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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 인과를 의심한 회의주의자 (1711~1776년)

by modeoflife 2025. 4. 5.

 

흄, 인과를 의심한 회의주의자 (1711~1776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조용한 가정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흄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믿음을 뿌리째 흔든 철학자였다. 그는 “인과는 보장된 진리가 아니라 습관일 뿐”이라며,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지식에 의문을 던졌다. 계몽주의의 빛이 이성을 찬양하던 시대에, 그는 그 이성의 한계를 파헤치며 회의주의의 길을 걸었다. 흄의 이야기는 철학이 확신을 주는 대신, 우리를 불편한 질문 속으로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삶과 배경: 계몽의 시대에 태어난 반항아

데이비드 흄은 1711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중산층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18세기 유럽은 계몽주의의 전성기였다. 뉴턴의 과학이 우주를 설명했고, 로크와 볼테르는 이성과 자유를 외쳤다. 흄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열두 살에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다. 법학을 공부했지만, 그는 법조계의 딱딱한 삶을 거부했다. “철학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나를 사로잡았다”며, 그는 학문의 길로 뛰어들었다.

 



스무 살 무렵, 그는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철학에 몰두하던 그는 과로로 건강을 해쳤고, 회복을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1734년, 프랑스 라 플레슈(La Flèche)에서 그는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썼다. 이 책은 그의 나이 스물여섯에 출간되었지만, 당대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였다”고 그는 실망을 토로했다. 이후 그는 에세이를 쓰고, 외교관 비서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말년에는 에든버러로 돌아와 『영국사』(History of England)를 집필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1776년, 간경변으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유쾌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사상: 인과와 지식의 한계를 묻다

흄의 철학은 회의주의로 빛난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로크의 경험주의를 계승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감각으로 세상을 알지만, 그 감각이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통찰은 “인과관계(Causation)”에 대한 의문이다. 우리는 태양이 매일 뜨는 것을 보고 “내일도 뜰 것”이라 믿지만, 이는 논리적 필연이 아니라 습관일 뿐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인과는 마음이 사건들을 연결한 결과다”—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보지 않고, 단지 반복된 패턴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구공 A가 B를 치면 B가 움직인다. 우리는 A가 B를 “움직이게 했다”고 말하지만, 흄은 “우리는 충돌과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보았을 뿐, 인과라는 실체를 본 적 없다”고 썼다. 이는 과학과 일상의 믿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도 회의했다. “기적은 경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니 믿을 수 없다”며, 종교적 확신을 비판했다. 그의 회의주의는 철저했지만,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그는 “우리는 의심하더라도 살아가기 위해 믿는다”며 실용적 태도를 보였다.

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

흄은 철학을 대중에게 전하려 했다. 『인성론』이 실패한 뒤, 그는 『도덕·정치·문학 에세이』(Essays, Moral, Political, and Literary)를 써서 더 쉬운 언어로 사상을 풀었다. 그는 경제, 정치, 종교를 다루며, 자유 무역과 관용을 옹호했다. 그의 『영국사』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철학자보다 역사가로 더 유명해졌다. 그는 철학을 고고한 학문에서 일상으로 끌어내렸고, “철학은 인간의 삶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의 회의주의는 실천적이었다. 그는 종교적 광신을 경계하며, “회의는 편견을 깨는 도구”라 썼다. 그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중심 인물로, 애덤 스미스와 교류하며 경제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더 열린 시각으로 보게 했다.

인간적 면모와 흥미로운 일화

흄은 유쾌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뚱뚱한 체격과 느긋한 성격으로 “착한 데이비드”라 불렸다. 친구들은 그의 철학이 날카롭지만, 성품은 따뜻하다고 평했다. 한번은 프랑스 살롱에서 루소와 논쟁하다가, 루소가 과민 반응을 보이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웃어넘겼다. 그는 루소를 영국으로 초대했지만, 루소의 변덕에 결국 관계가 틀어졌다—흄은 이를 “친절의 대가”라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의 유머는 글에서도 드러난다. 『인성론』에서 그는 “철학자가 너무 진지하면 세상은 그를 무시한다”며 자조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담담했다. 친구 제임스 보스웰이 “죽음 후를 믿지 않느냐?”고 묻자, “내가 태어나기 전을 걱정하지 않듯, 죽은 후도 걱정 없다”고 답했다. 그는 에든버러의 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마지막 날을 보냈다—회의주의자답게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철학사 속 의미와 영향

흄은 계몽주의에 균열을 내며 근대 철학의 길을 열었다. 그의 회의주의는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고 고백하게 했다. 칸트는 흄의 인과 비판에서 영감을 받아 『순수이성비판』을 썼다. 흄의 경험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과 현대 실증주의로 이어졌고, 그의 회의적 태도는 과학적 탐구의 기초가 되었다—우리는 가설을 증명할 순 있어도 절대적 진리를 보장할 순 없다.

그의 영향은 철학을 넘어섰다. 애덤 스미스는 흄의 도덕 감정 이론을 받아들여 경제학에 인간적 요소를 더했다. 흄은 종교적 독단을 비판하며 관용의 문화를 키웠다. 그러나 그의 회의주의는 비판도 받았다—너무 철저하면 삶의 확신을 잃게 한다는 지적이다. 흄은 이에 “의심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웃었다.

흄이 남긴 질문

흄은 우리가 믿는 세상에 의문을 던졌다. 그의 철학은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진짜로 아는가? 인과는 진리인가, 습관인가? 그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의심하라, 그러나 살아가라.” 그의 삶은 유쾌한 회의주의자의 여정이었고, 그의 사상은 우리에게 세상을 새로 보는 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