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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공의회와 교리 형성

by modeoflife 2025. 3. 28.

 

(1) 니케아·콘스탄티노폴·칼케돈 공의회: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 명제

 

우리가 교회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초대 교회 시절 벌어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칼케돈 등 여러 공의회를 만납니다. 요즘 눈으로 보면 “그렇고 그런 신학 논쟁이었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교회 공동체에게는 실제 삶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 이해의 근간을 뒤흔드는 거대 이슈였습니다.

 

한번 니케아 공의회(AD 325)를 떠올려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분분했던 그 시대, “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실 수 있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데, 정통파 입장에서는 단순히 신학 지식 문제를 넘어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누가 보증하는 것이냐?”라는 엄청난 고민을 야기합니다.

 

결국 수많은 주교들이 니케아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고, 아리우스파와 정통파가 팽팽히 맞섰죠. 정통파 쪽에서는 성경과 사도적 전승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이 단순한 피조물이라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를 완전히 구원해 낼 만한 힘이 있을까 묻습니다. 이 질문에 뿌리를 둔 신학자들은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 본질(ομοούσιος, homoousios)이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요.

 

 

결국 공의회는 정통파 손을 들어 주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명제를 확립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는 한 줄로 요약 가능하지만, 사실상 초대 교회가 구원의 확실성과 성육신의 의미를 지켜 내기 위해 치른 지적·영적 싸움의 결과였던 셈입니다. 우리 시대에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이시다”라며 쉽게 표현하는 그 한 문장이,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토론과 기도의 결실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새삼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지요.

 

니케아에서 삼위일체의 서막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해도, “성령”에 관한 이해가 여전히 명료치 않았던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어느 정도 정립되었는데, “성령 역시 같은 신적 본질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불거진 것이지요.

 

그래서 열린 것이 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AD 381)입니다. 이 공의회는 “성령도 역시 하나님이시며, 성부·성자와 함께 동일 본질에 속한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렇게 삼위일체의 구조가 한층 더 구체화되고, “성령은 하등한 영적 힘이나 에너지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성부·성자와 동격이신 위격(person)이시다”라는 인식이 교회에서 확고히 자리 잡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인사하거나 축도하는 일이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 문장 하나가 공의회를 거치며 체계화된 신학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면, 예배 속 짧은 인사말조차 예사롭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인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신앙 행위임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그리스도는 어떻게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실 수 있나?”라는 문제도 막강한 난제였거든요.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반쯤 섞였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고, 분리된 채 공존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의견이 분분하다 보니 교회는 또다시 논의를 하게 되었고, 그 결실이 칼케돈 공의회(AD 451)였습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예수님께서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각각 온전히 보존하며, 완전무결하게 결합하셨다”라는 명제를 선포합니다. 이를테면 네스토리우스나 에우티케스 등은 한쪽 극단으로 치우쳐 “신성과 인성이 너무 분리”되거나 “완전히 섞여 버려 구분이 안 된다”는 주장을 했지만, 교회는 성경과 사도적 믿음을 종합해 “두 본성은 결코 혼합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 상태로 하나의 인격을 이룬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지요.

 

이로써 그리스도론의 핵심 틀이 자리 잡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고통과 기쁨을 나누셨다.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니, 구원자로서 신적 권위를 행사하신다”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배경에는 바로 이 칼케돈 공의회의 결론이 깔려 있습니다.

 

이렇게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칼케돈 공의회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하나하나의 신앙 명제가 결코 한순간에 흘러나온 게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안에는 교회가 신앙 선배들의 체험과 성경 해석, 그리고 철학적 개념까지 두루 검토하며, 수많은 논쟁을 통해 “이것이야말로 참된 고백”이라고 내세운 결정 과정이 녹아 있습니다.

