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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시대의 명제 중심 신학

by modeoflife 2025. 3. 28.

 

(1) 루터와 칼뱅의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핵심 명제

 

중세 스콜라 신학이 한창이던 시절, 교회의 교리들은 나름 정교하게 정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며 마르틴 루터라는 독특한 신학자이자 수도사가 교황청의 관행(특히 면죄부 판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종교개혁의 서막이 열리게 되지요. 그 비판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95개조 반박문』(1517)입니다. 루터는 일종의 “명제”들을 조목조목 제시하며, 교황청과 가톨릭 신학이 그동안 그른 길을 걸어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논쟁점 리스트”를 제시하는 방식은, 사실 루터가 가톨릭교회 전체에 던지는 질의·토론 요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면죄부는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가 중심이어야 하지 않는가?” 등등, 여러 문장을 간단히 표기해 교회가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해명하도록 요구한 셈이지요. 그런 지적이 점차 커다란 파문으로 번져, 루터와 가톨릭교회 사이에 큰 틈이 생기게 됩니다.

 

이후 종교개혁이 확산되면서, 루터나 장 칼뱅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의 신앙고백(Confessions)을 잇따라 만들어 발표합니다. 예를 들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이나 칼뱅의 『기독교강요』 같은 문서가 대표적이지요. 이들 문서는, 가톨릭교회를 겨냥해 “우리는 이런 교리를 핵심으로 본다”라고 명제 형태로 정리한 뒤, 그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라든지 “성경이 유일무이한 권위다” 같은 구호 역시, 그 과정에서 더욱 선명한 명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점은, 루터·칼뱅 등 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경 같은 전통적인 교리 문서를 폐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백에 담긴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자”고 주장했지요. 이들이 내세운 핵심 원리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곧 “오직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가톨릭이 쌓아 온 학문 전통과 교권적 해석이 지나치게 쌓여 있다고 판단해, 다시금 성경의 원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봤던 것이지요.

 

이런 “오직 성경” 원리를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 교회(독일·스위스·네덜란드 등)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문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지역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개신교 신앙고백서(Confessions)’들인데, 각각 “우리 교단은 성경에 근거해 이러이러한 교리를 믿는다”고 간결히 선언했습니다.

 

- 예: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나,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 예: “성례는 단지 표지나 상징을 넘어서, 실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한다(혹은 그렇지 않다).”

 

이처럼 종교개혁 진영에서도 짧은 문장들(명제)로 교리를 발표하게 된 것은, 가톨릭과 명확히 구분되는 신학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문서를 읽어 보면, “아, 이 교단은 이런 내용을 믿고,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구나” 하고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각 교단 내부에서도 이 문서를 표준으로 삼아 신앙교육을 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와 칼뱅이 일으킨 종교개혁은 교리 자체를 무시하기보다, 오히려 교리를 “성경적 근거에 따라 재정립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에 따라 여러 교리적 명제가 다시 한번 공개적·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루터교·장로교·침례교 등 다양한 개신교 교단이 신앙고백서를 지니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마치 공의회 이후 초대 교회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을 명확히 선언하였듯, 루터와 칼뱅도 “신앙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든가 “성경만이 절대적 권위”라는 명제를 제기함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새 시대에 일치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지요.

 

(2) 솔라 스크립투라와 교리 문서화(Confessions)

 

종교개혁 시기에 외쳐진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표어는, 언뜻 보면 “공의회나 교황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개인이 성경만 보며 살아가자”라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조금 달랐습니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교회 공동체는 더욱 많은 교리 문서를 작성하고 발표하게 되었지요.

 

왜 이런 역설적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중세 가톨릭 체제에서 공의회와 교황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고, 교인들은 대체로 “공의회가 이렇게 결정했다”거나 “교황이 이렇게 지시했다”는 말에 따르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 질서를 뒤흔들며, 성경이야말로 최종 권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기존 교황·공의회 권위로 대변되던 교리를 대거 재검토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과연 어떤 교리가 ‘성경에 근거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각 지역 교회(독일 루터파, 스위스·프랑스 개혁파, 영국성공회 등)가 스스로 판단하고 명시해야 했던 셈이지요.

 

그 결과, 이들이 내놓은 것이 ‘신앙고백서(Confessions)’입니다. 독일 루터파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발표했고, 스위스·프랑스 개혁파(칼뱅 전통) 쪽은 “벨직 신앙고백”(1561) 등을 만들어 자기 교단 정체성을 천명했습니다. 또 영국성공회에서는 “39개조 신앙조항”이,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개혁파 전통 안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6)이 각각 발표되지요. 이 문서들은 모두 “우리 교단은 이러이러한 교리를 믿는다”고 분명히 선언함으로써, 기존 가톨릭 체제와 차별되는 신학적 특징을 드러내고, 동시에 각 지역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동일한 가르침을 유지하도록 돕는 도구였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초대 공의회가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같은 핵심 교리를 몇 줄로 압축했듯이, 루터파나 개혁파 교회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Fides sola)”, “성례는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등 다양한 구체적 항목을 명제 형태로 선언해 두었습니다. 옛날엔 “교황과 공의회”가 최종 답을 내주었다면, 이제는 “성경에서 찾아낸 핵심 교리”를 지역 교회 차원에서 확고히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지요.

