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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렌(또는 갈레노스), 해부학으로 의학을 뒤흔든 거장 (129~216년)

by modeoflife 2025. 4. 4.

 

갈렌(또는 갈레노스), 해부학으로 의학을 뒤흔든 거장 (129~216년) 

129년, 로마 제국 동부의 페르가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 후에 갈렌으로 불린 그는 고대 세계의 의학을 집대성한 거장이자, 해부학의 칼끝으로 생명의 비밀을 파헤친 탐구자였다. 그의 손은 동물의 몸을 열었고, 그의 눈은 인간의 생리를 꿰뚫었으며, 그의 펜은 수천 년간 의사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하지만 갈렌은 단순한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자만과 열정, 실수와 고집이 뒤섞인 인간이었고, 그의 질문—“몸은 어떻게 살아 숨 쉬는가? 생명은 어디서 비롯되는가?”—은 의학의 지평을 뒤흔들었다.

어린 시절과 운명의 시작

갈렌의 출발은 부유한 가정에서였다. 그의 아버지 니콘은 페르가몬의 저명한 건축가이자 수학자였고,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계몽주의자였다. 니콘의 집은 책과 토론으로 가득 찼고, 어린 갈렌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글을 읽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철학자나 수학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기원전 145년경, 니콘이 꿈에서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꿈은 16세 갈렌을 페르가몬의 아스클레피온—치유와 신앙이 만나는 신전—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 칼을 들었고, 환자의 상처를 꿰매며 생명의 신비에 매료되었다.

 



갈렌의 교육 여정은 끝없는 방랑이었다. 그는 스미르나(오늘날 이즈미르)에서 약초학을, 코린토스에서 해부학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의학 이론을 공부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인간 두개골을 연구하며 뇌와 신경의 연결을 상상했고, 이집트의 오래된 지식은 그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20대 초반, 그는 페르가몬으로 돌아와 운명적인 첫 직업을 얻었다. 검투사 치료 의사였다.

검투사의 피에서 태어난 해부학

페르가몬은 검투 경기로 유명했고, 갈렌은 4년간(153~157년) 검투사의 주치의로 일했다. 칼에 찔리고 창에 찢긴 몸을 치료하며, 그는 살아있는 해부학 교과서를 만났다. 근육이 뼈를 당기고, 힘줄이 관절을 움직이며, 신경이 통증을 전달하는 모습을 직접 봤다. 한번은 검투사의 갈비뼈 사이로 칼이 심장을 스쳤을 때, 그는 심장이 멈추면 생명이 끝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경험은 단순한 치료를 넘어, 그의 해부학적 통찰의 토대가 되었다.

로마법은 인간 해부를 금지했기에, 갈렌은 동물을 해부했다. 그는 원숭이(특히 바바리 원숭이), 돼지, 개, 소, 심지어 코끼리까지 열었다. 원숭이의 손을 해부하며 인간 손의 구조를 추측했고, 돼지의 척수를 자르며 신경계의 비밀을 풀었다. 그가 척수를 자른 돼지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기록한 순간은 고대 의학의 혁명이었다. 그는 신경이 뇌에서 명령을 전달한다고 확신했고, 뇌를 “영혼의 자리”로 보았다—아리스토텔레스가 심장을 지능의 중심이라 믿던 시대에 이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로마의 무대: 실험과 명성

157년, 28세의 갈렌은 로마로 갔다. 로마는 제국의 심장부였고, 그의 야망에 딱 맞는 무대였다. 그는 공개 강연으로 명성을 쌓았다. 한번은 돼지를 해부하며 성대 신경을 잘랐다. 돼지가 비명을 멈추자 관객들은 경악했고, 갈렌은 소리가 성대 진동에서 온다고 설명했다. 이 실험은 단순한 쇼가 아니었다. 그는 신경계가 몸을 통제한다는 증거를 보여줬다.

