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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생명을 준다” (요한복음 10:10)

by modeoflife 2025. 3. 1.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야기: 예수의 생명의 손길

 

어느 날, 예수께서는 갈릴리 들판에서 죄로 죽은 세상을 바라보시며 양치기로서 양들을 돌보셨습니다。굶주린 군중이 그의 발 앞에 모였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이 백성에게 무엇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한복음 6:5)。소년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신 그는 하늘을 향해 감사 기도를 드리시고(요한복음 6:9-11), 하나님의 권능으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열두 바구니가 남을 만큼 풍성한 생명을 주셨습니다。또 다른 날, 그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셨습니다。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친구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셨고(요한복음 11:43), 죽은 자가 살아나 가족에게 돌아왔습니다。예수께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한복음 10:10)。그의 손길은 죄와 허기를 구원하시고, 그의 말씀은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을 주셨습니다。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근원임을 백성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논증: 예수가 생명을 준다는 증거

 

신약 성경은 예수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고하고 다층적으로 증언하며, 이는 구속사적, 신학적, 역사적 증거로 입증됩니다。요한복음 10:10에서 예수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이 “풍성한 생명”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죄와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이며, 요한복음 10:28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리라”라 하여 그 확실성을 증거합니다。

 

예수의 사역은 생명을 주는 권능을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마태복음 9:35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며 복음을 전하셨다”라 하여 육체적 생명을 회복하셨고, 누가복음 7:14-15는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니 죽은 자가 살아나니라”라 하여 죽음에서 생명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8:11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 죄를 범치 말라” 하시며 죄인을 용서하시고 새 생명의 출발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5:24는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 하여 그의 생명이 영적 구원을 포함함을 증언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가 생명을 주신다는 궁극적 증거입니다。골로새서 1:13-14는 “그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생명의 빛 가운데로 옮기셨으니 이는 죄 사함을 얻은 구속이라”라 하여,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생명의 승리를 이루었음을 증거합니다。로마서 6:4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셨느니라”라 하며, 부활이 죄와 죽음을 이긴 생명의 근원임을 확증합니다。요한일서 5:11-12는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나니 그를 믿는 자가 생명을 얻었느니라”라 하여, 예수가 생명의 유일한 통로임을 강조합니다。

 

예수 스스로 생명을 주는 분임을 선언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여셨음을 증언하셨습니다。요한복음 11:25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 하여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권능을 확립하셨습니다。초기 교회는 이 생명을 전하며 박해 속에서도 기뻤습니다。사도행전 5:41은 “주의 이름 때문에 고난받기를 기뻤노라”라 하여 생명의 소망을 증거했고, 사도행전 13:52는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하였더라”라 하며 천국의 생명이 교회에 임했음을 보여줍니다。

 

역사적 증거도 이를 뒷받침합니다。요세푸스(《유대 고대사》 18.3.3)는 예수의 사역이 사람들에게 새 힘과 생명을 주었다고 기록하며, 그의 영향력이 초자연적이었다고 전합니다。플리니우스 더 영거(기원후 112년 편지 10.96)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생명의 근원으로 숭배했다고 보고하며, 타키투스(《연대기》 15.44)는 예수의 죽음 후에도 생명의 메시지가 퍼졌음을 인정합니다。구약 예언도 이를 예표합니다。이사야 53:10은 “그가 생명을 드리면 씨를 보리라”라 하여 메시아의 생명 주심을 예언하고, 에스겔 37:14는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살게 하리라”로 생명의 약속을 암시합니다。따라서 신약의 증언, 예수의 사역, 십자가와 부활, 초기 교회의 기쁨, 역사적 기록, 구약의 예언은 예수가 생명을 준다는 강력하고도 흔들림 없는 증거입니다。그는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반증(반대 주장): 정말 예수가 생명을 줄까?

 

그러나 예수가 생명을 준다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예수가 생명을 준다면 왜 그의 제자들은 고난받고 순교했을까요? 사도행전 7:59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사도행전 12:2는 야고보가 헤롯에게 참수당했으며,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도 로마에서 처형되었습니다。욥기 14:10은 “사람이 죽으면 없어지나니”라 하여 생명의 지속성을 의심케 하며, 제자들의 죽음은 예수의 생명 약속이 현실과 모순된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둘째, 유대교는 예수가 영원한 생명을 주지 않았다고 보며 그의 주장을 부정합니다。전도서 9:5는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영원히 상급이 끊어지나니”라 하여 죽음 이후 생명을 배제하고, 탈무드(샤밧 152b)는 사후 생명의 개념을 모호하게 남깁니다。이사야 53:8-9의 고난받는 종은 생명을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죽음으로 끝난 인물로 해석되며, 예수의 시대에 죽음이 사라지지 않았음은 그의 실패로 간주됩니다。

 

셋째, 이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므로 생명을 주는 권한이 없다고 단언합니다。꾸란 3:59는 “예수는 아담과 같으니 흙으로 창조되었다”라 하여 그의 인간성을 강조하고, 꾸란 4:157은 “그들은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라며 부활의 생명을 부정합니다。꾸란 39:42는 “하나님만이 생명과 죽음을 주관한다”라 하여 예수의 생명 주심을 신성모독적 주장으로 간주합니다。

 

