 버틴 전사들 (기원전 480년)

by modeoflife 2025. 4. 20.

 

300 스파르타, 마지막까지 버틴 전사들 (기원전 480년)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 다리우스 1세의 복수를 위해 그리스 정복을 목표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그의 군대는 고대 세계에서 유례없는 규모로, 수십만 명의 병력과 거대한 함대를 동원했다. 이에 맞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연합했지만, 내부 갈등과 열세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는 300명의 정예 스파르타 전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Thermopylae, “뜨거운 문”) 협곡으로 향했다. 이 좁은 통로에서 벌어진 테르모필레 전투(Battle of Thermopylae)는 소수의 그리스군이 페르시아의 거대한 군대를 며칠간 막아낸 전설적인 저항이었다. 스파르타의 300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며 죽음을 택했고, 그들의 희생은 그리스 연합의 단결과 최후의 승리를 위한 불씨를 지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용기, 충성, 희생의 상징으로 역사에 영원히 새겨졌다.

배경: 페르시아의 침공과 그리스의 연합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 시기부터 그리스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기원전 492년과 490년의 원정은 각각 폭풍과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로 실패했지만,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복수를 다짐하며 대규모 침공을 준비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페르시아군을 170만 명으로 기록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7만12만 명(보병, 기병, 보급 부대 포함)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헬레스폰트(다르다넬스 해협)에 배다리를 건설해 건넜고, 1,200척의 함대가 지원했다. 페르시아군은 다양한 민족(메디아,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정예 부대인 “불멸의 10,000인(Immortals)”이 핵심이었다.

 



그리스는 도시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주도했다. 스파르타는 육군 중심의 군사 국가로, 시민 전사(호모이오이)가 철저한 훈련으로 단련되었다. 아테네는 해군과 민주정으로 강했다. 그러나 연합은 내부 갈등으로 취약했다. 북부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에 항복했고, 델포이 신탁은 저항의 무의미함을 예언했다.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이 임박하자, 그리스 연합은 코린토스 회의(기원전 481년)에서 테르모필레 협곡과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했다. 테르모필레는 폭이 좁은 지형으로, 소수의 병력이 대군을 막기에 최적이었다.

레오니다스 1세는 스파르타의 아기아다이 가문 왕으로, 50대 초반의 노련한 전사였다. 그는 300명의 정예 스파르타 전사를 선발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을 둔 성인(20~40세)으로, 죽음을 각오한 이들이었다. 스파르타군 외에도 테스피아이(700명), 테바이(400명), 포키스, 로크리스 등 동맹 도시에서 약 7,000명이 합류했다. 이들은 페르시아의 진군을 지연시켜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를 준비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테르모필레의 지형과 그리스군의 준비

테르모필레 협곡은 그리스 중부, 말리아 만 근처에 위치했다. 협곡은 절벽과 바다로 둘러싸여 가장 좁은 곳(중앙 문)에서 폭이 15~20미터에 불과했다. 북쪽은 에우보이아 섬, 남쪽은 파르나소스 산이 가로막아 대군의 기동을 제한했다. 레오니다스는 협곡 입구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기존의 파이악 방벽(고대 석벽)을 보수했다. 그는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호플리테스)을 중앙에 배치하고, 동맹군을 좌우익과 후방에 배치했다.

스파르타 전사들의 훈련과 장비는 전투의 핵심이었다:

- 훈련: 스파르타의 아고게(교육 체제)는 7세부터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극한의 훈련과 전투 기술을 익혔고, 20세에 호모이오이(시민 전사)가 되었다. 이들은 동료애(필레타이리아)와 명예를 중시했다.
- 무기: 2.5~3미터 길이의 창(도리), 60센티미터 청동 단검(크시포스), 지름 1미터의 둥근 방패(호플론, 청동과 목재).
- 갑옷: 코린토스식 청동 투구, 흉갑, 정강이 보호대. 전체 무게 약 20~25킬로그램.
- 전술: 팔랑크스 대형으로, 방패를 겹쳐 방어벽을 만들고 창으로 찌르는 밀집 전술. 스파르타군은 교대 근무로 체력을 유지했다.

동맹군은 가벼운 장비(가죽 갑옷, 짧은 창)를 사용했으며, 스파르타군만큼 단련되지 않았다. 레오니다스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직접 전선에서 훈련을 지휘했다. 그는 “우리의 창이 부러지면 칼로, 칼이 부러지면 손으로 싸운다”고 선언하며 결의를 다졌다.

