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리적 명제 형성과 신학적 논증 구조
“삼위일체는 한 본체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
우리가 신앙고백이나 교리서에서 마주치는 이 짧은 문장들은, 사실 교회 역사의 먼 길을 따라 천천히 빚어진 결과물입니다. 처음부터 한두 사람이 “이렇게 부르자!”고 정의해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신학 논쟁과 공의회를 거치면서 조금씩 형태를 갖춰 온 것이지요.
가령, 삼위일체 교리를 예로 들어 봅시다. 누군가 “하나님은 한 분이라면서, 어떻게 성부·성자·성령이 따로 존재할 수 있지?”라고 물으면, 처음에는 “우리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분명 셋이 구별되는 듯하지만, 동시에 같은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시는 것 같다”라는 식의 고민이 쌓입니다. 교부들의 문헌이나 교회 예배 전통을 뒤져 보면, 세례나 축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고백하는 기록이 남아 있고, 거기서 “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뚜렷합니다. 그러나 철학적 개념이나 역사적 논쟁을 통합해 보니, “한 분”이시면서도 “위격이 셋”이라는 주장을 정리하는 건 간단치 않은 일이었지요.
이렇게 쌓이고 쌓인 근거들을 전제(premise)라고 부릅니다. 성경 본문, 교부들의 가르침, 전승된 예배 형식, 심지어 당대 철학까지, 모두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 근거들을 모아 “과연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위격이 셋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라는 판단(judgment)을 진행합니다. 이를테면 “성경에서 성부·성자·성령을 구별하지만, 세 분이 따로 따로 독립적인 신(Gods)은 아니다”라는 중간 결론들이 조금씩 잡혀 가는 과정을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사람이 논쟁을 거쳐 합의해야 하는 공의회 같은 곳에서 “우리는 결국 이렇게 믿는다”라는 결론(명제)이 탄생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나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라는 선언이 그 대표적 결과물이지요. 이것을 교회는 짧게, 그러나 단호하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한다”고 한 문장으로 압축해 발표합니다. 이 결론은 이후에 신앙고백과 교리문으로 자리 잡아, 예배와 교육의 자리에 오랜 세월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니 이 한두 줄의 명제를 안 외우면 안 된다고만 생각하면, 그 뒤에 깔린 방대한 논증 구조와 역사적 맥락을 놓치게 되는 셈입니다. 사실 교리적 명제는 그저 암기하고 넘어갈 지식이 아니라, 교회가 긴 세월 동안 참과 거짓, 그리고 타당성과 부당함을 골고루 가려 내며 “이건 정말 포기할 수 없는 진리”라고 결정한, 소중하고도 치열한 합의의 흔적이기 때문이지요.
가령,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어서 당연하게 느끼지만, 이 말 한 마디가 교회 역사 속에서 형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의 사유와, 철학적 개념의 도입, 성경 본문의 재해석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면 그 무게가 달라집니다. 실제로 “성경은 한 하나님을 말한다”는 전제에, “성부·성자·성령 각각이 온전히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는 전제를 겹치고, “이 셋이 모종의 구별을 지니지만 동시에 분리되지 않는다”는 중간 판단을 곁들이다 보면, “한 본체 안에 세 위격”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리적 명제는 교회가 (전제 → 판단 → 결론) 과정을 차근차근 밟으며 수많은 대안을 비교·분석한 끝에 나오게 됩니다. 어떤 이는 이 과정을 잘 몰라 “교리가 왜 그렇게 어려운 말로 이뤄졌을까?”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뒤에는 역사와 논리와 영적 체험이 빼곡히 자리해 있지요. 그래서 교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결과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결과를 낳은 과정까지 성찰해 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두 본성” 같은 구절이 짧고 간결하게 다가와서 편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명제 하나에 담긴 의미를 음미하고, “어떻게 이 결론에 도달했는가?”라는 전제와 판단 과정을 더듬어 가 보면, 교회가 정말 오랜 시간과 열정을 들여 “진리를 지켜 온” 노력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교리라는 한 문장 속에 응축된 역사와, 그 문장이 우리에게 주는 풍성한 깨달음이 아니겠습니까.
