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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발디, 붉은 셔츠의 독립 전쟁 (19세기 중반)

by modeoflife 2025. 4. 20.

 

가리발디, 붉은 셔츠의 독립 전쟁 (19세기 중반)

19세기 중반, 이탈리아는 외세와 내부 분열로 찢긴 반도였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북부를 지배했고, 프랑스는 교황령을 보호했으며, 스페인 출신의 부르봉 왕조는 양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했다. 이탈리아 통일,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는 불가능한 꿈처럼 보였다. 이 절망 속에서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와 그의 붉은 셔츠(Red Shirts) 군대는 민족주의의 불꽃을 지폈다. 1860년 천인 원정(Expedition of the Thousand)을 통해 가리발디는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정복하며 이탈리아 통일의 길을 열었다. 붉은 셔츠는 단순한 군복이 아니라 자유, 민중, 그리고 이탈리아의 꿈을 상징했다. 그의 혁명은 군사적 기적일 뿐만 아니라, 유럽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역사에 새겨졌다. 이 에세이는 가리발디의 삶, 붉은 셔츠의 기원과 전투, 그리고 19세기 중반 독립 전쟁의 전개를 상세히 탐구하며, 그의 이상과 고뇌를 조명한다.

분열된 이탈리아와 가리발디의 초기 삶

1807년 7월 4일,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니스(현재 프랑스)에서 태어난 가리발디는 해상 무역업자의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사랑했던 그는 15세에 선원이 되어 지중해를 누볐다. 그의 세계관은 항해를 통해 넓어졌고, 1833년 제노바에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를 만나 운명이 바뀌었다.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Young Italy) 운동은 이탈리아를 공화국으로 통일하려는 비전을 제시했고, 가리발디는 이에 헌신했다. 1834년, 그는 피에몬테-사르데냐에서 반란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사형 선고를 피해 남아메리카로 망명했다.

 



남아메리카에서의 14년(1835-1848년)은 가리발디를 혁명가로 단련시켰다. 브라질의 라가무핀 전쟁(1835-1845년)에서 그는 리우그란데 공화국을 위해 싸웠고, 우루과이 내전(1839-1851년)에서는 몬테비데오를 방어하며 이탈리아 군대(Italian Legion)를 조직했다. 1843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축업자용 붉은 셔츠를 군복으로 채택했다. 이 셔츠는 저렴하고 내구성이 강했으며, 피로 얼룩져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붉은 셔츠는 실용성을 넘어 그의 군대, 가리발디니(Garibaldini)의 상징이 되었고, 자유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848년 혁명과 로마 공화국

1848년,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탈리아에서도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가리발디는 우루과이에서 돌아와 이탈리아의 통일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밀라노의 임시 정부를 지원하려 했지만, 피에몬테-사르데냐의 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그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경계하며 거부했다. 1848년 7월, 카를로 알베르토는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장군에게 패배했고, 가리발디는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1849년, 그는 로마로 향해 로마 공화국을 방어했다. 마치니가 이끄는 이 공화국은 교황 피우스 9세가 프랑스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를 떠난 틈을 타 세워졌다. 가리발디는 약 4,000명의 자원병을 이끌고 야니쿨룸 언덕에서 프랑스군(2만 명)과 맞섰다. 1849년 4월 30일, 그는 기습 공격으로 프랑스군을 격퇴했지만, 6월 프랑스의 대규모 공세로 로마는 함락되었다. 가리발디는 부상당한 병사들과 함께 로마를 떠났고, 그의 아내 아니타는 추격 도중 늪지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이 비극은 그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천인 원정: 붉은 셔츠의 기적

1850년대, 이탈리아 통일은 여전히 요원했다. 북부는 피에몬테-사르데냐와 오스트리아(베네치아와 롬바르디), 중부는 교황령, 남부는 양 시칠리아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피에몬테의 총리 카보우르 백작(Cavour)은 외교를 통해 통일을 추진했지만, 가리발디는 민중의 힘으로 이를 이루려 했다. 1860년, 시칠리아에서 농민과 귀족이 부르봉 왕조의 폭정에 반발하며 봉기가 일어났다. 가리발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천인의 출발

1860년 5월 5일, 가리발디는 제노바의 콰르토에서 천인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1,089명의 자원병을 이끌고 낡은 증기선 두 척(피에몬테호와 롬바르도호)에 올랐다. 이들은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 출신으로, 변호사, 의사, 예술가, 학생, 심지어 11세 소년과 남장한 여성(로사리아 몬타사리)까지 포함되었다. 무기는 제노바에서 구한 1853년형 엔필드 소총과 단검, 일부는 녹슨 사벨이었다. 탄약은 부족했고, 군사 훈련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가리발디의 카리스마와 “이탈리아를 위하여!”라는 구호는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

