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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죄인을 구한다” (마가복음 2:17)

by modeoflife 2025. 2. 28.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야기: 예수의 뜻밖의 선택

 

어느 날, 예수는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세금 징수원 마태는 죄로 인해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자였습니다. 그는 탐욕으로 더러워진 손으로 돈을 세며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삶을 살았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셨습니다(마태복음 9:10). 또 다른 날, 예수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군중 앞에 서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내세웠으나, 예수는 땅에 쓰시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8:7). 군중은 죄를 깨닫고 떠났고, 예수는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며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요한복음 8:11). 제자들이 놀라 묻자,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마가복음 2:17). 그의 말씀은 권위로 울렸고,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백성의 삶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논증: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증거

 

신약 성경은 예수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고하고 다층적으로 증언하며, 이는 구속사적, 신학적, 역사적 증거로 입증됩니다. 마가복음 2:17에서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선언하시며, 그의 사명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사명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라 하여,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속죄의 희생임을 증거합니다. 요한일서 2:2는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라”라 하여 구원의 보편성을 확증합니다.

 

예수의 행적은 이 구원 사명을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9:9-10에서 세리 마태를 “나를 따르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이는 루가복음 5:32의 “내가 회개하도록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로 강화됩니다. 요한복음 8:11에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 죄를 범치 말라” 하시며 용서와 거룩함을 선물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43은 십자가에 달린 죄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시며, 죽음 속에서도 구원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1:19는 “인자의 친구가 세리와 죄인이라” 하여 예수의 사명이 죄인을 구원하는 사랑임을 증언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 증거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디모데전서 2:4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 하여 예수의 구원이 모든 죄인을 향함을 밝히고, 로마서 3:23-24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나니”라 하며 죄인을 위한 속죄를 강조합니다. 갈라디아서 1:4는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 하여 십자가의 구속 목적을 확증합니다. 베드로전서 3:18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셨느니라”라 하며 구원의 완성을 증거합니다.

 

역사적 맥락도 이를 강력히 뒷받침합니다. 사도행전 16:30-31에서 빌립보 감옥 간수가 “구원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묻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답하며 죄인을 품는 초기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4:12는 “다른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라 하여 예수의 구원 독점성을 확언합니다. 역사적으로 플리니우스 더 영거(기원후 112년 편지 10.96)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구원자로 숭배했다고 기록하며, 이 믿음이 로마 박해 속에서도 확산되었음을 입증합니다.

 

구약 예언도 이를 예표합니다. 이사야 53:11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를 보고 만족히 여기리라”며 죄인을 위한 메시아의 희생을 예언하고, 시편 22:27은 “땅 끝의 모든 자가 여호와를 기억하리라”로 구원의 보편성을 암시합니다. 신약에서 디도서 2:11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셨다”라 하여 예수의 사명을 완성합니다. 따라서 신약의 선언, 예수의 행적, 사도들의 증언, 역사적 확산, 구약의 예언은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강력하고도 흔들림 없는 증거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반증(반대 주장): 정말 예수가 죄인을 구할까?

 

그러나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면 왜 세상은 여전히 악과 고난으로 가득할까요? 마가복음 2:17이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했지만, 예수의 시대 이후 로마의 박해(사도행전 8:1), 중세의 전쟁, 현대의 범죄와 불의는 구속의 실효성을 의심케 합니다. 욥기 21:7은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하며 오래 사는도다”라며 악의 지속을 한탄하고, 예수가 죄인을 구했다면 세상의 악이 줄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둘째,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며 죄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사야 11:9의 “땅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리라”는 평화로운 왕국은 예수 시대에 실현되지 않았고, 탈무드(산헤드린 98a)는 메시아가 오면 전쟁이 끝난다고 보아 예수의 구속을 부정합니다. 신명기 24:16은 “각 사람이 자기 죄로 죽으리라”라 하며 대속 개념을 배제합니다.

 

셋째, 이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므로 죄를 구속할 권한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꾸란 4:157은 “그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라 하여 예수의 구속 죽음을 부정하고, 꾸란 19:33은 예수를 예언자로만 묘사하며 하나님의 아들(꾸란 112:3, “그는 낳이지도 아니하셨다”)이라는 주장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합니다.