 

당시 성도들과 신학자들은 단순히 공부를 넘어 “구원을 확실히 붙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바른 인식을 지키기 위해” 이 논쟁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시다”라는 명제를 당연하게 고백하게 되었지만, 사실 그 한 줄이 초대 교회가 피땀 흘려 지켜 낸 신앙 유산임을 알고 나면,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공의회 결정을 둘러싼 신학자들의 논의와 교리적 구체화

 

어떤 거대 회의에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다” 혹은 “삼위일체는 한 본체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교인이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해 버리는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성도들 사이에서 “위격(Person)이란 무엇인가?”, “본체(Ousia)는 또 무엇이지?”, “성부와 성자는 어떻게 한 하나님이면서도 구별될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이전과 달리 저항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공의회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그 결정을 더 구체화하고 해설하는 작업이 뒤따랐습니다. 우리가 ‘교부들’이라 부르는 신학자들—이를테면 아타나시우스나 터툴리안,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분들—이 바로 그 일을 해냈지요. 이들은 “아니, 공의회에서 성부·성자·성령이 한 본체라고 선언했는데, 그럼 세 분은 어떻게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지?”라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글과 설교를 남겼습니다. 이를테면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 문제에서 성자를 “아버지와 동등 본질”이라고 한 명제를 더욱 철저히 변호하고, 터툴리안은 “세 위격, 한 본체” 개념을 라틴어로 정교하게 풀어내며 후대 신학자들의 논의를 촉진했지요.

 

그중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가 눈에 띕니다. 그는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통해, “삼위일체”라는 하나의 문장을 보며 떠오르는 온갖 철학적·해석학적 의문을 한 문장씩 꼼꼼히 답변해 갑니다. 예를 들어 “성부와 성자는 분명히 이름과 행동을 달리하시는데, 어째서 한 분이라고 하는가?” 같은 질문을, 심리학적 비유(마음, 지성, 의지)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 성경 구절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그 일치점을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그렇게 되니, 처음엔 살짝 막연하게 들렸던 “삼위일체”란 말이, 읽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점차 삶과 신앙을 이해하는 깊은 프레임워크가 되어 가는 것이지요.

 

사실 칼케돈 공의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을 완전무결하게 지니셨다”라는 결론만 듣고 끝이라면, “그래, 좋네” 한마디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두 본성은 융합된 건가? 분리된 건가? 섞이는 건 아닌가?” 같은 의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럼 교부들이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으면서도 분리되지 않는다”라는 공의회 정의를 해설하기 위해, 다시 수많은 설교나 논문을 펼쳐 놓는 것이지요. 어떤 교부는 “하나님의 무한성과,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유한성을 조화롭게 받아들이려면, 이런 철학 개념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도 하고요.

 

이렇듯 공의회가 최종 선언을 해 놓으면, 그 뒤에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교회는 그 한두 줄을 깊이 이해하고, 신앙생활에 어떻게 녹일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아, 이 문장은 우리 신앙에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를 깨닫거나 “그 문장을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구나!” 하는 통찰들이 쌓이면서, 교리 명제라는 것이 더 이상 딱딱한 ‘정답 표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교육 자료가 되었던 겁니다.

 

“명제 하나 뒤에는 수많은 학자와 목회자의 해설·확장 노력이 따라붙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공의회 결정을 어떤 지역 교회가 거부하거나 다른 해석을 고수했을 땐, 교부들이 직접 서한을 보내거나 책을 써서 “왜 이것이 정통인지” 변호하기도 했거든요. 그렇게 끊임없이 ‘해설’과 ‘대화’가 오가다 보니, 어느덧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같은 교리 문장은 교회 안에서 단순 슬로건이 아니라, 영적·지적·목회적 토대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풍성한 유산을 계승해, 예배 때나 교리 교육 때 그 한두 줄을 자연스럽게 고백하고 암송하게 된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공의회가 내린 결정이 교리의 ‘시작점’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곡해나 의심을 막기 위해, 성도들이 실제로 이 명제를 인생과 믿음 속에서 ‘체화(體化)’하도록 수많은 글을 쓰고 토론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입에 올리는 그 순간, 우리 역시 아타나시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신앙 선배들의 논의 위에 서 있는 것이며, 교회가 대대로 쌓은 지적·영적 자산을 물려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3) 이단 논박을 통한 '정통' 명제 확립 과정

