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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최대 다수를 위한 행복을 논하다 (1806~1873년)

by modeoflife 2025. 4. 4.

 

존 스튜어트 밀, 최대 다수를 위한 행복을 논하다 (1806~1873년)

런던의 북적이는 거리에서 태어난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을 숫자가 아닌 질로 재정의하려 한 철학자였다. 그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계승했지만,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더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새롭게 그렸다. 엄격한 교육과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한 그의 삶은, 철학이 책상 위의 계산이 아니라 인간다움에 대한 깊은 성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밀의 이야기는 행복을 넘어 자유와 존엄을 꿈꾼 한 인간의 고독하면서도 따뜻한 여정을 담고 있다.

삶과 배경: 천재로 길러진 소년

존 스튜어트 밀은 1806년, 런던에서 제러미 벤담의 친구이자 철학자인 제임스 밀(James Mill)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의 소음과 제국의 번영으로 가득했다. 빈부격차는 심화되었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목소리가 커졌다. 밀은 아버지의 손에서 철저한 실험적 교육을 받았다. 세 살에 그리스어를, 여덟 살에 라틴어를 배웠고, 열네 살엔 경제학과 철학 고전을 읽었다. 아버지와 벤담은 그를 공리주의의 후계자로 키우려 했고, 그는 놀라운 속도로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기계적이었다—감정과 놀이는 배제된, 오직 이성과 논리를 위한 교육이었다.

 



밀은 스무 살에 정신적 위기를 맞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시달렸다고 썼다. 기계처럼 배운 공리주의가 그의 영혼을 채우지 못했다.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은 시인 워즈워스(Wordsworth)의 자연과 감정을 노래한 시였다. 그는 이성을 넘어 감정과 예술의 가치를 깨달았고, 벤담의 철학을 인간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인도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하며 사회 개혁에 힘썼다. 187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사망하기까지 그는 철학을 삶으로 실천하려 했다.

사상: 공리주의의 재정의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계승했지만, 이를 단순한 쾌락 계산에서 질적 행복으로 확장했다. 벤담은 모든 쾌락을 양으로만 측정했지만, 밀은 “돼지의 만족스러운 쾌락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낫다”며 질의 차이를 강조했다. 그는 쾌락에 고저가 있다고 보았다—육체적 쾌락보다 지적, 도덕적, 예술적 즐거움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공리주의는 여전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했지만, 행복의 깊이와 다양성을 더했다.

밀은 자유를 공리주의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의 저서 『자유론』(On Liberty, 1859)에서 그는 개인의 자유가 사회 전체의 행복에 필수적이라고 썼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보장되어야 한다”며, 다수의 억압이 소수의 행복을 짓밟아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벤담의 계산법과 달랐다—밀은 숫자만으론 정의를 잴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 1869)에서 여성의 평등을 옹호하며, 억압받는 이들의 자유가 모두의 행복을 늘린다고 역설했다.

사회 개혁과 자유의 옹호자

밀은 철학을 사회 개혁에 적용했다. 그는 영국 의회에서 투표권 확대와 노동 조건 개선을 지지했다. 여성의 투표권과 교육권을 주장한 그는 당시로선 급진적이었다. 그는 여성의 종속을 “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라며, 남녀 평등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높인다고 보았다. 그는 노예제 폐지 운동에도 동참했고, 빈곤층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의 철학은 벤담처럼 법 체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그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행복의 토대로 삼았다.

밀은 표현의 자유도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진리는 토론과 비판 속에서만 빛난다”며, 다수의 의견이 틀릴 수 있다고 썼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 분위기와 충돌했다. 그는 정부의 과도한 간섭을 경계하며, 개인이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강조했다. 그의 사상은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인간적 면모와 흥미로운 일화

밀은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로, 사교적 활동보다는 독서와 철학적 대화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였다. 해리엇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밀과는 약 18년에 걸쳐 깊은 지적 교류와 우정을 나누었으며, 결국 1851년 그녀의 남편 사망 후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밀은 그녀를 “내 모든 사상의 공동 저자”라고 표현할 만큼 높은 존경과 애정을 보였다.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에는 해리엇의 사상적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해리엇은 1858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사망했으며, 밀은 이후 그 근처에서 거주하며 그녀의 무덤을 지극히 아끼고 돌봤다. 그는 1873년, 같은 장소에서 세상을 떠나 그녀 곁에 묻혔다.

그의 인간적 면모는 자서전에서 드러난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계적 교육을 “감정을 잃은 시간”이라 회고하며, 예술과 자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썼다. 한번은 친구와 토론 중 “행복만 추구하면 우리는 로봇이 된다”며, 자유와 개성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산책을 즐겼고, 자연 속에서 철학적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했다.

철학사 속 의미와 영향

밀은 공리주의를 인간적인 철학으로 재탄생시켰다. 벤담의 양적 계산을 넘어 질적 행복과 자유를 더하며, 공리주의를 현대 윤리학의 주류로 만들었다. 그의 『자유론』은 개인의 권리와 민주주의의 기초 문헌이 되었고, 존 롤스와 같은 후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정의와 행복의 균형을 고민하며, 공리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려 했다.

그의 사상은 사회 개혁에도 흔적을 남겼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그의 주장을 기반으로 힘을 얻었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그의 옹호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비판도 받았다—질적 쾌락의 기준이 모호하고, 자유가 과도하면 사회 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밀은 이에 “자유로운 개인이야말로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며 맞섰다.

밀이 남긴 질문

밀은 행복을 숫자 너머로 확장하려 했다. 그의 철학은 묻는다: 행복과 자유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자유를 희생할 수 있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자유 속에서만 피어난다.” 그의 삶은 고독한 천재의 여정이었고, 그의 사상은 인간다움과 존엄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

 

# 철학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