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두신 곳이었습니다(창세기 2:15).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자유를 누렸지만, 어느 날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속였습니다(창세기 3:5).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바라보았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창세기 3:6). 그녀는 아담에게도 주었고, 아담도 먹었습니다. 그 즉시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워하며 숨었습니다(창세기 3:7-8).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이를 행하였느냐?”고 물으셨을 때(창세기 3:13), 하와는 뱀을, 아담은 하와를 탓했지만(창세기 3:12-13), 그들의 선택은 죄를 가져왔고, 하나님의 심판이 뒤따랐습니다(창세기 3:16-19). 이 불순종은 죄의 시작이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구약 성경은 죄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증언하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창세기 3:6에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고 기록된 바,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세기 2:17)—을 어기고 열매를 먹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 선택은 타락을 초래했고, 하나님은 그 결과로 저주와 고난을 선언하셨습니다(창세기 3:17-19). “죽으리라”는 경고(창세기 2:17)는 자유에 책임이 따름을 분명히 하며, 죄가 우연이나 강요가 아닌 의도적 선택의 산물임을 입증합니다.
더 나아가, 구약은 선택과 죄의 연결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신명기 11:26-28에서 모세는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베푸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되고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면 저주가 되리라”고 하여,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이 각각 복과 죄를 낳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 24:15에서도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길지 우상을 섬길지 선택을 촉구했고, 우상 숭배라는 죄는 그릇된 선택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여호수아 24:20). 이는 죄가 외부 강제가 아닌 인간의 결정에서 비롯됨을 확인합니다.
욥의 사례는 이 논증을 더욱 강화합니다. 욥 1:22에서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된 바, 그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죄를 선택하지 않았고, 이는 죄가 필연적이 아니라 선택에 달렸음을 보여줍니다. 시편 34:14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며, 죄를 멀리하는 것이 가능한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이사야 1:19-20은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하여, 죄가 불순종의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를 명확히 합니다.
이 논증은 신약에서도 뒷받침됩니다. 로마서 5:12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며, 아담의 선택이 죄의 기원임을 단언합니다. 구약의 사례들은 고대 근동의 운명론적 신화—예를 들어 바빌로니아의 인간이 신의 뜻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관점—과 달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와 그에 따른 죄의 가능성을 주셨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죄는 본능이나 숙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창세기 1:26)이 선택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일관된 증언, 선택과 죄의 역사적 사례, 신학적 연속성은 죄가 선택에서 왔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죄가 인간의 선택에서 왔다는 주장에는 심각한 반대 의견이 존재합니다.
첫째, 죄가 선택에서 비롯됐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를 허락하셨을까요? 창세기 3:6에서 아담과 하와가 열매를 먹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막지 않으셨고(창세기 3:1-5), 뱀의 유혹도 허용하셨습니다. 만약 죄가 선택의 결과라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의 잘못을 미리 알면서도 방치한 책임을 지게 되며, 이는 죄의 기원을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에 돌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둘째, 현대 심리학과 과학은 죄를 선택이 아닌 본능적 충동으로 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문명과 그 불만)는 인간의 ‘이드’가 억제할 수 없는 욕망과 공격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창세기 3:6의 열매를 먹은 행위를 이성적 선택이 아닌 본능적 끌림으로 해석합니다. 신경과학도 결정이 뇌의 무의식적 과정에서 비롯됨을 보여주며(Nature Neuroscience, 2008년, Libet 실험), 하와의 행동이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 유전적·환경적 요인에 의한 필연적 결과일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은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로 간주하며, 죄를 억압적 개념으로 치부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죄는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종교적 발명”이라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도덕적 우화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죄를 약자의 자기 부정으로 보고, 선택에서 온 것이 아니라 권력 구조가 강요한 관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죄가 개인의 선택이 아닌 문화적 산물임을 시사합니다.