 

넷째, 현대 회의론자들은 십자가의 구속을 신화적 이야기로 치부하며 실질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부활과 구속을 제자들의 조작이나 집단 망상으로, 로마서 5:8의 속죄를 고대 희생 제의(예: 레반트의 바알 신화)에서 차용한 허구로 봅니다. 데이비드 흄(《기적에 관하여》)은 부활의 역사적 신빙성을 자연법칙 위배로 부정하며, 구원의 증거가 경험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다섯째, 과학적 관점은 죄와 구원의 개념을 심리적·사회적 현상으로 환원하며 초자연적 구속을 배제합니다. 프로이트(《문명의 불만》)는 죄의식과 구원을 인간의 심리적 위안으로 보고, 진화생물학(예: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은 도덕과 구속을 생존 본능의 부산물로 간주합니다. 존 쉘비 스퐁(《기독교의 재탄생》)은 십자가를 상징적 내러티브로만 해석하며, 죄인을 구한다는 주장을 비현실적 신화로 축소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키웁니다. 마가복음 2:17이 죄인 구원을 말하지만, 마태복음 25:46은 “불의한 자는 영벌에 들어가리라”며 구원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전도서 9:2는 “의인과 악인에게 같은 일이 임하나이다”라며 구속의 실질적 효과를 의심케 합니다. 이러한 악의 지속, 유대교와 이슬람의 반론, 회의론과 과학의 비판, 성경 내 불일치는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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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증에 대한 반박: 의문에 대한 치밀한 답변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신실하심 안에서 오해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지적(사도행전 8:1, 욥기 21:7)은 구원의 타이밍과 본질을 놓칩니다. 마가복음 2:17의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예수의 초림이 개인 구원을 위한 것임을 밝히며, 요한복음 16:33은 “세상에서는 환난이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 하여 악의 지속이 구원의 실패가 아님을 증언합니다. 로마서 8:18-21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창조물이 자유롭게 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 하며, 완전한 구속은 재림으로 성취됩니다.

 

둘째, 유대교가 예수를 메시아로 부인한다는 주장(이사야 11:9)은 구속의 이중적 단계를 간과합니다. 이사야 53:11의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로 만족하리라”는 죄인을 위한 속죄를 예언하며, 신명기 24:16의 개인 책임은 예수의 대속(갈라디아서 3:13,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으로 완성됩니다. 평화의 왕국은 초림이 아닌 재림(계시록 20:4)에서 이루어집니다.

 

셋째, 이슬람이 예수의 신성과 구속을 부인한다는 반론(꾸란 4:157)은 신약 계시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꾸란 19:33의 예언자 역할은 요한복음 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조화를 이루며, 꾸란 5:75의 인간성은 빌립보서 2:7의 “종의 형체로” 성육신을 반영합니다. 히브리서 2:17은 “속죄하기 위하여 인자가 되셨다”라 하여 구속 권한을 증거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이 십자가 구속을 신화로 보는 주장(도킨스, 흄)은 역사적·성경적 증거를 무시합니다. 고린도전서 15:14-17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다”와 500명 증인(고린도전서 15:6)은 부활의 실체를 입증하며, 바알 신화와 달리 로마서 5:8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로 구속의 목적을 증언합니다. 흄의 자연법칙 논리는 창세기 1:1의 창조주 권능을 배제한 편견입니다.

 

다섯째, 과학이 죄와 구원을 심리적 위안으로 보는 반론(프로프트, 스퐁)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한정합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독생자를 주셨으니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으리라”라 하여 구원이 심리적 위안이 아닌 실질적 은혜임을 증거합니다. 도킨스의 생존 본능론은 로마서 6:23의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를 약화시키지 못하며, 스퐁의 상징론은 베드로전서 3:18의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를 무력화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 모순(마태복음 25:46, 전도서 9:2)은 문맥을 오독한 결과입니다. 마태복음 25:46의 영벌은 회개하지 않은 자를 향한 심판이며, 누가복음 19:10은 “인자가 잃은 자를 구원하러 왔노라”로 보편적 구원 의지를 확증합니다. 전도서 9:2의 세상 현실은 디모데전서 1:15의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로 극복됩니다.

 

따라서 반증은 예수의 구원을 현실적 악이나 인간 논리로만 재단한 데 불과합니다. 신약의 증언, 구속사적 완성,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진리를 흔들림 없이 입증합니다.

 

적용: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믿음의 실천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믿음은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마가복음 2:17을 묵상해 예수의 구원을 받아들이세요. 둘째, 하루 한 번 예수가 죄인을 위해 오셨음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보세요. 셋째, 주변의 상처받은 이들에게 예수의 용서와 사랑을 전하며 구원의 소망을 나누세요. 이는 예수가 죄인을 구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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