(2) 신앙적 전제(premise)와 합리적 논증의 접점
우리가 신학에서 말하는 ‘전제’를 떠올릴 때, 보통 논리학에서처럼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근거만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사용해 온 전제는, 때로는 철저히 신앙적인 공리(公理, axiom)의 형태를 띱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같은 고백은 물리 실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요. 오히려 이 명제가 ‘자명하다’고 믿기로 하고 출발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이 과정을 수학에 비유해 볼 수도 있습니다. 수학에서 0 ≠ 1 과 같은 공리(公理)를 전제하면, 더 이상 이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그 위에서 새로운 정리(theorem)들을 전개해 가는 식이지요. 마찬가지로 신학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전제를 영적 진리로 받아들인 뒤, 이 전제를 활용해 삼위일체나 구원론, 혹은 종말론 등의 교리를 펼쳐 나갑니다. 이 말이 곧, “그냥 무조건 믿기만 해”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교회는 이 신앙적 전제 위에서, 이성적·역사적·철학적 근거를 보강하며 가급적 많은 이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합리적 논증을 전개해 왔습니다. 부록 3에 “명제 1: 수학의 공리와 기독교 신학의 공리는 유사하다”로 논증한 것이 있으니 적절한 때에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자연신학적 방법을 통해 “세상 만물이 우연히 생겨날 수 없고, 따라서 신이 필요하다” 같은 ‘증명’을 시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전제 안에서,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의 텍스트는 역사의 어떤 지점에서, 어떤 맥락으로 수용되었나?” 등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 가려 합니다. 신앙의 전제를 인정한다는 건 지적 토론의 마침표가 아니라, 오히려 본격적 논증의 출발선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신앙적 전제와 합리적 논증”이 만나는 지점에는 늘 긴장감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말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으니 인정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증명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며 이성을 배격하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는 이 둘을 조화시키려 애써 왔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출발선 자체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어떤 근거와 맥락 위에서 작동하는지 밝히고, 그 결론(교리)이 실제 믿음과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까지 설명하는 것이 교회의 태도였습니다.
신앙적 전제와 합리적 논증은 서로 갈등만 빚는 관계가 아니라, 모종의 ‘긴장 어린 협력’을 이룹니다. 예컨대,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려면 우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전제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전제를 맹목적으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과 역사적 예배 전통, 교부들의 철학적 통찰을 모두 합해 논리적으로 설명해 봄으로써, 그 교리가 얼마나 일관되고 깊이 있는 결론인지를 보여 주는 게 교회가 해 온 일이죠.
이 과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전제가 전혀 없다면 신앙 고백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제만 내세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역사적 근거를 최대한 검토하자”는 태도로 교회가 발전해 온 셈입니다. 물론, 아무리 정교한 논증을 해도,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다”는 전제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납득되는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나 논리 따위를 배격하는 대신, 교회는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그 전제를 좀 더 깊이 해명하고, 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변호하려 애썼습니다.
신앙적 전제(premise)와 합리적 논증은 교회의 신학 담론을 풍성하게 만드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제가 없다면 출발점이 흔들리고, 논증이 없다면 그 전제가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공감대를 얻기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같은 공리를 인정하는 내부 논리 체계 안에서, 삼위일체나 구원론, 종말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은, 교회가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이성과 역사 속 계시 체험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 왔음을 보여 주는 증거일 것입니다.
(3) 신학 담론에서 나타나는 명제·판단·전제의 실제적 적용 사례
우리가 매주 교회에서 접하는 설교를 떠올려 봅시다. 가령, 목회자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고 하면, 이는 단순히 “믿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명제가 아닙니다. 사실 그 이면에는 여러 근거(전제)가 자리 잡고 있고, 이를 통해 설교자는 논리적 판단 과정을 유도합니다. 예컨대 성경 속 다윗이나 한나가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전제 A),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목(전제 B),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자주 들리는 기도 응답 간증(전제 C) 같은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그 뒤 “이러한 근거들이 있으니,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실제로 반응하신다”라는 중간 결론이 성도들 마음에 자리 잡게 되지요.
