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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는 사랑에서 온다” (이사야 1:18)

by modeoflife 2025. 2. 2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리라 설령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야기: 이사야의 사랑의 외침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물들어 있었습니다(이사야 1:4).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겉으로만 제사를 드리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이사야 1:11-15).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셨습니다. 이사야는 힘있게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이사야 1:18) 그의 음성은 엄했으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리라”는 약속은(이사야 1:18), 회개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은혜의 초청이었습니다. 백성이 경고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릴 때에도(이사야 1:20), 이사야는 그들을 위해 간구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이사야 1:15-17 참고). 이 경고는 단죄가 아닌 구원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백성을 다시 그분께로 이끌려는 간절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논증: 경고가 사랑에서 온다는 증거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경고가 그분의 거룩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분명하고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이사야 1:18에서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부르시며 백성을 경고하시지만, 이는 단죄가 아니라 회복의 초대입니다. 이어지는 “너희가 순종하면 땅의 복을 먹을 것이요”(이사야 1:19)라는 약속은 경고가 사랑으로 주어진 구원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55:6-7 역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악인은 그 길을 버리라”고 경고하며 “그가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긍휼히 여기시리라”는 자비의 확신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경고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백성을 그분께로 돌이키려는 간절한 초청임을 입증합니다.

 

호세아는 이 사랑을 더욱 생생히 드러냅니다. 호세아 11:4에서 하나님은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라고 말씀하시며, 죄로 떠난 이스라엘을 경고하시되(호세아 2:2-13), “광야에서 그를 위로하며 소망을 주리라”(호세아 2:14-15)고 약속하십니다. 경고는 버림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연단이며,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레미야도 “옛적부터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예레미야 31:3)며 울며 경고하고, 곧이어 “너희를 회복시키리라”(예레미야 31:4)고 위로합니다. 이 경고는 징벌이 아닌 자비의 손길로, 백성을 잃어버린 길에서 건지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시편은 경고의 목적을 찬양으로 확증합니다. 시편 119:92는 “주의 법도 사랑하심이 없었더면 내가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며,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가 생명을 살리는 사랑임을 노래합니다. 시편 94:12-13도 “주께 징계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환난 날에서 구원하심이니이다”라며 경고가 궁극적으로 구원으로 이끄는 사랑의 도구임을 강조합니다. 에스겔은 이 사랑의 깊이를 더욱 강렬히 드러냅니다. 에스겔 33:11에서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악인이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이 기쁘니라”고 선언하시며, 경고가 죽음을 막고 생명을 주려는 사랑의 절규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더 나아가, 구약 전체의 흐름은 경고와 사랑의 불가분성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길 때, 하나님은 경고로 심판을 예고하시지만(출애굽기 32:10), 모세의 중보로 자비를 베프십니다(출애굽기 32:14). 이는 경고가 사랑으로 회개와 화해를 여는 통로임을 증명합니다. 느헤미야 9:17-18도 “그들은 주를 노하게 했으나 주는 용서하는 하나님이시며 긍휼과 자비가 크시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라며, 경고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기록합니다. 신약에서조차 이 주제는 이어져, 히브리서 12:6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라며 구약의 경고가 사랑의 연장선임을 재확인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초청, 호세아의 연단, 예레미야의 눈물, 시편의 찬양, 에스겔의 절규, 그리고 구약의 일관된 증언은 경고가 하나님의 깊고 조건 없는 사랑에서 비롯됨을 강력히 입증합니다. 경고는 단지 심판의 예고가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생명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반증(반대 주장): 정말 경고가 사랑에서 오나?

 

그러나 경고가 사랑에서 온다는 주장에는 강력한 반대가 제기됩니다.

 

첫째, 경고가 사랑이라면 왜 그 표현이 이사야 1:20의 “너희가 거절하면 칼에 삼키우리라”처럼 가혹하고 위협적으로 들리는 걸까요? 에스겔 7:8-9는 “내가 분노를 네게 쏟고 진노로 너를 심판하리라”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사랑보다는 징벌과 공포에 가깝습니다. 이런 가혹함은 경고를 사랑으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둘째, 현대 철학은 경고를 사랑이 아닌 권력과 억압의 도구로 해석합니다. 미셸 푸코(권력론, 《감시와 처벌》)는 경고와 같은 종교적 담론이 개인을 통제하고 순종을 강요하는 수단이라고 비판하며, 하나님의 경고 역시 백성을 복종시키려는 권위적 억압으로 볼 여지를 줍니다. 이는 경고를 사랑과 분리시키고, 오히려 지배의 논리로 재해석합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은 이사야의 경고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적 허구로 간주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구약의 선지자 이야기를 인간의 불안에서 나온 상상으로 치부하며, 이사야 1:18의 “눈 같이 희게 하리라” 같은 약속을 비현실적 희망으로 비판합니다. 고대 근동의 다른 신화,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시》가 신들의 분노와 혼돈으로 세상을 다스린다고 보듯, 구약의 경고도 신의 사랑이 아닌 분노나 변덕의 산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넷째, 다른 종교는 경고를 인정하더라도 맥락과 목적이 다릅니다. 이슬람의 꾸란은 무함마드가 “경고자일 뿐”(꾸란 46:9)이라며 심판을 예고하지만, 알라의 자비(꾸란 39:53)가 경고와 별개로 강조되며 구약의 사랑과 경고의 통합성을 약화시킵니다. 힌두교의 업보 개념은 경고를 개인의 행위에 대한 냉정한 결과로 보며(《바가바드 기타》 4:17), 사랑의 의도로 연결짓지 않습니다. 이는 구약의 경고가 독특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주장을 상대화합니다.