마르살라 상륙과 칼라타피미 전투

5월 11일, 가리발디는 시칠리아 서부 마르살라에 상륙했다. 나폴리 함대는 영국 상선의 방해로 늦게 도착했고, 상륙은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 현지 농민과 반군이 합류하며 그의 병력은 1,500명으로 늘었다. 5월 15일, 칼라타피미 전투에서 가리발디는 3,000명의 나폴리군을 맞았다. 나폴리군은 언덕 위에 배치된 대포와 화승총으로 우세했지만, 가리발디는 병사들을 이끌고 언덕을 돌진했다. 그의 붉은 셔츠 부대는 총검 돌격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렸고, 약 600명의 나폴리군이 전사하거나 도망쳤다. 가리발디군은 30명 사망, 150명 부상으로 승리했다. 이 전투는 시칠리아인들의 열정을 폭발시켰고, 수천 명이 그의 깃발 아래 모였다.

팔레르모와 남부 정복

5월 27일, 가리발디는 팔레르모를 포위했다. 나폴리군 2만 명이 도시를 방어했지만, 그는 밤을 틈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5월 30일, 치열한 시가전 끝에 팔레르모는 함락되었다. 가리발디는 시칠리아의 독재자로 선포되었고, 세금 감면과 토지 분배를 약속하며 민심을 얻었다. 7월까지 그의 병력은 1만 5천 명으로 늘었다. 8월 19일, 그는 메시아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로 진격했다. 나폴리군은 내부 분열로 약화되었고, 9월 7일 가리발디는 나폴리를 무혈 입성했다.

10월 1일, 볼투르노 전투는 원정의 절정이었다. 나폴리군 2만 5천 명이 볼투르노 강변에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가리발디의 2만 명(붉은 셔츠와 시칠리아 자원병)은 기동성과 민중의 지지로 우세했다. 그는 세 방향에서 공격을 지휘했고, 나폴리군은 1,700명을 잃고 후퇴했다. 가리발디군은 300명 사망, 1,300명 부상이었다. 이 승리로 양 시칠리아 왕국은 붕괴했고, 프란치스코 2세는 가에타로 도망쳤다.

통일로의 길

1860년 10월 26일, 가리발디는 테아노에서 빅토르 에마누엘레 2세를 만나 남부 이탈리아를 넘겼다.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공화국을 원했기에 카보우르와 갈등했다. 그는 카프레라 섬으로 은퇴했지만, 통일의 불완전함에 좌절했다.

붉은 셔츠의 전술과 상징성

붉은 셔츠 군대는 정규군이 아니었다. 그들의 강점은 가리발디의 게릴라 전술과 민중의 열정이었다. 주요 전술은:

- 기습과 기동성: 칼라타피미와 팔레르모에서 가리발디는 밤과 지형을 활용해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 총검 돌격: 소총 탄약이 부족할 때, 붉은 셔츠는 총검과 단검으로 돌격했다.
- 민중 동원: 가리발디는 농민과 도시 빈민을 끌어들여 병력을 늘렸다.

붉은 셔츠는 혁명의 상징이었다. 그들의 제복은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를 상징했고, 미국 남북전쟁의 가리발디 가드와 남부의 가리발디 군대가 이를 모방했다. 붉은 셔츠는 가리발디의 이상—평등, 자유, 민중의 힘—을 구현했다.

가리발디의 고뇌와 후기 투쟁

가리발디는 공화주의자였지만, 통일을 위해 왕정과 타협했다. 이는 마치니와의 갈등을 낳았다. 그는 로마를 이탈리아의 수도로 만들고자 했지만, 교황령과 프랑스의 저항에 부딪혔다. 1862년 아스프로몬테와 1867년 멘타나에서 그는 로마를 공격했지만, 피에몬테와 프랑스군에 막혀 체포되었다. 그의 이상은 좌절되었지만, 민중은 그를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사랑했다.

그의 개인적 삶은 비극으로 얼룩졌다. 아니타의 죽음(1849년), 반복된 망명, 그리고 통일 후의 소외는 그를 괴롭혔다. 그는 카프레라 섬에서 농부처럼 살며 소박한 삶을 추구했다. 1882년 6월 2일, 그는 카프레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전쟁의 유산과 붉은 셔츠의 빛

가리발디와 붉은 셔츠는 이탈리아 통일의 기적이었다. 천인 원정은 군사적 성공이자 민족주의의 승리였다. 그러나 통일은 완성되지 않았다. 로마는 1870년에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고, 베네치아(1866년)와 트렌토(1918년)는 더 늦게 합병되었다. 가리발디의 공화국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희생은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었다.

붉은 셔츠는 19세기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헝가리, 폴란드, 그리스의 독립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가리발디는 “두 세계의 영웅”으로, 남아메리카와 유럽의 혁명사에 이름을 새겼다. 그의 붉은 셔츠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국기—녹색(희망), 흰색(평화), 붉은색(용기)—에 담긴 열정으로 여전히 빛난다.

 

# 전쟁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