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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토스테네스, 지구 둘레를 잰 최초의 측량가 (기원전 276~194년)

by modeoflife 2025. 4. 4.

 

에라토스테네스, 지구 둘레를 잰 최초의 측량가 (기원전 276~194년)

기원전 276년경, 북아프리카 키레네의 뜨거운 모래 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에라토스테네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강한 사랑”을 뜻했으며, 그는 평생 땅과 하늘, 숫자와 별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진 삶을 살았다. 고대 세계에서 그는 단지 학자가 아니었다.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시인, 역사가—그의 호기심은 경계를 모르는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동료들은 그를 “펜타틀로스”(다섯 가지에 능한 사람)라 부르며 놀렸지만, 그는 스스로를 끝없는 질문쟁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늘은 왜 저렇게 빛나는가?” “바다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은 얼마나 클까?”

에라토스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빛났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건설된 이 도시는 헬레니즘 시대의 지식 중심지였고, 그 심장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다. 기원전 245년경,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그를 도서관의 수석 사서로 임명했다. 수십만 권의 파피루스가 쌓인 이곳에서 그는 책을 읽고, 기록을 정리하며, 세상의 비밀을 파헤쳤다. 하지만 그는 책상 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눈은 하늘을, 발은 땅을, 손은 숫자를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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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재다: 그림자와 태양의 대화

에라토스테네스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기원전 240년경, 지구 둘레를 측정한 순간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소문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 남부 시에네(오늘날 아스완)에서, 여름철 하지(6월 21일경)에 태양이 하늘 정점에 뜨면, 수직으로 세운 막대기나 오벨리스크가 그림자를 전혀 드리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태양이 정확히 머리 위에 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같은 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막대기가 작은 그림자를 남겼다. 그는 이 차이에 주목했다. 왜일까? 그의 머릿속에서 답이 떠올랐다.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기 때문이라는, 당시로선 대담한 가설이었다.

그는 실험을 설계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막대기를 세우고, 하지 정오에 그림자의 각도를 쟀다. 결과는 약 7.2도였다. 이는 전체 원(360도)의 50분의 1에 해당한다. 지구가 구형이라면, 이 각도는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가 지구 둘레의 50분의 1이라는 뜻이다. 다음 질문은 간단했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그는 낙타 상인과 여행자들에게 물었다. 시에네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약 5,000 스타디아(고대 그리스 단위, 약 157.5미터로 추정)라는 답이 돌아왔다. 계산은 놀라울 만큼 간단했다. 5,000 스타디아를 50배 하면 지구 둘레가 나온다. 그의 결론은 약 252,000 스타디아(약 39,690킬로미터). 현대 측정값(40,075킬로미터)과 비교해도 오차가 1~2%에 불과한 놀라운 결과였다.

이 과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의 천재성이 빛난다. 그는 지구가 완벽한 구형이라 가정했고, 태양이 지구에서 매우 멀리 있어 빛이 평행하게 온다고 추측했다. 이 두 가정은 오늘날 과학으로도 타당하다. 스타디아의 정확한 길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지역마다 달랐을 가능성 있음), 그의 방법은 고대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 창의적 통찰이었다. 그는 도구 없이, 오직 관찰과 논리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다.

다재다능한 탐구자: 지리, 수학, 천문학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 둘레를 재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지리학의 기초를 닦으며 최초의 세계 지도를 그렸다. 그의 지도에는 리비아(아프리카), 아리아(중앙아시아), 인도까지 포함되었고, 나일강의 발원지를 추측하며 스리랑카(타프로바네)까지 상상했다. 그는 경도와 위도의 개념을 처음 도입해 지구를 격자로 나눴고, 이는 후대 지도 제작의 토대가 되었다.

수학에서도 그의 흔적은 깊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는 소수를 찾는 간단하면서도 우아한 방법이다. 2부터 시작해 그 배수를 지우고, 남은 수를 반복해 걸러내는 이 기법은 오늘날 컴퓨터 알고리즘에도 응용된다. 그는 1부터 1,000까지 소수를 직접 계산하며, 숫자 속 질서를 사랑했다.

천문학에서도 그는 빛났다. 그는 별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지구와 태양, 달의 거리와 크기를 추정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태양은 지구보다 약 27배 크고(실제로는 109배), 달은 지구의 3분의 1 크기였다(실제와 비슷). 오차는 있었지만, 고대에 이런 시도를 한 것 자체가 경이롭다. 그는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가 23.5도라는 사실도 알아냈고, 이는 계절의 원인을 설명하는 단서가 되었다.

시대의 한계와 인간적인 면모

에라토스테네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산물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지식이 융합되며,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용광로가 되었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부했고, 동료 아르키메데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이디어를 나눴다. 하지만 그는 완벽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를 “베타”(2등)라 놀리며, 모든 분야에서 최고는 아니라고 비웃었다. 그는 아르키메데스처럼 기계를 만들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철학 체계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조롱에 개의치 않았다. 그의 목표는 경쟁이 아니라 발견이었다.

말년의 에라토스테네스는 비극적이었다. 그는 눈병(백내장으로 추정)으로 시력을 잃었고,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자 깊은 절망에 빠졌다. 기원전 194년경, 82세에 그는 스스로 굶어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이 선택은 그의 철학적 성향을 보여준다. 그는 삶을 논리와 의지로 다스렸고, 죽음마저 스스로의 손에 쥐려 했다.

유산: 고대에서 현대까지

에라토스테네스의 업적은 고대에 묻히지 않았다. 그의 지구 둘레 측정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히파르코스 같은 후대 천문학자들에게 전해졌고, 르네상스 시대에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방법을 되새겼다. 그의 지도는 중세를 거쳐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항해에 간접적 영감을 주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는 수학 교과서에 실리며, 오늘날 학생들에게도 그의 이름을 알린다.

그는 화려한 실험실이나 정밀한 기계 없이 세상을 잰 사람이었다. 뜨거운 이집트 햇살 아래, 막대기 하나와 그림자를 보며,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손에 쥔 펜은 하늘과 땅을 연결했고, 그의 질문은 인류가 세상을 새롭게 보게 했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먼지 쌓인 책상에서 시작된 그 호기심—“이 땅은 얼마나 클까?”—는 수천 년을 넘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잴 것인가?”

 

추가

 

- 지구 자전축 기울기(23.5도) 추정은 그가 계산했는지는 일부 논란이 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이전에 비슷한 수치가 언급되었고, 에라토스테네스가 관측에 근접했다는 의견이 있어 대체로 수용됩니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헬레니즘 시대, 아르키메데스와의 교류, '베타' 별명, 말년의 실명과 자살 등은 전승에 바탕한 내용입니다
- 스스로 굶어 죽었다”는 전승은 확실한 기록은 아니며 플루타르코스 등의 전언에서 유래하므로, 표현을 완곡하게 바꾸는 것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 과학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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