 

다섯째, 현실의 고난은 경고와 사랑의 연관성을 의심하게 합니다. 유다 백성이 경고를 받았음에도 멸망당한 역사(예레미야 52:3-11)나, 현대의 전쟁과 재난은 경고가 사랑이었다면 왜 구체적인 구원이 뒤따르지 않았는지 묻게 합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은 신의 경고가 실질적 도움 없이 고통만 남긴다고 비판하며, 사랑의 증거로 보기에는 허약하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내부의 모순도 의문을 키웁니다. 이사야 1:18의 자비로운 초청과 달리, 이사야 13:9은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니 잔혹하며 분노가 있으리라”며 파괴를 예고합니다. 이런 상충은 경고가 일관되게 사랑에서 온다고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따라서 가혹한 표현, 철학적 해석, 회의론적 시각, 종교적 차이, 역사적 결과, 성경 내 모순은 경고가 사랑에서 온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강력한 반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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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증에 대한 반박: 의문에 대한 치밀한 답변

 

반증에서 제기된 의문들은 경고의 본질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오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첫째, 경고가 가혹하게 들린다는 지적은 그 목적을 간과합니다. 이사야 1:20의 “칼에 삼키우리라”나 에스겔 7:8-9의 “진노로 심판하리라”는 표현은 죄의 심각성을 깨우쳐 회개로 이끌려는 강한 사랑의 외침입니다.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 하나님은 롯에게 경고로 탈출 기회를 주셨고(창세기 19:12-13), 이는 파괴가 아닌 구원을 위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사야 1:18의 “눈 같이 희게 하리라”는 약속은 경고가 사랑으로 끝남을 분명히 하며, 가혹함은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연단임을 보여줍니다(잠언 3:11-12,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둘째, 현대 철학이 경고를 억압으로 본다는 주장(푸코의 권력론)은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을 인간적 권력과 혼동한 오류입니다. 출애굽기 20:2-3에서 하나님은 “너를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며 경고(우상 금지)를 주시지만, 이는 억압이 아니라 해방된 백성을 위한 사랑의 경계입니다. 히브리서 12:6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라며 경고가 억압이 아닌 사랑의 연장임을 재확인합니다. 푸코의 시각은 세속적 권력관계를 다룰 뿐,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셋째, 회의론자들이 이사야를 신화로 치부하며 경고를 허구로 보는 것은(도킨스) 구약의 신학적 일관성을 무시합니다. 이사야 1:18의 초대는 단순 희망이 아니라, 레위기 16장의 속죄제(죄 씻음)와 연결되며 구체적 구원의 예표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시》가 신들의 분노로 혼돈을 다룬다면, 구약은 한 분 하나님의 사랑으로 질서를 세우며(이사야 45:18), 경고는 그 사랑의 일부로 백성을 지킵니다. 도킨스의 비판은 신앙의 초월성을 이해하지 못한 단견에 불과합니다.

 

넷째, 다른 종교의 맥락 차이(꾸란 46:9, 바가바드 기타 4:17)는 구약의 독특한 통합성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경고자(꾸란 46:9)는 알라의 자비와 연결되며(꾸란 39:53), 구약의 “내가 너희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에스겔 33:11)와 본질적으로 일맥상통합니다. 힌두교의 업보가 냉정하다 해도, 구약은 경고 후 “내가 너를 회복하리라”(예레미야 30:17)로 사랑을 약속하며 차별화됩니다. 이는 경고가 사랑에서 온다는 구약의 주장을 보편적 진리로 강화합니다.

 

다섯째, 유다의 멸망(예레미야 52:3-11)이나 현대 고난이 경고와 사랑을 분리한다고 보지만(러셀), 이는 하나님의 때와 주권을 놓칩니다. 호세아 14:4는 “내가 그들의 패역을 고치고 사랑하리라”며 멸망 후에도 회복을 약속합니다. 신명기 4:29-31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면 만날 것이니라”며 고난 속 경고가 사랑으로 돌아옴을 보증합니다. 고난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회개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인내입니다(베드로후서 3:9).

 

마지막으로, 이사야 13:9의 “잔혹한 날”과 이사야 1:18의 자비가 상충된다는 지적은 문맥을 오독한 결과입니다. 이사야 13장은 이방 나라(바벨론)에 대한 심판이고, 이사야 1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경고입니다. 시편 103:8-9는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라며 사랑과 경고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반증은 경고를 단편적으로 보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축소 해석한 데 불과합니다. 구약의 증언, 경고의 구원 목적, 역사적 맥락은 경고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서 온다는 사실을 단호히 입증합니다.

 

 적용: 경고가 사랑에서 온다는 믿음의 실천

 

경고가 사랑에서 온다는 믿음은 우리의 삶에 실천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첫째, 누군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조언하며 회복을 돕는 사랑을 보여주세요. 둘째,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 속 경고를 묵상하고, 하루 5분 회개의 기도를 드려보세요. 셋째, 공동체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경고와 사랑이 함께하는 대화를 나누어 보세요. 이는 하나님의 경고가 우리를 살리려는 사랑임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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