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시더니 엎드리어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으나,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의 기도는 간절했으나 거룩한 순종으로 가득 찼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계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약함으로 잠들어 있었으나(마태복음 26:40), 예수는 아버지의 구속 계획을 이루기 위해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다음 날, 그는 채찍에 맞고 조롱당하며 십자가로 나아가셨지만(요한복음 19:1-3),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순종은 죄인을 위한 완전한 헌신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길을 여는 거룩한 모범으로 백성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보여주셨음을 확고하고 다층적으로 증언하며, 이는 구속사적, 신학적, 역사적 증거로 입증됩니다。마태복음 26:39에서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셨습니다。빌립보서 2:8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라 하여, 이 순종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희생으로 완성되었음을 증거합니다。히브리서 5:8-9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사 구원의 근원이 되셨느니라”라 하며, 그의 순종이 죄인을 위한 구원의 길임을 확증합니다。
예수는 스스로 순종의 주체임을 선언하셨습니다。요한복음 10:18에서 “아무도 내 생명을 빼앗지 못하노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는 내게 받은 아버지의 명령이니라”라 하시며, 구속 계획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셨음을 밝히셨습니다。마태복음 26:53-54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면 열두 군대 천사를 보내시리라 그러나 성경이 응해야 하리라”라 하여, 순종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선택임을 증언합니다。그의 삶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마태복음 4:10에서 광야의 유혹을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라”로 이기셨고, 마태복음 5:17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노라”라 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50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라 하며 순종의 모범을 가르치셨습니다。
초기 교회와 사도들의 증언은 이 순종의 모범을 강력히 뒷받침합니다。히브리서 12:2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라”라 하여, 그의 순종이 믿음의 본이 되었음을 증거합니다。로마서 5:19는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 하여, 예수의 순종이 아담의 불순종을 대속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었음을 강조합니다。고린도후서 5:21은 “그가 죄를 알지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게 하신즉”이라 하며, 순종의 구속적 결실을 입증합니다。사도행전 13:23은 “다윗의 씨를 따라 구주를 세우셨다”라 하여, 그의 순종이 하나님의 약속 성취임을 증언합니다。초기 교회는 이 순종을 본받아 로마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고(베드로전서 2:21,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는 본이 되셨다”), 신앙의 확산을 이끌었습니다。
역사적 증거도 이를 보강합니다。요세푸스(《유대 고대사》 18.3.3)는 예수의 헌신적 삶과 그의 추종자들의 충성을 기록하며, 그의 순종이 세상에 특별한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합니다。플리니우스 더 영거(기원후 112년 편지 10.96)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며 순종의 삶을 살았다고 전합니다。구약 예언도 이를 예표합니다。이사야 50:5-6은 “내가 거역하지 아니하였으며 내 등을 때리는 자들에게 주었도다”라 하여 메시아의 순종을 예언하고, 시편 40:8은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나이다”라 하며 그의 헌신을 암시합니다。따라서 신약의 증언, 예수의 삶과 죽음, 사도들의 가르침, 초기 교회의 본받음, 역사적 기록, 구약의 예언은 예수가 순종을 보여주셨다는 강력하고도 흔들림 없는 증거입니다。그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순종을 보여줬다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예수가 순종을 보여줬다면 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절망적으로 외쳤을까요?(마태복음 27:46) 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항거나 포기로 보이며, 욥기 13:15의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신뢰하리라”와 같은 확고한 순종과 대조됩니다。십자가의 고난이 순종이라면 왜 전능한 하나님과의 일치가 아닌 버림받음이 드러나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둘째, 유대교는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보며 순종의 증거를 부정합니다。마태복음 12:2에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곡식을 잘라 먹으니 율법을 어겼다”라며 예수가 율법을 완성(마태복음 5:17)했다기보다 파괴했다고 주장합니다。탈무드(샤밧 31b)는 예수를 율법 위반자로 간주하며, 이사야 11:4의 “공의로 다스리는 메시아”와 달리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한 실패로 보입니다。