이 전제들이 모아져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라는 판단을 낳고, 설교의 핵심 명제가 탄생합니다. 즉, 성도들은 논리 구조를 겉으로 의식하지 못해도, 사실상 “(전제) → (판단) → (결론)”의 과정을 설교를 통해 체득하는 셈입니다. 이런 설교가 반복될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다”라는 결론이 개인의 신앙 고백으로 점점 굳어지고, 공동체 차원에서도 그 믿음이 자연스레 공유됩니다.
목회 현장만이 아니라, 신학교나 교회학교에서도 유사한 논리 구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는 교리를 가르친다고 할 때, 교사나 교수가 곧바로 “그냥 이 결론을 외우면 됩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성경 본문, 공의회 결정문, 교부들의 논리 등을 전제로 차근차근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암시하고, 공의회에서는 “예수께서 참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증언을 채택했고, 교부들의 저작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면 참 인간이셔야 했다”는 해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은 이렇게 모아진 전제를 따라가며,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다”라는 판단에 도달합니다. 그 결과를 교회는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을 지니셨다”라는 명제로 공표하고 암송하지요. 이 과정을 밟을 때, 단순히 결론만이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는 논리적·역사적 배경을 함께 배움으로써, 학생은 그 교리를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다이내믹한 논증 구조를 볼 수 있는 영역이 바로 공의회와 신학 논쟁입니다. 초대 교회가 “예수님은 피조물인가, 곧바로 참 하나님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던 아리우스 논쟁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쪽에서는 성경 구절 중 “아버지보다 아래다”라는 표현 등을 강조하며 피조물 쪽 주장(전제)을 내놓고, 다른 쪽에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본문과 전승 등을 더 강력한 전제라고 주장합니다. 철학적·어원적 해석이나 교부들의 글도 동원되며, 서로 다른 판단이 부딪히다가, 다수의 신학자들이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결론이 옳다고 합의에 이르지요.
그리고 이 최종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을 지니셨다”(칼케돈 공의회) 같은 명제로 공식화되면, 교회 전체가 이를 공인된 신앙 고백으로 수용합니다. 물론, 이후에도 새로운 이단이 나타나거나, 다른 지역에서 추가적 논리가 제기되면, 교회는 또다시 공의회 같은 회의를 통해 전제와 판단을 재검토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보면, 한 문장으로 요약된 교리 하나가 나올 때마다 얼마나 많은 증거(전제)와 토론(판단)이 축적되었는지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이처럼 설교, 교리교육, 공의회, 신학 논쟁 등 다양한 맥락에서, 우리는 한 문장짜리 ‘결론’에 이르는 길이 전제와 판단을 통한 논리적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신앙이 ‘마음으로만 동의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교회는 늘 역사·성경·이성적 논거를 전제로 삼아, 공동체가 납득할 만한 결론을 끌어내고자 애써 왔습니다. 그 결과 “교리가 단순한 구호나 전통이 아니라, 긴 시간과 인류의 지적·영적 역량이 응축된 공동체적 결정이다”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지요. 이러한 명제-전제-판단 구조를 살펴보는 일이야말로, 교리와 신앙 고백에 녹아 있는 역사적 중량감과 논리적 흥미를 확인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4)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우리는 보통 “교리”를 지식으로서 외우거나 암송하지만, 그 교리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거쳤던 전제와 판단 과정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요?
-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같은 신앙적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과 대화할 때, 교회는 어떤 논증이나 예시를 통해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할까요?
- 설교나 교리 교육에서, 명제만 강조하기보다 전제와 판단 과정을 함께 보여 준다면, 신앙인들이 그 결론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요?
- “삼위일체”나 “그리스도론”처럼 난해하게 보이는 교리에 대해서도, 전제와 논리 과정을 검토해 보면, 생각보다 훨씬 정교하고 풍부한 논증 구조가 존재함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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