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과 우울, 비트겐슈타인
거리를 걷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불안"과 "우울"이 현대 한국인의 일상어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경제와 기후, 전쟁 뉴스, 팬데믹 후유증이 겹친 오늘의 세계는 ‑‑ 말 그대로 ‑‑ 언제 무너질지 모를 문장처럼 우리를 흔든다. 이런 시대에 오히려 빛을 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20세기 언어철학의 기수이자 한평생 극단적 내적 동요를 안고 살았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포로수용소에서 자살 충동까지 겪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족의 연이은 자살 소식에 "죽음만이 나를 끝낼 수 있다"고 중얼거렸다. 주변은 그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실존적 불발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바로 그 참혹한 체험이 《논리‑철학 논고》로 알려진 Tractatus의 윤곽을 빚었고, 나중에는 "철학은 치료"라는 후기에 이르게 했다.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사실들의 총체"라 규정하며, 언어가 세계를 거울처럼 비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윤리·종교·가치와 같은 핵심 물음은 언어가 정확히 가리킬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밀려난다. 말할 수 없는 영역과 충돌할 때 사람은 불안을 느낀다. 자신의 고통을 정확히 가리킬 단어를 찾지 못하는 순간, 문장은 입안에서 부서지고 의미는 맴돌 뿐이다.
그러나 철학적 탐구 시기에 들어서면, 그는 "철학은 헛돈질하는 언어의 경련을 풀어 주는 치료 행위"라고 말한다. §133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우리 생각에 안개처럼 낀 혼란을 걷어 주어 불안을 해소한다"고 적었다.
불안은 실체 없는 언어‑환상에서 비롯된다는 진단이다. 어떤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놓여 있을 때, 마음은 어둠을 찍듯 우울로 기운다. 치료는 새로운 이론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여기에 유명한 사적 언어 논변이 자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직 나만 이해할 수 있는 완전히 사적인 언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고통이든 불안이든, 그것을 규정하는 규칙은 타자와 공유되는 행위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우울은 스스로를 절연시키며 심해지지만, 언어‑게임 속으로 한 발 들어오는 순간 이미 공적 규칙이 작동해 새로운 길을 튼다. "통증"이라는 단어를 배우는 어린아이는 자신의 신음과 타인의 공감을 함께 배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치유는 혼자 꾸민 언어에서 벗어나 타자와 접속하는 사건이다.
그는 또 "영원한 삶은 현재에 사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현재'는 달력적 순간이 아니라, 언어가 제 기능을 회복해 세계가 다시 또렷해지는 순간이다. 우울에 잠긴 이는 시간 감각이 일그러지지만, 언어를 통해 "지금‑여기"를 다시 세우면 순간이 선명해진다. 그러니 철학의 역할은 위로의 미사여구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단어답게 써서 삶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실제 임상 심리나 상담 장면에서도 "문제의 재명명"은 강력한 개입 기법으로 쓰인다. 비트겐슈타인적 치료는 여기에 철학적 깊이를 부여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설명할 때 "나는 망가졌다" 대신 "나는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헤맨다"라고 바꾸는 순간, 불안은 일차적인 언어‑문제가 되고 해결 또한 가능해진다. 연구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과 정신분석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둘 다 "말의 재배치"를 본질로 삼는다고 분석한다.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은 불안을 삶의 필연적 배경음으로 보되, 그 배경음을 증폭시키는 것은 뒤틀린 언어라고 말한다. 우울 또한 표현 부재와 세계 단절에서 심화된다. 그러므로 그가 권하는 '치료'는 거창한 교리나 신념이 아니라, 내 말이 걸려 있는 매듭을 풀고 타자와 규칙을 공유하는 언어‑게임에 다시 참여하는 일이다. 말이 제 자리로 돌아올 때, 불안은 경고음을 멈추고 우울은 조용히 균열을 드러내며, 삶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오늘, 난폭한 소음처럼 몰려드는 불안과 우울이 우리를 짓누를 때, 비트겐슈타인은 속삭인다. "설명이 너를 옭아매는 곳에서 벗어나라. 말이 길을 잃었으니, 가장 가까운 생활 속 말‑쓰기부터 살펴보라." 그 말‑쓰기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와 다시 고리를 잇고, 존재의 부담을 견디는 작은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불확실성과 우울, 하이데거의 영성 (2) | 2025.04.17 |
|---|---|
| 불안과 우울, 그리고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적 위로 (2) | 2025.04.17 |
| 코메니우스와 하이데거 융합, 영성 (2) | 2025.04.17 |
| 하이데거의 시적(詩的) 거주: 존재와 세계를 다시 잇는 사유의 길 (2) | 2025.04.17 |
| 시간과 종말의 신학적 의미 (1) | 2025.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