셋째, 이슬람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고 하여 순종의 증거로 보기 어렵다고 단언합니다。꾸란 4:157은 “그들은 예수를 죽이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라 하며, 꾸란 19:33은 예수를 예언자로만 묘사합니다。꾸란 5:75의 “그는 먹고 마시는 인간일 뿐”이라는 묘사는 신적 순종의 권위를 약화시키며, 십자가의 희생이 구속의 증거라는 주장을 무력화합니다。
넷째, 현대 회의론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순종이 아닌 로마의 정치적 처형으로 간주하며, 그의 기적과 가르침을 과장된 신화로 봅니다。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십자가를 로마의 반역자 처벌로, 마태복음 8:3의 병 고침을 민간 설화로 치부합니다。데이비드 흄(《기적에 관하여》)은 기적을 자연법칙 위배로 부정하며, 겟세마네 기도(마태복음 26:39)를 감정적 약화로 해석해 순종의 증거를 약화시킵니다。
다섯째, 현대 심리학은 순종을 약함, 맹목적 복종, 또는 심리적 억압으로 해석하며 예수의 선택을 비판합니다。프로이트(《토템과 금기》)는 예수의 순종을 아버지 상징(God)에 대한 종속으로 보고, 아들러(《개인 심리학》)는 이를 열등감의 보상으로 간주합니다。존 쉘비 스퐁(《새로운 기독교》)은 십자가를 자기희생적 신화로만 보며, 순종이 현대적 자율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증폭시킵니다。마태복음 26:39가 순종을 말하지만, 마가복음 14:36의 “이 잔을 옮겨 주옵소서”는 저항의 흔적을 보이며, 누가복음 12:50은 “내가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답답하노라”라 하여 순종에 대한 내적 갈등을 드러냅니다。이러한 십자가의 절규, 유대교와 이슬람의 반론, 회의론과 심리학의 비판, 성경 내 불일치는 예수가 순종을 보여줬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예수가 순종을 보여주셨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신실하심 안에서 오해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십자가의 “나를 버리셨느냐” 외침(마태복음 27:46)이 순종과 모순된다는 지적은 그 구속적 의미를 놓칩니다。이 외침은 시편 22:1의 성취로, 요한복음 19:30의 “다 이루었다”와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신 순종의 절정을 드러냅니다。빌립보서 2:8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라 하여, 고난 속에서도 아버지의 계획에 따랐음을 증거합니다。욥기 13:15의 신뢰는 예수의 순종과 일치하며, 히브리서 5:7-8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라 하여 이를 구원의 길로 확증합니다。
둘째, 유대교가 예수를 율법 위반자로 본다는 주장(마태복음 12:2)은 그의 사명을 오해합니다。마태복음 5:17에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노라”라 하시며, 예수는 율법의 참 뜻을 성취하셨습니다(로마서 10:4,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사 의를 주셨느니라”)。이사야 11:4의 공의는 초림에서 속죄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며(계시록 19:11), 탈무드의 비판은 정치적 오판일 뿐입니다。
셋째, 이슬람이 십자가를 부인한다는 반론(꾸란 4:157)은 신약 증언을 약화시키지 못합니다。요한복음 10:18의 “내가 스스로 생명을 버리노라”와 고린도전서 15:3-4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예수의 순종이 구속의 증거임을 입증합니다。꾸란 19:33의 예언자 역할은 누가복음 24:19-21의 “선지자요 구원자”와 조화를 이루며, 히브리서 2:17은 “속죄하기 위하여 순종하셨다”라 증언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이 죽음과 기적을 과장으로 보는 주장(도킨스, 흄)은 역사적·성경적 실체를 무시합니다。마태복음 26:39의 겟세마네 기도는 요한복음 18:11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리라”로 순종을 확증하며, 고린도전서 15:6의 500명 증인은 부활의 객관성을 보장합니다。흄의 자연법칙 논리는 창세기 1:1의 창조주 권능을 배제한 편견이며, 로마서 1:4는 “부활로 순종의 권세를 인정받으셨다”라 하여 기적의 신빙성을 입증합니다。
다섯째, 심리학이 순종을 약함으로 보는 반론(프로프트, 아들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의 헌신을 오해합니다。요한복음 4:34의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함이 내 양식이라”는 순종이 약함이 아닌 구속의 힘임을 증거하며, 갈라디아서 1:4는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순종하셨다”라 하여 억압이 아닌 사랑의 선택임을 밝힙니다。스퐁의 신화론은 베드로전서 2:21의 “그리스도의 고난이 본이 되셨다”를 약화시키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 모순(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12:50)은 신인 양성의 신비를 오독한 결과입니다。마가복음 14:36의 “잔을 옮기소서”는 인간적 연약함(히브리서 4:15,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신다”)을, “아버지의 뜻대로”는 신적 순종을 드러내며, 누가복음 12:50의 답답함은 로마서 6:4의 “그의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게 하셨다”로 완성됩니다。
따라서 반증은 예수의 순종을 인간 논리나 현실적 고난으로 재단한 데 불과합니다。신약의 증언, 구속사적 목적, 하나님의 권능은 예수가 순종을 보여주셨다는 진리를 흔들림 없이 입증합니다。
예수가 순종을 보여준다는 믿음은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고난 속에서도 마태복음 26:39를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둘째, 하루 한 번 예수의 순종을 본받아 하나님께 헌신하는 기도를 드려보세요. 셋째, 어려움 속에서 예수의 순종을 따르며 주변에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세요. 이는 예수가 순종을 보여주셨음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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