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루살렘 거리에서 율법사가 예수께 다가와 시험하듯 물었습니다.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느니라”(마태복음 22:37-40)。어느 날, 예수께서는 강도 만난 자를 보시고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다른 이들은 죄로 굳은 마음으로 외면했으나,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를 싸매고 여관에 데려가 돌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누가복음 10:33-35)。또 다른 날,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기도하시며(누가복음 23:34), 원수까지 위해 구원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그의 사랑은 죄와 분노를 이기셨고, 제자들은 이를 보고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라 증언했습니다。예수의 계명은 율법의 완성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거룩한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백성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은 사랑이 예수의 핵심 가르침이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정점임을 확고하고 다층적으로 증언하며, 이는 구속사적, 신학적, 역사적 증거로 입증됩니다。마태복음 22:37-40에서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느니라”고 선언하시며, 사랑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근본”으로 삼으셨습니다(마태복음 22:40)。이 사랑은 죄와 분열을 이기는 하나님의 뜻임을 요한일서 4:8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 하여 증거합니다。
예수의 사역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실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마가복음 1:41에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를 고치시고”라 하여 사랑으로 병을 이기셨고, 누가복음 7:48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 하여 죄인을 용서하시며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십자가는 사랑의 궁극적 승리입니다—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 하여, 예수의 사랑이 죽음과 죄를 이겼음을 증언합니다。로마서 5:8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라 하며 구속의 사랑을 확증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 사랑의 승리를 신학적으로 강화합니다。고린도전서 13:7-8에서 바울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 하여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고 선언하며, 고린도전서 13:13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을 것이요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 하여 사랑의 우월성을 증거합니다。베드로전서 4:8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 하여 사랑이 죄를 이기는 힘임을 강조합니다。요한복음 13:34-35에서 예수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나의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시며, 이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표증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초기 교회는 이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사도행전 2:44-47은 “믿는 자들이 다 함께 있어 물건을 통용하고 찬송함으로 기뻤더라”라 하여 사랑이 박해와 물질적 결핍을 이긴 공동체를 형성했음을 기록합니다。사도행전 4:32-34는 “마음과 뜻을 합하여 가진 것을 나누며 빈궁한 사람이 없더라”라 하며, 사랑이 분열과 궁핍을 극복했음을 증언합니다。로마서 8:37-39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죽음도 생명도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라 하여 사랑의 불패를 확언합니다。
역사적 증거도 이를 뒷받침합니다。요세푸스(《유대 고대사》 18.3.3)는 예수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사랑으로 하나로 묶고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기록하며, 플리니우스 더 영거(기원후 112년 편지 10.96)는 기독교인들이 사랑으로 결속되어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고 전합니다。타키투스(《연대기》 15.44)는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사랑의 메시지가 퍼졌음을 인정합니다。구약 예언은 이를 예표합니다。이사야 53:5는 “그의 사랑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리라”라 하여 메시아의 사랑이 죄를 이김을 예언하고, 호세아 11:4는 “사랑의 줄로 인도하리라”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합니다。따라서 신약의 계명, 예수의 사역, 사도들의 증언, 초기 교회의 승리, 역사적 기록, 구약의 예언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강력하고도 흔들림 없는 증거입니다。예수의 사랑은 죄와 죽음을 이기고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면 왜 세상은 여전히 증오, 갈등, 전쟁으로 가득할까요? 마태복음 22:37-40이 사랑을 율법의 근본이라 했지만, 예수 이후 로마의 박해(사도행전 8:1), 중세의 종교 전쟁, 현대의 테러와 분쟁은 사랑의 승리를 의심케 합니다。욥기 24:12는 “부상당한 자의 신음 소리가 들리나 하나님은 어찌하여 벌하지 않으시나이까”라며 증오와 고난의 지속을 한탄하고, 사랑이 현실의 악을 이기지 못했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둘째, 유대교는 사랑이 율법 준수보다 우선한다는 예수의 해석을 과도하고 왜곡된 것으로 보며 거부합니다。레위기 19:18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지만, 이는 율법의 맥락 안에서 제한적이며(탈무드, 샤밧 31a), 예수의 보편적 사랑은 율법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합니다。신명기 6:5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 준수가 핵심이지, 예수의 사랑 중심 해석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이루지 못한 실패로 간주됩니다(이사야 11:9, 평화 미완성)。
