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과 우울, 그리고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적 위로
서울의 봄밤은 화려한 간판과 인공지능 광고로 빛나지만, 그 밝음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무겁다. 취업과 주거, 기후 위기와 전쟁 뉴스, 팬데믹 후유증까지 ― 현대인은 예측 불가한 사건들 사이를 오가며 만성적 불안과 깊은 우울을 경험한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1926‑2024)은 이러한 시대의 정서와 맞닿은 신학을 남겼다. 그는 “희망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오고 계시다는 ― 따라서 오늘이라도 삶을 다시 빚어 볼 수 있다는 ― 체험”이라고 말한다. 그의 사상은 불안과 우울을 단순히 개인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다시 묻는다.
포로수용소의 절망에서 태어난 희망
몰트만은 18세에 독일 군복을 입고 전선에 끌려갔고, 이듬해 영국군 포로가 되었다. 벨기에·스코틀랜드·잉글랜드 수용소를 전전하던 스무 살 청년은 친구가 눈앞에서 쓰러져 가는 광경을 매일 목도했다. 절망과 죄책감이 교차하던 어느 날, 미군 군목이 건넨 작은 성경이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됐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의 절규에 그는 자신의 심정을 보았고, 거기서 역설적인 위로를 경험했다. 감옥에서 찾은 이 ‘동행하는 하나님’이 훗날 그의 대표 저서 《희망의 신학》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담긴 핵심 경험이 된다.
《희망의 신학》: 미래가 현재를 되살리는 운동
전후 독일에는 무력감과 허무가 지배적이었다. 몰트만은 예언자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라고 요청했다. 그는 부활을 “미래의 조각이 현재 안으로 파고든 사건” 으로 해석한다. 이 미래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지금 고통받는 이들을 ‘지금‑여기’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다. 그래서 불안은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생기지만, 역설적으로 미래가 열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희망 안에서 불안은 무의미한 진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영적 경보음으로 전환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우울 속에 내려오시는 하나님
몰트만이 “신학은 십자가를 피해 갈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는 고통의 전능성에 굴복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 버림받음의 심연까지 내려왔음을 알린다. “절망하는 심장은 고통을 겉돌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 깊은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우울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이 메시지는 ‘침묵하는 하늘’이 아니라 ‘함께 죽음을 통과한 하나님’을 제시한다. 몰트만은 이 체험을 “새벽이 오기 전 가장 깊은 어둠”으로 비유하며, 그 어둠 안에 이미 부활의 빛이 스며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성령의 숨결과 치유의 공동체
몰트만은 삼위일체를 정적 구조가 아닌 “열려 있는 춤” 으로 보았다. 성령은 미래를 현재로 끌고 오는 ‘하나님의 생기’이며, 절망한 영혼에게 깊은 호흡처럼 침투한다. 그의 책 《생명의 영》은 성령을 폐허가 된 삶에 숨을 돌게 하는 “해방의 바람”으로 묘사한다. 우울이 세계와의 연결을 끊어 버릴 때, 성령은 이 단절을 잇는 실존적 환기이자 공동체적 연대의 에너지다. 이 관점에서 교회는 상담실이나 도피처를 넘어, 성령이 고통받는 몸과 마음에 호흡을 불어넣는 임시병원이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 건네는 실천적 함의
몰트만은 희망을 “역사적 상상력”이라 불렀다. 불안과 우울이 개인의 심리상담실에만 머물 때, 우리는 구조적 고통을 재생산한다. 한국의 청년 실업, 기후 재난, 세대·젠더 갈등은 기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몰트만 식 희망은 ‘먼 나중’의 유예가 아니라, 학교·직장·정치·교회가 함께 만드는 구조적 환대다. 이는 구체적 정책, 공정한 경제, 생태적 삶의 방식과 호흡할 때 비로소 체현된다. 불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정의”를 향한 감각, 우울은 “이미 잃어버린 관계”의 슬픔이므로, 공동체 전체가 이 감각과 슬픔을 창조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맺는 말
몰트만은 늘 “신학은 영혼의 스승이 아니라, 고통의 동반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희망 신학은 불안을 억누르는 진통제가 아니다. 오히려 불안을 해체하여 미래를 향한 깨어 있음으로 바꾸고, 우울 속에 내려와 눈먼 고통을 해석 가능한 언어로 바꾼다. 하나님은 멀리서 손짓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어둠, 수용소의 철조망, 서울 밤하늘의 빛공해 한가운데 서서 “내가 여기 있다”고 속삭이신다. 그러므로 불안은 길을 잃은 표지판이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새벽의 문이며, 우울은 그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깊은 밤이다. 몰트만이 남긴 희망의 불씨를 품고 우리는 다시 묻는다. “내일의 하나님이 이미 오늘 내 숨결 속에 있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감히 꿈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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