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태초에 하나님은 땅에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이렇게 아담이 창조되자,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 두시고 하늘과 나무, 강을 보게 하셨습니다(창세기 2:8).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26)고 하셨고, 아담은 창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짐승들을 데려오셔서 이름을 짓게 하셨으며(창세기 2:19-20), 이는 그가 하나님께 받은 다스림의 권세를 보여줍니다. 이어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하와를 지으셨고(창세기 2:21-22),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그녀를 맞이했습니다(창세기 2:23).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주를 반영하며, 그의 뜻을 이루는 존재로 서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증언하며, 이는 인간의 본질과 지위에 대한 강력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고,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지성, 의지, 창조성, 도덕성—을 반영하도록 설계되었음을 뜻합니다. 창세기 1:27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며 이 사실을 재확인하며, 단순한 비유가 아닌 실질적 창조 행위를 강조합니다. 인간은 창조물 중 유일하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음”을 받아 생령이 되었고(창세기 2:7), 이는 짐승과 구별되는 영적 본질을 부여받았음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창세기 1:28). 이는 하나님의 통치 능력을 반영한 고유한 위임으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특권입니다. 시편 8:5-6은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으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나이다”라며 인간의 존귀함과 창조 질서 속 특별한 지위를 찬양합니다. 인간의 도덕성과 관계성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증거합니다. 창세기 3:8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함께 동산에서 교제하셨고, 이는 인간만이 하나님과 의식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면, 짐승은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 이런 영적 교감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또한, 구약은 인간의 형상이 죄로 손상되었음에도 여전히 유지됨을 확인합니다. 창세기 9:6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으므로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피를 흘리게 하리라”고 기록하며,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생명 가치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함을 분명히 합니다. 이사야 43:4는 “너는 내 눈에 보배로워 존귀하니 내가 너를 사랑하였느니라”며,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향한 특별한 목적을 드러냅니다. 이는 인간이 단순한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적 설계로 창조된 존재임을 입증합니다.
이 논증은 고대 근동의 다른 신화와도 대비됩니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시에서는 인간이 신들의 노예로 창조되었다고 보지만, 구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귀한 동역자로 제시합니다. 신약도 이를 뒷받침하며, 야고보서 3:9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을 상기시키며 인간 존엄성을 재확인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일관된 증언, 인간의 영적·도덕적 고유성, 창조 질서 속 특별한 역할, 그리고 타 문화와의 뚜렷한 대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장에는 심각한 반대 의견이 존재합니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왜 끊임없이 죄와 악을 저지르는 걸까요? 전쟁, 폭력, 탐욕은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이는 창세기 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는 주장과 모순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한다면, 완벽하고 선한 특성만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실의 잔혹함은 신성한 형상보다는 동물적 본능을 더 연상시킵니다.
둘째, 현대 과학은 인간을 진화의 산물로 간주하며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유전자 분석(예: 인간과 침팬지의 DNA 98% 유사성, Nature 2005년 연구)은 인간이 수백만 년에 걸친 자연 선택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창세기 2:7의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창조 서술을 무시하며, 인간을 특별한 형상의 소유자가 아닌 진화론적 연속성 속 존재로 봅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은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를 들어 신성한 형상을 허구로 치부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인간의 도덕적 결함과 신체적 취약성을 지적하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그 하나님은 참으로 불완전한 존재일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고통과 무지를 들어(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 신성한 설계보다 무작위적 우연을 더 그럴듯한 설명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인간의 존귀함(시편 8:5)을 신화적 과장으로 간주하게 만듭니다.
넷째, 다른 종교는 인간의 형상 개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은 꾸란 42:11에서 “그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나니”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구별을 강조하고, 인간을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로만 봅니다. 이는 창세기 1:26의 형상 주장을 신학적으로 상충되게 만듭니다. 유대교 외의 고대 근동 신화,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시는 인간을 신들의 노예나 부산물로 묘사하며, 구약의 특별한 지위가 문화적 편견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 반대 주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오해하거나 부분적으로만 바라본 결과입니다.
첫째, 인간이 죄와 악을 저지른다는 점이 형상을 부정한다고 보지만, 이는 창조의 본질과 타락의 구분을 간과합니다. 창세기 1:26-27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창세기 1:31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6-19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죄와 고난이 들어왔다고 기록하며(로마서 5:12,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는 형상이 본래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유 의지의 결과로 손상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형상은 여전히 존재하며, 죄성은 그 왜곡일 뿐 완전한 소멸이 아닙니다(창세기 9:6,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둘째, 현대 과학이 인간을 진화의 산물로 본다고 해서 형상이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진화론과 DNA 유사성(예: Nature 2005년)은 인간의 신체적 기원을 설명할 수 있지만, 창세기 2:7의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영적 차원을 다루지 못합니다. 과학은 ‘어떻게’를 다룰 뿐 ‘왜’와 ‘누가’를 답하지 않으며, 빅뱅과 진화 과정을 하나님의 창조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저명한 신학자 존 스토트(The Message of Genesis)는 미시 진화를 인정하면서도 “종류대로”(창세기 1:21)가 하나님의 설계 틀 안에서의 변화를 허용한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과학은 형상의 물리적 표현을 반박하기보다 보완할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이 인간의 부족함을 들어 형상을 허구로 치부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벽함을 뜻하지 않음을 무시합니다. 시편 8:5는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하여, 형상이 신성과 동등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지성, 도덕성, 관계성)을 반영한 유사성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도킨스의 비판(“불완전한 하나님”)은 형상을 과장 해석한 것이며, 흄의 고통 논증은 죄의 결과(창세기 3:17-19)를 창조의 결함으로 오인한 데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결함은 형상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구속의 필요성을 드러냅니다(고린도후서 3:18, “형상에서 형상으로”).
넷째, 이슬람과 고대 신화의 반대는 구약의 독창성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꾸란 42:11(“그와 같은 것은 없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지만, 인간의 영적 고유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창세기 1:26과 신학적 맥락에서 상호 보완적입니다. 반면, 에누마 엘리시가 인간을 신의 노예로 보았다면, 구약은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28)며 인간을 존귀한 동역자로 제시합니다. 이는 문화적 편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다른 신화에서 왜곡된 증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1:3, “그의 영광의 광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믿음은 현대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차별과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창세기 9:6에서 생명 가치가 형상에 뿌리내린 만큼, 인종, 성별, 빈부를 초월한 평등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도덕성과 관계성을 반영한 형상을 살려 윤리적 결정을 내리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정의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창세기 3:8). 셋째, 죄로 왜곡된 형상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개인적 회개와 사회적 개혁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3:18). 이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일상과 사회에 반영하는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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