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

“기도는 하나님과 통한다” (마태복음 6:6)

by modeoflife 2025. 3. 3.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야기: 예수의 은밀한 기도

 

예수께서는 종종 홀로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과 교제하셨습니다。어느 새벽, 갈릴리 들판이 고요한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셨습니다(마가복음 1:35)。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아버지께 나아가셨습니다。그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6:6)。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앞두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 기도하시며(마태복음 26:39), 극심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44)。다음 날, 그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으로 평안을 얻으셨습니다。어느 날, 한 여인이 믿음으로 그의 옷자락을 만졌고(마태복음 9:20-22), 그녀의 은밀한 기도에 예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응답하셨습니다。예수의 기도는 하나님과 통하는 거룩한 교제였으며,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능력의 통로로 백성에게 계시되었습니다。

 

논증: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증거

 

신약 성경은 기도가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는 거룩한 통로임을 확고하고 다층적으로 증언하며, 이는 구속사적, 신학적, 역사적 증거로 입증됩니다。마태복음 6:6에서 예수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가르치시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약속을 주셨습니다。마태복음 7:7-8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느니라”라 하여 기도의 확실한 응답을 증거하며, 누가복음 11:13은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 하여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여는 통로임을 확증합니다。

 

예수의 기도 사역은 이 약속을 실증합니다。마태복음 26:39에서 겟세마네 동산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는 하나님과 통하며 구속의 뜻을 이루셨음을 보여줍니다(히브리서 5:7, “간구하사 응답을 받으셨느니라”)。마가복음 5:34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 하여 여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병을 낫게 하셨으며, 요한복음 11:41-42는 나사로를 살리시며 “아버지여 들으신 줄을 아나이다”라 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증언합니다。요한복음 14:16-17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리니 성령을 주시리라”라 하여 기도로 제자들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초기 교회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기도의 능력을 더욱 확고히 합니다。사도행전 16:25-26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하니 옥문이 열리더라”라 하여 기도가 물리적 결박을 이겼고, 사도행전 4:31은 “기도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니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더라”라 하여 기도가 하나님의 권능을 불러일으켰음을 증거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7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와 에베소서 6:18의 “모든 기도와 간구로 기도하라”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임을 강조합니다。야고보서 5:16-17은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니 엘리야가 간구하매 비가 멎고 다시 기도하매 비가 오더라”라 하여 기도의 실질적 응답을 입증합니다。

 

역사적 증거도 이를 보강합니다。요세푸스(《유대 고대사》 18.3.3)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기도로 하나님과 통하며 믿음의 힘을 얻었다고 기록하며, 플리니우스 더 영거(기원후 112년 편지 10.96)는 기독교인들이 기도와 찬송으로 결속된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전합니다。타키투스(《연대기》 15.44)는 박해 속에서도 기도하는 믿음이 퍼졌음을 인정합니다。구약 예언도 이를 예표합니다。시편 34:17은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셨도다”라 하여 기도의 응답을 예언하고, 이사야 65:24는 “그들이 부르짖기 전에 내가 응답하리라”라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암시합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기도의 본질을 더욱 깊이 드러냅니다。로마서 8:26-27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나니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시는도다”라 하여 기도가 하나님과 통하는 영적 통로임을 증거합니다。히브리서 4:16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라 하며,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여는 길임을 확언합니다。따라서 신약의 약속, 예수의 기도, 초기 교회의 응답, 사도들의 권면, 역사적 증언, 구약의 예언은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강력하고도 흔들림 없는 증거입니다。예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죄인을 구원하는 생명의 통로였습니다。

 

728x90

 

반증(반대 주장): 정말 기도가 하나님과 통할까?

 

그러나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면 왜 수많은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고 고난이 지속될까요? 마태복음 6:6이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했지만, 예수 시대의 로마 박해(사도행전 12:1-2), 중세 흑사병, 현대의 질병과 재난은 기도의 무응답을 보여줍니다。욥기 30:20은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며 하나님의 침묵을 한탄하고,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기도의 실효성을 의심케 합니다。

 

둘째, 유대교는 율법 준수가 기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선한다고 보며, 예수의 기도 방식을 비판합니다。신명기 6:5의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율법 준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탈무드(베라코트 32b)는 기도를 율법 실천의 보조로만 봅니다。레위기 26:3-13은 율법 준수에 응답이 따라온다고 하여, 예수의 은밀한 기도(마태복음 6:6)는 율법을 약화시키는 과장된 주장으로 간주됩니다。

 

셋째, 이슬람은 기도가 하나님의 절대적 뜻에 달렸다고 하며, 예수의 중재적 권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꾸란 2:186은 “내가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노라”고 하지만, 꾸란 40:60은 “하나님만이 응답하니라”라 하여 예수의 기도 권한을 배제합니다。꾸란 4:157은 예수의 십자가를 부정하며, 기도의 응답이 예수와 연결된다는 주장을 신학적으로 약화시킵니다(꾸란 3:59, “그는 아담과 같은 피조물”)。