 

이렇듯 각 교단이 만든 신앙고백서는, 그냥 한두 번 공표하고 끝나는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예배 때 낭독하거나, 교리 교육에서 사용하며, 교인들이 “우리 교단은 이런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배우도록 돕는 매뉴얼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종종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공부한다거나, “벨직 신앙고백”을 교리학 수업에서 읽는 전통이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는 말 그대로 교황이나 교회 전통보다 성경이 우선이라는 원리였지만, 그 원리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선, 교단마다 “성경에서 무엇을 핵심 교리로 삼을지”를 문서화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종교개혁 시대에 교리 문헌이 더 늘어났고, 그 문헌들 속에서 개신교 교단들은 각자 고유한 교리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고백서가 사실상 ‘공의회 없이도’ 새로운 교단들이 자기 신학을 공식화하는 대안적 체제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3) 종교개혁 이후 교단별 교의학 형성과 '정통주의'(Orthodoxy)의 명제 강조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교회 분열과 신앙고백서 작성의 흐름은, 16세기를 지나 17세기 무렵 “정통주의(Orthodoxy)” 시대라 불리는 국면에 접어듭니다. 당시 개신교 교단들은 이미 내놓은 신앙고백서를 토대로, 한층 더 체계적인 교의학(교리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예컨대, 루터교, 칼뱅 전통의 개혁교회, 영국성공회, 재세례파 등 각 교단이 “이런 구원론” “이런 성례론”을 믿는다고 논리적으로 정리해, 교재나 설교, 학문 체계로 확립해 간 것이지요.

 

이 시기를 두고, 어떤 학자들은 “너무 명제를 절대시했다”는 비판을 내놓기도 합니다. 실제로 ‘정통주의’ 시기에 교리적 문구 하나하나를 거의 성문화하듯이 고정하는 태도가 강해졌고, 자칫 교리가 경직되어 회의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기조가 강화되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렇게 교리 명제를 확고히 다듬어 두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루터파는 이런 구원론을 주장하고, 개혁파는 저런 성례 이해를 지녔다”는 식으로 명확히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지요.

 

실제로, 종교개혁 시대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아무런 규범 없이 방치되었다면 교회가 난립하고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을 가능성도 큽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우리가 배운 신앙고백서와 교리를 좀 더 논리화하고 세분화하자”라고 제안함으로써, 한 교단 안에서는 같은 핵심 가르침을 공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재나 강단에서 신학적 논쟁이 벌어지면, 최종적으로는 명제(“우리는 이렇게 믿는다”)로 정리되어 교단의 합의 내용(신앙고백서나 교리 문서)을 공식적으로 보충·수정하여 다시 인쇄해 배포했지요.

 

물론, 이런 공고화 작업이 교리를 지나치게 문헌화·지식화했다는 비판은 여전히 남습니다. “지적 동의”만 강조되면, 경건과 체험이 소홀히 될 위험이 있다는 우려도 있었고요. 하지만 오늘날 각 교단이 수백 년 전 신앙고백서나 교리문을 그대로 유지하며 전통과 정체성을 이어 올 수 있는 건, 바로 이 ‘정통주의’ 시기에 했던 명제 중심의 교의학 정리 덕분이라는 데, 대체로 많은 연구자가 동의합니다.

 

“명제가 조금 경직되었다”는 지적도, 사실은 “한편으로 교리를 확고히 구축했다”라는 칭찬과 양면성을 지니는 셈입니다. 제도 안에 규범이 있으면 편견이나 오용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규범 없이 방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요. 정통주의 시대의 교회는 “우리가 무엇을 믿고, 왜 믿는가”를 명확히 밝혀 두고 세대를 넘어 이어 주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이 현재도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등 여러 교단에서 “이건 우리 교리적 뼈대다”라고 꼽히는 문서나 명제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종교개혁 이후 여러 교단이 “정통주의(Orthodoxy)” 신학을 확립하고 교의학을 체계화했을 때, 어떤 측면에서 교리가 “지나치게 경직”되었다는 비판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 정통주의 시기에 만들어진 교단별 교의학은 오늘날에도 각 교파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핵심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가 이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 교리적 명제를 공고히 함으로써 얻는 장점과, 교리가 딱딱한 “문헌 지식”으로만 느껴질 수 있다는 단점 사이에서, 교회는 어떤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까요?

- “나는 무엇을, 왜 믿는가”를 명확히 정리하기 위해 신앙고백서나 교의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장점과 위험 요소를 각각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요?

- 종교개혁 시기의 열정과 논쟁, 정통주의 시대의 체계화가 없었다면, 오늘날 개신교가 지니는 풍부한 교단별 신학적 다양성을 형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관점에 동의하시나요? 왜 혹은 왜 아니라고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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