셋째, 이슬람은 사랑이 하나님의 율법과 자비 아래 있다고 보며, 예수의 사랑을 모든 것을 이기는 보편적 승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꾸란 2:177은 “의로움은 하나님을 믿고 자비를 행함이라”라 하여 사랑을 율법 준수의 일부로 제한하고, 꾸란 4:157은 예수의 십자가를 부정하며(꾸란 3:55,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다”), 사랑의 승리를 신학적으로 약화시킵니다。꾸란 49:13은 하나님의 질서가 사랑보다 우선한다고 봅니다。
넷째, 현대 회의론자들은 사랑을 감정적 이상이나 신화적 과장으로 치부하며, 십자가를 패배의 증거로 봅니다。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십자가의 사랑(요한복음 3:16)을 로마의 처형과 고대 희생 제의에서 나온 허구로 간주하고, 토마스 제퍼슨(《제퍼슨 바이블》)은 예수의 사랑을 도덕적 이상으로만 보며 초월적 승리를 부정합니다。데이비드 흄(《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은 사랑을 감정적 편향으로 해석하며 현실적 힘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섯째, 현대 심리학은 사랑을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약한 감정이나 심리적 방어 기제로 주장합니다。프로이트(《문명의 불만》)는 사랑을 억압된 욕망의 투사로, 아들러(《개인 심리학》)는 열등감의 보상으로 봅니다。존 쉘비 스퐁(《새로운 기독교》)은 고린도전서 13:7-8의 사랑을 이상화된 위안으로 간주하며, 현대의 갈등(예: 전쟁, 빈곤)을 이기지 못하는 감정적 약점으로 해석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키웁니다。마태복음 22:37-40이 사랑을 최우선이라 하지만, 마태복음 10:34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 하여 갈등을 예고하고, 전도서 3:8은 “미워하는 때와 사랑하는 때가 있다”라며 사랑의 보편적 승리를 상대화합니다。이러한 세상의 증오, 유대교와 이슬람의 반론, 회의론과 심리학의 비판, 성경 내 불일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신실하심 안에서 오해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세상에 증오와 갈등이 남아 있다는 지적(사도행전 8:1, 욥기 24:12)은 사랑의 승리 타이밍과 본질을 놓칩니다。마태복음 22:37-40의 사랑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구속의 근본이며, 요한복음 16:33은 “세상에서는 환난이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 하여 사랑이 현세 갈등 속에서도 승리함을 증언합니다。마태복음 13:24-30의 가라지 비유는 사랑과 악이 공존하며 재림으로 완성됨을 밝히고, 로마서 8:37-39는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 하여 사랑의 불패를 확증합니다。
둘째, 유대교가 율법 준수를 사랑보다 우선한다는 주장(레위기 19:18)은 예수의 사명을 오해합니다。마태복음 5:17에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노라”라 하시며, 사랑이 율법의 참 뜻을 이루었음을 증언합니다(로마서 13: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이사야 11:9의 평화는 초림에서 사랑으로 시작되어(요한복음 13:34) 재림으로 완성되며(계시록 21:4), 탈무드의 제한적 해석은 신약 계시로 극복됩니다。
셋째, 이슬람이 사랑을 율법 아래로 본다는 반론(꾸란 2:177)은 신약의 보편적 사랑을 약화시키지 못합니다。꾸란 4:157의 십자가 부정은 요한복음 3:16의 “하나님이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와 대조되며, 고린도전서 13:8은 “사랑은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 하여 사랑의 승리를 증거합니다。꾸란 49:13의 질서는 요한일서 4:8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와 본질적 사랑을 공유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이 사랑을 감정적 이상으로 치부한다는 주장(도킨스, 흄)은 역사적·성경적 실체를 무시합니다。누가복음 10:33-35의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사랑이 실천적 승리임을 보여주고, 요한복음 15:13은 “친구를 위해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 하여 십자가의 승리를 입증합니다。흄의 감정 편향론은 로마서 5:5의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를 약화시키지 못하며, 제퍼슨의 도덕론은 고린도전서 15:17의 “사랑의 부활로 믿음이 헛되지 않다”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다섯째, 심리학이 사랑을 약한 감정으로 본다는 반론(프로프트, 아들러)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오해합니다。고린도전서 13:7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느니라”는 억압이 아닌 구속의 능력을 증언하며, 베드로전서 4:8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 하여 고난을 이기는 사랑을 증거합니다。스퐁의 위안론은 요한복음 16:20의 “너희 슬픔이 기쁨이 되리라”로 극복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 모순(마태복음 10:34, 전도서 3:8)은 문맥을 오독한 결과입니다。마태복음 10:34의 “검을 주러 왔노라”는 죄악된 세상과의 사랑의 충돌(누가복음 12:51-53)을 뜻하며, 요한복음 13:35의 “서로 사랑하면 제자라”로 완성됩니다。전도서 3:8의 상대성은 요한일서 3:16의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사랑을 알게 하셨다”로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반증은 사랑의 승리를 현실적 갈등이나 인간 논리로만 재단한 데 불과합니다。신약의 증언, 구속사적 완성,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진리를 흔들림 없이 입증합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믿음은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갈등 속에서도 마태복음 22:37-40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둘째, 하루 한 번 예수의 사랑을 본받아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보세요. 셋째, 증오와 분열을 마주할 때 사랑으로 승리하는 삶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세요. 이는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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