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를 복을 주고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하셨더라."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아브람은 목적지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고 아내 사라와 조카 롯,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났습니다(창세기 12:5). 가나안 땅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세기 12:7)고 하셨고, “내가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를 축복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 12:2)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창세기 12:7).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났으며, 이 순종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했음을 일관되게 증언하며, 이는 그의 순종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기초를 입증합니다. 창세기 12:1-3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를 복을 주고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셨고, 창세기 12:4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라며 그가 약속만을 의지해 즉시 순종했음을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8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가되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더니”라며, 그의 믿음이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한 결과임을 찬양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어졌습니다. 창세기 15:6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여, 그의 믿음이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로마서 4:3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구속사의 모형으로 재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리라”(창세기 12:2)—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개인을 넘어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시작임을 드러냅니다(갈라디아서 3:8).
구약의 다른 증언들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여호수아 24:2-3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불러내사 가나안 땅을 주셨다”며, 그의 믿음이 자손에게 복으로 이어진 구체적 결과를 강조합니다. 이사야 51:2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보아라 그가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복을 주었노라”고 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축복의 근원임을 증언합니다. 시편 105:6-9는 “아브라함의 자손아 여호와께서 그와 세우신 언약을 천 대까지 기억하셨도다”라며, 그의 믿음이 영원한 언약의 토대가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고대 근동의 우상 숭배—예를 들어 갈대아 우르의 다신교적 환경(여호수아 24:2)—과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구별됩니다. 창세기 22:18의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은 그의 믿음이 메시아를 통한 구속으로 완성됨을 예고하며(갈라디아서 3:16), 신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이유를 입증합니다(로마서 4:16). 따라서 구약의 일관된 증언, 믿음과 언약의 역사적 실현, 신학적 연속성, 구속사적 중요성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불렸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불렸다는 주장에는 중대한 반대 의견이 존재합니다.
첫째, 믿음으로 불렸다면 왜 아브라함도 실수와 약점을 드러냈을까요? 창세기 12:10-13에서 그는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며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창세기 16:2-4에서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행동은 히브리서 11:8의 “믿음으로 나갔다”는 찬양과 모순되며, 그의 떠남이 신앙보다는 두려움과 실용적 판단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둘째, 현대 심리학과 과학은 아브라함의 떠남을 신앙이 아닌 생존 본능으로 해석합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A Theory of Human Motivation, 1943)는 안전과 생리적 욕구가 인간 행동의 근원이라며, 창세기 12:1의 “떠나가라”를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의 환경적 압박(기근, 전쟁 가능성)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 선택으로 봅니다. 신경과학도 결정이 감정과 무의식에 좌우됨을 보여주며(Nature Reviews Neuroscience, 2018), 그의 순종이 초자연적 믿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은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전설로 간주하며 믿음을 허구로 치부합니다. 토마스 페인(이성의 시대)은 “아브라함 이야기는 고대 유목민의 구전 설화”라며, 창세기 12:1-3의 약속이 후대에 추가된 신화적 장식이라고 비판합니다. 존 로프트(The Bible Unearthed, 2001)는 아브라함의 실존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며, “믿음으로 불렸다”는 서사가 종교적 정당화를 위한 허구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넷째, 다른 종교는 아브라함을 다르게 해석하며 구약의 믿음 중심 내러티브를 의심합니다. 이슬람은 꾸란 2:124에서 이브라힘을 “하나님의 친구”로 인정하지만, 그의 떠남을 시험과 순종의 맥락(꾸란 37:99-102)으로 보며, “복의 근원”이라는 창세기 12:2의 구체적 언약보다 알라의 뜻에 복종한 인물로 강조합니다. 이는 구약의 믿음 초점을 약화시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길가메시 서사시)는 인간의 여정을 신의 변덕이나 운명으로 묘사하며, 아브라함의 떠남이 하나님의 부름이 아닌 우연적 방랑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는 믿음의 실질성을 의심케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현대인은 드물고, 그의 선택은 오늘날 비현실적 모험으로 보입니다(예: 현대 이주민의 경제적 동기, UN Migration Report, 2022). 만약 믿음으로 불렸다면, 왜 그의 후손조차 반복된 불신과 실패를 겪었을까요?(출애굽기 32:1-4) 따라서 아브라함의 실수, 본능적 해석, 전설적 재구성, 종교적 차이, 현실적 불일치는 그가 믿음으로 불렸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킵니다.
이 반대 주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오해하거나 맥락을 왜곡한 결과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실수(창세기 12:10-13, 16:2-4)를 저질렀다고 해서 믿음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11:8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더니”라며, 그의 믿음이 완벽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임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15:6의 “여호와를 믿으니 의로 여기셨다”는 그의 믿음이 실수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실수는 인간의 연약함(로마서 3:23)을 반영하지만, 창세기 12:4의 순종은 믿음의 결정적 증거로 남습니다.
둘째, 현대 심리학과 과학이 그의 떠남을 본능으로 해석하지만, 이는 영적 차원을 간과합니다. 매슬로우의 욕구(A Theory of Human Motivation)는 생존 동기를 설명하나, 창세기 12:1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초월적 부르심을 다루지 못합니다. 신경과학(Nature Reviews Neuroscience, 2018)이 무의식을 강조해도, 아브라함은 환경적 압박(기근은 창세기 12:10에서야 등장)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에 즉시 응답했고(창세기 12:4), 이는 본능을 넘어선 믿음의 선택입니다. 갈라디아서 3:6은 그의 믿음을 구속사적 모형으로 확인합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이 창세기를 전설로 치부하지만, 이는 구약의 신학적·역사적 권위를 약화시킵니다. 토마스 페인의 설화 주장이나 존 로프트의 고고학적 증거 부족(The Bible Unearthed)은 창세기 12:7—“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가 후손(이스라엘)에게 실현된 사실(여호수아 1:6)을 무시합니다. 이사야 51:2는 “아브라함을 보아라 내가 그를 부르고 복을 주었노라”며 그의 실존과 믿음을 증언하며, 신약의 로마서 4:16은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역할을 확증합니다. 전설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 그의 떠남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넷째, 이슬람과 고대 신화의 다른 해석은 구약의 믿음 중심 내러티브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꾸란 2:124의 이브라힘은 순종의 인물로 나오지만, 창세기 12:2-3의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리라”는 약속은 메시아를 통한 구속(갈라디아서 3:16)을 예고하며 더 구체적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운명론과 달리, 창세기 17:5—“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을 믿은 아브라함의 선택을 강조하며, 이는 우연이 아닌 신앙의 증거입니다(히브리서 11:12).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에서 그의 믿음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주장은 믿음의 본질을 오해합니다. 현대 이주(UN Migration Report, 2022)가 경제적이라 해도, 아브라함의 떠남은 물질적 보상 없이 약속만을 의지했으며(창세기 12:1-3), 이는 초월적 믿음의 모범입니다. 후손의 불신(출애굽기 32:1-4)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닌 그들의 실패를 보여주며, 그의 믿음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요한복음 8:56). 따라서 실수의 맥락, 믿음의 영성, 역사적 실현, 신학적 조화, 구속사적 유효성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불렸다는 증거를 강력히 입증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불렸다는 믿음은 현대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첫째,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1처럼 목적지를 알지 못해도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약속을 붙잡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8의 아브라함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셋째, 공동체에 믿음의 모범을 전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4:16의 “믿음의 조상”처럼, 믿음의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을 실천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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