 

넷째, 현대 회의론자들은 기도를 심리적 위안이나 우연의 결과로 치부하며 초월적 통로임을 부정합니다。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사도행전 16:25-26의 감옥 문 열림을 지진의 자연 현상으로, 데이비드 흄(《기적에 관하여》)은 기도 응답을 통계적 우연으로 봅니다。제임스 프레이저(《황금가지》)는 기도를 고대 주술에서 나온 미신으로 간주하며, 예수의 기도(마태복음 26:39)를 감정적 착각으로 해석합니다。

 

다섯째, 현대 과학은 기도의 초자연적 효과를 입증할 실증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가르침을 낭만적 허구로 봅니다。신경과학(샘 해리스, 《도덕의 풍경》)은 기도를 뇌의 위약 효과로, 심리학(프로이트, 《환상 미래》)은 스트레스 완화로 설명합니다。랜디 연구(《기도의 치료 효과 연구》, 2006)는 기도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확인 못 했다며, 마태복음 7:7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라”를 비현실적 낙관론으로 비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증폭시킵니다。마태복음 6:6이 기도 응답을 약속하지만, 마태복음 27:46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응답받지 못한 기도를 보여주고, 전도서 9:11은 “때와 기회가 모든 일에 임하나이다”라며 기도의 실질적 영향을 상대화합니다。이러한 응답받지 못한 기도, 유대교와 이슬람의 반론, 회의론과 과학의 비판, 성경 내 불일치는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반증에 대한 반박: 의문에 대한 치밀한 답변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 계획과 신실하심 안에서 오해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응답받지 못한 기도와 고난의 지속(사도행전 12:1-2, 욥기 30:20)이 기도의 효력을 의심케 한다는 지적은 기도의 본질과 타이밍을 놓칩니다。마태복음 6:6의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응답을 약속하며, 요한복음 16:23-24는 “구하라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주시리라”라 하여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제임을 증언합니다。욥의 한탄은 구약의 한계(욥기 42:5-6, “이제 주를 아나이다”)를 드러내며, 히브리서 11:13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믿음으로 바라보았느니라”라 하여 기도의 응답이 현세를 넘어 영원으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둘째, 유대교가 율법 준수를 기도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신명기 6:5)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합니다。마태복음 22:37-40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근본을 기도로 실천하셨으며(마가복음 1:35), 마태복음 5:17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노라”라 하여 기도가 율법을 약화시키지 않고 완성함을 증거합니다。레위기 26:3-13의 응답은 이사야 65:24의 “부르기 전에 응답하리라”로 새로워지며,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룹니다。

 

셋째, 이슬람이 기도의 응답을 하나님의 뜻에만 둔다는 반론(꾸란 2:186)은 신약의 중보적 기도를 약화시키지 못합니다。꾸란 40:60의 “부르짖으면 응답하리라”는 요한복음 14:13-14의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이루리라”와 본질적 응답을 공유하며, 히브리서 7:25는 “예수께서 중보로 구원하심이라”라 하여 그의 권한을 증언합니다。꾸란 3:59의 인간성은 빌립보서 2:7의 성육신과 조화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이 기도를 심리적 위안으로 보는 주장(도킨스, 흄)은 역사적·성경적 실체를 무시합니다。사도행전 16:25-26의 “기도하며 찬송하니 옥문이 열리더라”는 초자연적 응답을 입증하며, 마태복음 21:22는 “믿음으로 구하면 다 받으리라”라 하여 우연이 아님을 증거합니다。흄의 통계적 우연론은 창세기 18:26의 아브라함 기도 응답을 약화시키지 못하고, 프레이저의 주술론은 야고보서 5:16의 “의인의 기도는 힘이 크다”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다섯째, 과학이 기도의 효과 증거가 없다고 주장(해리스, 랜디)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한정합니다。마태복음 7:7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라”는 초자연적 권능을 전제하며, 로마서 8:26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나니”라 하여 기도의 영적 실체를 증언합니다。프로프트의 위안론은 히브리서 4:16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를 무력화하지 못하고, 랜디의 연구는 사도행전 4:31의 “기도하매 성령이 충만하더라”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 모순(마태복음 27:46, 전도서 9:11)은 문맥을 오독한 결과입니다。마태복음 27:46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시편 22:24의 “그가 부르짖는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로 응답받은 기도이며, 요한복음 19:30의 “다 이루었다”로 완성됩니다。전도서 9:11의 때와 기회는 요한복음 15:7의 “내 안에 거하면 구하는 것을 받으리라”로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반증은 기도를 현실적 고난이나 인간 논리로만 재단한 데 불과합니다。신약의 증언, 예수의 사역, 하나님의 권능은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진리를 흔들림 없이 입증합니다。

 

적용: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믿음의 실천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믿음은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고난 속에서도 마태복음 6:6을 묵상하며 은밀히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둘째, 하루 한 번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를 드려보세요. 셋째,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하세요. 이는 기도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약속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