갈렌은 동맥과 정맥의 차이를 구분하며, 동맥이 밝은 피(산소가 풍부한 혈액)를, 정맥이 어두운 피를 나른다고 관찰했다. 그는 심장이 피를 펌프질한다고 믿었지만, 피가 간에서 만들어져 몸을 통해 소모된다고 착각했다. 폐를 통한 순환은 몰랐고, 동맥과 정맥이 연결된다는 개념도 놓쳤다. 이 오류는 그의 한계였지만, 혈액의 움직임을 고민한 최초의 시도였다.

그의 실험은 대담했다. 그는 동물의 목을 조여 뇌로 가는 혈류를 차단했고, 뇌가 생명을 유지하는 핵심임을 증명했다. 신경을 하나씩 자르며 다리, 팔, 얼굴의 반응을 기록했고, 신경계 지도를 그렸다. 이런 실험은 위험했고, 때론 동물이 고통 속에 죽었다. 하지만 갈렌은 멈추지 않았다. “진실은 실험에서 나온다”는 그의 신념은 과학의 씨앗이었다.

의학의 체계: 백과사전을 쓰다

갈렌은 500편 이상의 저서를 썼다. 해부학적 절차(On Anatomical Procedures)는 근육, 뼈, 신경의 구조를 상세히 다뤘고, 치료 방법(On the Method of Healing)은 질병별 치료법을 정리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체액 이론—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균형이 건강을 결정한다는 믿음—을 계승했지만, 이를 실험으로 보강했다. 그는 환자의 맥박을 재고, 체온을 관찰하며, 체액 불균형을 진단했다.

그는 약초학에도 능했다. 와인에 허브를 섞어 소독제로 쓰고, 아편으로 통증을 다스렸다. 외과 수술에도 뛰어났다. 한번은 검투사의 찢어진 창자를 꿰매며 생명을 구했고, 백내장 수술법을 개선했다. 그는 의사들에게 “책만 읽지 말고 몸을 보라”고 촉구했다. 그의 글은 실용적이면서도 철학적이었고, 의학을 예술과 과학의 결합으로 봤다.

인간 갈렌: 빛과 그림자

갈렌은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경쟁자를 “무지한 바보”라 비난했고, 자신의 이론을 절대적 진리로 여겼다. “내가 발견한 것은 신의 설계다”라는 그의 태도는 비판을 낳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심장이 감정과 지능의 중심이라 믿었고, 뇌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 피 순환의 오류도 그의 고집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실험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가설에 맞지 않는 결과는 무시했다.

그의 삶은 고난도 있었다. 166년, 안토니누스 역병이 로마를 휩쓸자 그는 잠시 도시를 떠났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를 불렀지만, 갈렌은 페르가몬으로 피신했다. 이 선택은 “겁쟁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169년 로마로 돌아와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고,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아들 코모두스를 치료하며 명성을 회복했다. 191년, 로마 대화재로 그의 원고 일부가 불탔을 때도 그는 다시 썼다. 216년, 약 87세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원인은 미스터리지만,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들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유산: 의학의 빛과 그림자

갈렌의 저서는 아랍 학자 알 라지와 이븐 시나에 의해 번역되었고,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 필사되었다. 그의 체계는 1,500년간 의학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의 오류—피 순환 착각, 인간 해부 부족—는 문제였다. 16세기, 베살리우스가 인간 해부로 그의 실수를 바로잡았고, 윌리엄 하비가 순환계를 증명하며 갈렌의 시대를 끝냈다. 그러나 이 비판조차 그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그의 체계가 없었으면 의학 혁명도 없었다.

갈렌은 현미경도, 마취제도 없이 생명을 탐구했다. 검투사의 피 묻은 모래 위, 돼지의 해부대에서, 그는 몸의 비밀을 열었다. 그의 칼은 고대 의학의 문을 열었고, 그의 펜은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길을 썼다. 2세기 로마의 먼지 쌓인 거리에서 시작된 그의 질문—“이 몸은 어떻게 살아 있는가?”—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과학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