테르모필레 전투: 3일간의 치열한 저항

기원전 480년 8월,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에 도착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군의 소규모 병력을 보고 항복을 요구했지만, 레오니다스는 “몰론 라베(Molon Labe, 와서 빼앗아 봐)”라고 답하며 거부했다. 페르시아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 보병: 메디아, 키사이, 아시리아 등 다양한 민족. 가벼운 갑옷(가죽, 천), 짧은 창, 활, 고리버들 방패.
- 기병: 약 1만 명, 페르시아와 박트리아 기병. 활과 투창 사용.
- 불멸의 10,000인: 정예 보병으로, 철제 갑옷, 창, 활, 곡선 검.
- 전술: 대규모 병력으로 정면 돌격, 활로 원거리 공격.

첫째 날: 크세르크세스는 메디아 보병 2만 명을 투입했다. 그들은 파도처럼 돌진했지만, 협곡의 좁은 입구에서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는 철벽이었다. 스파르타군은 방패로 화살을 막고, 창으로 적을 찔렀다. 메디아군은 약 2,000명을 잃고 후퇴했다. 그리스군은 50명 미만의 손실을 입었다. 레오니다스는 병사들을 세 팀으로 나누어 교대 근무를 시키며 체력을 보존했다. 테스피아이와 포키스 병사는 좌우익을 지켰다.

둘째 날: 크세르크세스는 불멸의 10,000인을 보냈다. 이들은 메디아군보다 훈련이 잘된 정예 부대였지만,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불멸의 10,000인은 활로 공격했지만, 그리스군은 방패로 화살을 막고 근접전으로 끌어들였다. 스파르타군은 일부러 후퇴하는 척하며 적을 유인한 뒤 반격하는 전술(페인티드 리트리트)을 사용했다. 이날 페르시아군은 약 3,000명을 잃었고, 그리스군은 약 100명의 손실을 입었다. 크세르크세스는 분노하며 새로운 전략을 모색했다.

셋째 날: 전투의 전환점은 그리스인 에피알테스의 배신이었다. 그는 페르시아군에게 협곡을 우회하는 아노파이아 산길을 알려주었다. 이 경로는 포키스 병사 1,000명이 지키고 있었지만, 불멸의 10,000인이 야간 기습으로 그들을 몰아냈다. 새벽, 레오니다스는 배신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맹군의 대부분(약 6,000명)을 후퇴시키고, 300명의 스파르타군, 700명의 테스피아이군, 400명의 테바이군을 남겼다. 포키스 병사는 산길 방어에 실패한 뒤 퇴각했다.

최후의 전투는 협곡 중앙에서 벌어졌다. 레오니다스는 “오늘 우리는 하데스의 문 앞에서 싸운다”고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스파르타군은 팔랑크스를 유지하며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테스피아이군은 좌익을 지원했다. 테바이 병사는 초반에 싸웠지만, 일부가 항복했다. 페르시아군은 전방과 후방에서 포위 공격을 가했다. 레오니다스는 선봉에 서서 창으로 수십 명을 쓰러뜨렸지만,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의 부하들은 왕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원형 방어진을 형성했다. 스파르타군은 창이 부러지자 단검과 맨손으로 싸웠다. 오후가 되자 그리스군은 전멸했고, 페르시아군은 약 2만 명(헤로도토스 추정, 현대 추정 5,000~10,000명)을 잃었다.

전투의 여파와 역사적 의미

테르모필레 전투는 그리스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전략적 승리였다. 3일간의 저항은 페르시아군의 진군을 지연시켰고, 그리스 연합이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 9월)과 플라타이아 전투(기원전 479년)를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살라미스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은 페르시아 함대 600척을 격파했고, 플라타이아에서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연합군은 페르시아 육군을 물리쳤다. 이 승리들은 그리스를 구했고, 서양 문명의 발전에 결정적이었다.

스파르타의 300인은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통해 전해졌으며, 시인 시모니데스의 비문—“가라, 나그네,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는 그들의 명령을 따랐다”는 테르모필레에 새겨졌다. 현대에는 영화 300으로 대중화되었지만, 실제 전투는 영화보다 더 복잡하고 인간적이었다. 레오니다스와 그의 부하들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자유와 동료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이었다.

전투의 세부적 분석

- 스파르타의 훈련: 스파르타 전사들은 아고게에서 극한의 체력과 전술을 익혔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고, 동료와의 호흡이 완벽했다. 레오니다스는 병사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농담을 나누며 긴장을 풀게 했다.
- 페르시아군의 약점: 페르시아군은 숫자는 많았지만,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통합이 약했다. 협곡의 좁은 지형은 그들의 기병과 전차를 무력화했다.
- 그리스군의 동맹: 테스피아이 병사들은 스파르타만큼 용맹했고, 자발적으로 남아 싸웠다. 테바이 병사는 내부 분열로 일부가 항복했지만, 초반에는 저항했다.

문화적 유산

테르모필레 전투는 서양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스파르타의 전사 정신은 군사적 이상으로 이어졌고, “몰론 라베”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이 전투는 개인의 용기가 공동체를 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민주주의와 자유의 기초를 지킨 전투로 평가된다.

 

# 전쟁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