 

초대 교회가 “삼위일체”니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니 하는 핵심 교리를 하나로 합의해 나가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사실 한쪽에서 새롭고 ‘독특한’ 주장을 펼치면,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이단(heresy)이라 부르며 강하게 반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하지만 이 “이단 논박”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다지고 정통(orthodox) 교리를 확립해 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를테면 아리우스라는 신학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 아니라, 아버지가 만든 피조물”이라고 주장했을 때, 사람들은 처음엔 그럴듯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니, 좀 지나치지 않나?”라는 의구심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점차 이 가르침이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완전한 신의 능력이 아닌 셈이니, 우리의 죄가 정말로 사해질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교회 다수는 아리우스파가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흔들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여러 공의회를 거치며, “예수님은 성부와 동일 본질(ομοούσιος)이시다”라는 명제가 공식화되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비교적 ‘분리된 채’로 설명함으로써, 교회가 전통적으로 붙들어 온 “한 위격” 개념과 충돌했습니다. 그리고 에우티케스는 반대로 신성과 인성이 섞여 버려 한 본성만 남았다고 말해, “그럼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온전히 지니셨다고 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야기했지요. 이런 주장들도 교회 다수 입장에서는,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셔야 하지만,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 하지 않나? 한쪽으로 치우치면 복음의 균형이 무너진다”라는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는 새로운 이단 사상이 등장할 때마다, “이건 성경과 교회 전승, 그리고 이미 확립된 공의회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결론 지으며, 그 대척점에서 “우리의 고백은 이것이다!”라는 명제를 더 선명히 다듬어 냈습니다. 그래서 “동일 본질(ομοούσιος)”이니 “두 본성”이니 하는 표현들이, 단순히 ‘단어 하나 바꾸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끊임없이 진리와 오해 사이를 분별해 온 지적·영적 투쟁의 결과였던 셈입니다.

 

“정통(orthodox)”이라는 말이 지금은 꽤 권위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 당시 교회 입장에서는 “우리가 붙드는 이 고백이 진정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 길이다”라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이걸 놓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한두 줄짜리 교리 문장 뒤에 “이건 아니다, 이건 맞다”를 치열하게 가려 왔던 초대 교회의 노고가 한층 새삼스러워 보입니다. 이는 곧 이단 논박이 “갈등”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정화(精華)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니케아·콘스탄티노폴·칼케돈 공의회가 선언한 명제들을, 우리는 오늘날 예배나 신앙 교육에서 얼마나 자주 의식하며 고백하고 있을까요? 이 공의회 결정을 ‘단순 교리 지식’이 아닌 ‘살아 있는 진리’로 되새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아타나시우스, 터툴리안,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이 공의회 결정을 해석·보완하지 않았다면, 교리적 명제가 지금처럼 풍부한 설명을 얻어 체계화될 수 있었을까요? 교부들의 노력을 오늘의 공동체는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까요?

- 교회는 왜 끊임없이 새로운 사상을 ‘이단’이라 규정하며, ‘정통’ 명제를 고수해 왔을까요? 이러한 구분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와, 혹시 부작용이나 한계는 무엇일지 함께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 삼위일체나 그리스도론 같은 교리 문장을 가볍게 암송하는 것과, 그 문장이 형성된 역사적 맥락을 파악해 보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교회가 교리를 단순 암기로만 전달할 때 생기는 위험점은 무엇일까요?

- 초대 교회 공의회가 만들어 낸 교리적 명제들은, 한편으로는 시대·문화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명제들을 어떻게 적용·재해석해야 할까요? 교회가 전통과 오늘의 상황을 조화롭게 연결하기 위해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명제, 신학 그리고 신앙'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