넷째, 다른 종교는 죄의 기원을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돌립니다. 이슬람의 꾸란 7:19-20은 아담과 이브가 열매를 먹은 사건을 기록하지만, 꾸란 2:37에서 “아담이 주님께 용서를 받아 회개했다”며 죄가 하나님의 계획과 용서 아래 있다고 봅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죄를 유도했다고 해석할 여지를 주며, 책임을 줄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누마 엘리시)는 인간의 고난과 죄를 신들의 변덕과 경쟁으로 설명하며, 구약의 선택 중심 내러티브가 편파적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는 죄가 선택에서 오지 않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빈곤이나 교육 부족으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선택의 자유가 제한된 상태에서 행동하며(The Atlantic, 2016년 3월, “The Poverty-Crime Connection”), 이는 죄가 의지적 선택이 아니라 환경적 강요일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허락, 본능적 기원, 신화적 재해석, 종교적 대안, 사회적 조건은 죄가 선택에서 왔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킵니다.
이 반대 주장은 죄의 기원과 인간의 자유를 오해하거나 맥락을 왜곡한 결과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죄를 허락하셨다는 의문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간과합니다. 창세기 2:16-17에서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며 선택의 자유를 주셨고, “죽으리라”는 경고로 그 책임을 명시하셨습니다. 뱀의 유혹(창세기 3:1-5)이 있었으나, 창세기 3:6은 하와와 아담이 스스로 열매를 먹기로 결정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의 자유를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 선택을 존중하신 결과로 죄가 나타났습니다(여호수아 24:15, “섬길 자를 택하라”). 이는 죄가 하나님의 강요가 아닌 인간의 선택에서 왔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현대 심리학과 과학이 죄를 본능으로 본다고 하지만, 이는 인간의 영적 차원을 무시합니다. 프로이트의 ‘이드’나 신경과학(Nature Neuroscience, 2008)은 충동과 뇌 과정을 설명하지만, 창세기 1:26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본능을 초월한 도덕적 판단 능력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6에서 하와는 열매가 “탐스럽다”고 판단하며 의식적 선택을 했고, 이는 무의식적 본능이 아닌 이성적 결정이었습니다. 로마서 7:19-20에서 바울은 “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고 하며 본능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죄를 선택의 결과로 봅니다. 과학은 ‘어떻게’를 다룰 뿐 ‘왜’를 설명하지 못하며, 죄는 선택에서 비롯된 영적 행위로 남습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이 창세기를 신화로, 죄를 억압으로 치부하지만, 이는 구약의 신학적 권위를 약화시킵니다. 도킨스의 “죄는 종교적 발명”이란 주장은 창세기 3:17-19의 타락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진 역사적 사실을 무시합니다. 니체의 죄 개념 비판은 인간 중심적 철학일 뿐, 시편 51:4—“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는 죄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선택임을 분명히 합니다. 고대 근동 신화와의 유사성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가 왜곡된 반영일 수 있으며, 창세기의 일관성과 깊이는 신화적 우화 이상의 증거를 제공합니다(로마서 5:12).
넷째, 이슬람과 고대 신화가 죄를 하나님의 뜻이나 신의 장난으로 돌리지만, 이는 구약의 독창성을 간과합니다. 꾸란 7:19-20은 아담의 죄를 기록하지만, 창세기 3:13에서 하나님은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를 행하였느냐?”고 물으시며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십니다. 꾸란 2:37의 용서는 회개의 결과이지 죄의 면제가 아니며, 구약과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에누마 엘리시의 신들의 변덕과 달리, 창세기 2:17은 죄를 선택의 결과로 명확히 제시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자유를 조화시킵니다(이사야 1:19-20).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에서 죄가 환경적 강요로 보일 수 있다는 주장은 선택의 책임을 축소합니다. 빈곤과 범죄(The Atlantic, 2016)의 연관성은 환경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창세기 4:7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나 너는 그것을 다스릴지니라”고 하시며 선택의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신약도 “유혹을 감당할 길을 주시리라”(고린도전서 10:13)며 환경 속에서도 죄를 피할 자유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허락, 인간의 영적 고유성, 성경의 권위, 신학적 일관성, 선택의 가능성은 죄가 선택에서 왔다는 증거를 강력히 입증합니다.
죄가 선택에서 왔다는 믿음은 현대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첫째, 개인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창세기 3:6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선택했듯, 우리는 일상에서 죄를 피하려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둘째, 죄의 결과를 인정하고 회개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시편 51:4의 회개처럼, 잘못된 선택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공동체 안에서 죄를 예방하는 책임을 나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의 약속을 믿고, 서로를 격려하며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죄를 선택의 문제로 인식하며 회복을 추구하는 신앙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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