넷째, 현대 회의론자들은 예수의 기적과 생명 약속을 허구나 심리적 위안으로 치부합니다。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나사로의 부활(요한복음 11:43)을 제자들의 조작이나 전설로, 빵의 증식(요한복음 6:11)을 과장된 설화로 봅니다。데이비드 흄(《기적에 관하여》)은 자연법칙 위배로 기적을 부정하며, 생명 약속을 고대 신화(예: 오시리스의 부활)에서 차용한 허구로 간주합니다。

 

다섯째, 과학적 관점은 죽음 이후 생명을 부정하며 예수의 약속을 비현실적 환상으로 여깁니다。신경과학(예: 샘 해리스, 《자유 의지의 종말》)은 의식이 뇌 활동의 결과라며 사후 생명을 불가능하다고 보고, 생물학(도킨스, 《블라인드 워치메이커》)은 생명을 유기적 과정으로만 정의합니다。존 쉘비 스퐁(《기독교의 재탄생》)은 요한복음 10:10의 생명을 상징적 위로로 해석하며 초자연적 주장을 비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증폭시킵니다。요한복음 10:10이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지만, 마태복음 10:39는 “생명을 잃는 자가 얻으리라”라 하여 생명의 실질적 의미를 모호하게 하고, 전도서 3:19-20은 “사람과 짐승의 운명이 같으니 다 흙으로 돌아가느니라”라며 생명의 영속성을 부정합니다。이러한 제자들의 고난, 유대교와 이슬람의 반론, 회의론과 과학의 비판, 성경 내 불일치는 예수가 생명을 준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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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증에 대한 반박: 의문에 대한 치밀한 답변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예수가 생명을 준다는 진리를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신실하심 안에서 오해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제자들이 고난받고 죽었다는 지적(사도행전 7:59, 12:2)은 생명의 본질과 타이밍을 놓칩니다。요한복음 10:10의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뜻하며, 요한복음 16:33은 “세상에서는 환난이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 하여 현세 고난이 생명의 부재가 아님을 증언합니다。욥기 14:10은 구약의 한계를 말하지만, 요한복음 11:25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죽음을 이긴 생명을 확증합니다。

 

둘째, 유대교가 예수의 생명 주심을 부인한다는 주장(전도서 9:5)은 구속의 완성을 오해합니다。이사야 53:10의 “그가 생명을 드리면 씨를 보리라”는 구속 생명을 예언하며, 탈무드의 모호함은 신약 계시(요한복음 5:24,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나니”)로 극복됩니다。에스겔 37:14의 “내 영으로 살게 하리라”는 예수의 생명 주심을 예표합니다。

 

셋째, 이슬람이 예수의 권한을 부인한다는 반론(꾸란 3:59)은 신약 증거를 약화시키지 못합니다。꾸란 4:157의 십자가 부정은 로마서 6:4의 “그의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얻었노라”와 대조되며, 요한복음 1:4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 하여 생명의 근원임을 증언합니다。꾸란 39:42의 하나님 주관은 요한복음 10:28의 “내가 영생을 주노라”와 본질적 권한을 공유합니다。

 

넷째, 회의론자들이 기적을 허구로 보는 주장(도킨스, 흄)은 역사적·성경적 실체를 무시합니다。요한복음 6:11의 빵 증식은 마태복음 14:21의 “오천 명이 먹었다”로 객관성을 입증하며, 요한복음 11:44의 나사로 부활은 “많은 유대인이 믿었다”(요한복음 11:45)로 증거됩니다。흄의 자연법칙 논리는 창세기 1:1의 창조 권능을 배제한 편견이며, 고린도전서 15:17은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셨으니 믿음이 헛되지 않다”라 하여 기적의 실질성을 확증합니다。

 

다섯째, 과학이 사후 생명을 부정한다는 반론(해리스, 스퐁)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한정합니다。누가복음 1:37의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초자연적 생명을 가능케 하며, 로마서 8:11은 “죽은 자를 살리신 이가 너희를 살리시리라”로 부활 생명을 증거합니다。스퐁의 상징론은 요한일서 5:12의 “아들을 믿는 자가 생명을 얻었느니라”를 무력화하지 못하고, 해리스의 뇌 의존론은 요한복음 20:27의 부활 실체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 모순(마태복음 10:39, 전도서 3:19-20)은 문맥을 오독한 결과입니다。마태복음 10:39의 “생명을 잃는 자가 얻으리라”는 영생의 역설(요한복음 12:25)을 설명하며, 전도서 3:19-20의 현세 한계는 에스겔 37:13-14의 “내가 너희를 살리리라”와 요한복음 14:6의 “내가 생명이라”로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반증은 예수의 생명을 현실적 고난이나 인간 논리로 재단한 데 불과합니다。신약의 증언, 구속사적 실현, 하나님의 권능은 예수가 생명을 준다는 진리를 흔들림 없이 입증합니다。

 

적용: 예수가 생명을 준다는 믿음의 실천

 

예수가 생명을 준다는 믿음은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음과 절망 속에서도 요한복음 10:10을 묵상하며 예수의 생명을 붙잡으세요. 둘째, 하루 한 번 예수가 주신 영원한 생명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보세요. 셋째, 고난받는 이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전하며 구원의 소망을 나누세요. 이는 예수가 생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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